맛있는 음식이 몸을 채우듯 좋은 책은 마음을 채운다. 문학 작품 속에서 과일은 색이나 맛은 물론 그 과일의 분위기까지 글감이 되어 쓰이곤 한다. 시고 달고 떫고, 빨갛고 노랗고 푸릇한 여러 과일이 글 안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우리 문학 작품 속 과일을 읽어본다.
♣ 초록에서 노랑까지의 시간 <귤의 맛>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꽃이 진 자리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해 한 알의 과일이 되기까지, 과일의 여정은 참으로 길다. <귤의 맛>은 그 긴 과정을 청소년의 성장기에 비유해 풀어낸 소설이다.
제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란 소란, 다윤, 해인, 은지 네 명의 주인공들이 영화 동아리 모임을 통해 만나 친구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저마다 비밀과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꿋꿋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은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익어가는 귤의 시간과도 비슷하다.
소란은 그제야 들고 있던 귤의 껍질을 까서 한 번에 입 안에 넣었다. 소란의 눈이 점점 커졌다.
다윤이 피식 웃으며 소란에게 맛있지? 했다. 소란은 크게 끄덕이다가 되물었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 먹는 귤하고 품종이 다른가?”
“똑같겠지.”
“근데 왜 이렇게 맛있지?”
해인이 답했다.
“밖에서 먹으니까.”
이번에는 다윤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대하지 않아서, 예상하지 않아서, 계획하지 않아서.”
❞여행으로 떠난 제주도에서 귤 농장을 찾은 주인공들은 나무에서 귤을 따서 맛보곤 그 맛에 놀란다. 은지는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마트에서 사 먹는 귤은 초록색일 때 수확해 후숙하는 것이지만, 다 익을 때까지 나무에 매달린 귤은 나무의 영양분이 전달되어 더욱 달콤한 것이라 말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가족과 친구로부터 일찍이 상처받고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귤과도 같다. 하지만 그것이 비단 소설 속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까. 어른이 된 우리 모두 각자의 시간 속에서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익어간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상처투성이 과일은 상품 가치가 낮게 평가되지만, 성장의 시간에서 난 상처들은 반대로 한 인간의 삶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기도 한다. 인생은 다윤의 말처럼 기대하기 어렵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고,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뜻밖의 순간에 맛있는 귤을 먹게 되는 행운도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 언젠가는 올 그날 <청포도>
이육사의 <청포도>는 식민지 상황에서 독립을 기다리는 마음이 청포도를 생각하는 화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시다. 7~8월이 제철인 청포도는 시인에게 고향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과일이었을 것이다.
나무 가득 열리는 청포도만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마음에 함께 맺혔으리라. 청포도를 떠올릴 때 송이 안에 빼곡한 알맹이와 그 풍성함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이육사 또한 청포도를 통해 소담하지만 풍요로움이 넘치는 고향 마을을 떠올린다.
이육사는 독립운동가로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저항 시인 중 한 명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풀려난 이후 <청포도>라는 시를 썼다. 이육사가 사망한 후 그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는 <청포도>가 적힌 시비(詩碑)가 세워졌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열매 맺는 청포도처럼 그의 저항 정신도 결실을 맺어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신비로운 푸른 길을 따라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푸른색은 쓰임에 따라 여러 이미지로 표현된다. 맑음, 깨끗함, 청렴함 등의 이미지로 쓰일 때도 있고, 차가움이나 신비로움을 표현할 때 쓰기도 한다. 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속 푸른 사과는 낯선 장소에서 만나는 신비로운 과일이자 주인공의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쓰인다.
파란색을 가진 사과는 청사과, 풋사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소설은 그중에서도 ‘푸른 사과’라는 단어를 고름으로써 보다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담아냈다.
키 큰 풀들이 바람에 눌려 낮게 누운 차창 밖은 사람이 없고 길과 그리고 또 길뿐이다.
늦가을이란 얼마나 멋진가. 결코 잊을 수 없다.
“사과 먹을래?”
내가 말이 없자 그는 조금 전 지나온 소도시의 먼지투성이 길가에서 샀던,
푸른 사과가 든 종이봉투를 가리킨다. 아, 그 사과가 있었지. 푸른 사과가.
❞소설 전반에 깔린 가을날의 아름답지만 건조한 풍경이 푸른 사과와 만나며 한결 쓸쓸함을 자아낸다. 이 소설 속에서 푸른 사과는 ‘국도’라는 장소와 약간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사물이다. 그 때문에 더욱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나는 뒷좌석에 뒹구는 남아 있는 푸른 사과를 한입 깨물어 먹었다.
시고 떫은 맛이 안개처럼 나를 가득히 차지해버린다.
너랑 헤어져도 잊히지 않겠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애인이 생겼어.”
나중에 그는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푸른 사과는 조직이 단단하고 새콤한 맛이 특징이다. 빨간 사과에 비해 풋내가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별의 순간에 시고 떫었던 푸른 사과를 생각한다. 아마 그 맛은 사과가 아니라 이별을 맞은 주인공의 감정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푸른 사과 한 알로 낯선 가을 풍경을 그려내고, 슬픔과 쓸쓸함도 그려낼 수 있다니. 늘 비슷한 이미지로만 단순하게 생각했던 과일을 이렇게 다양한 얘기로 풀어내는 것은 문학 작품이 가진 힘이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문학 속 여러 맛을 가진 과일을 찾아 한 입 맛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