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견고하게 하고자 한다면 잣나무를 쓰는 것이 가장 낫고,
완전하게 하고자 한다면 옻칠을 쓰는 것이 가장 낫다.
- 조호익 , <가례고증> 제6권(1646년) 중에서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옻칠의 가치를 잘 알았다. 옻나무의 진을 무기나 연장에 발라 녹슬지 않게 했고, 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생활용품에 발라 치장하고 내구성도 높였다. 2000년이 넘도록 우리 곁을 지켜온 칠기. 그 놀라운 비밀을 확인해본다.
♣ 완전하고자 한다면 옻칠을
제아무리 ‘스마트’한 기구가 즐비한 요즘 주방이라 해도, 이것 하나쯤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로 되어 있는데 유난히 색이 진하고 윤이 나는 그릇. 바로 칠기다.
칠기는 옻칠을 한 기물이나 용기를 일컫는다. 제사를 지내는 집이라면 제기로 친숙할 듯. 그릇뿐 아니라 가구, 공예품 등 옷칠을 두른 용품은 우리 일상에 자연스레 자리하고 있다.
낙엽교목의 일종인 옻나무는 티베트 지방의 고원지대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옻나무 수피에 상처를 내면 유회백색 액체가 흘러나온다. 이것이 옻나무의 진액인 옻이다. 옻은 인체에 무해한 천연 도료다. 옻칠을 하면 각종 산과 알칼리에 부식되지 않으며, 내염성, 내열성 및 방수, 방충, 방부, 절연 효과가 뛰어나다.
그래서 일찌감치 이 같은 장점을 파악한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옻칠을 각종 생활용 기물이나 악기, 무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해왔다.
칠기의 역사를 알아보려면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1~3세기경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다량의 칠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칠전이라는 관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옻칠의 수요와 공급, 옻나무 재배를 관청까지 따로 두고 특별히 관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쓰는 각종 기물을 담당하던 중상서와 병기 제조를 관장한 군기감에 칠장을 두었으며, 그 유명한 팔만대장경에도 옻칠을 해 보존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따르면 옻칠은 관수품이자 군수품이었다. 또한 전국 각 군·현마다 옻나무가 몇 그루인지 파악해 3년마다 기록하도록 했다. 옻나무는 함경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전국 어디서나 잘 자랐고, 덕분에 귀중한 산림자원 역할을 했다.
♣ 보물을 만드는 옻칠
스님들은 식사 때 발우라는 식기를 사용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김치 한 조각과 약간의 물로 발우를 씻고 마른행주로 닦아 보관한다. 별도로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발우에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 또한 칠기에 음식을 담아놓으면 일반 그릇에 둔 것보다 신선도가 오래 유지된다. 이는 모두 옻칠 덕분이다.
옻은 신기하게도 열에 마르지 않고 습기에 마르는 성질이 있다. 적정한 습기가 있어야 마르고, 건조된 뒤에도 습기를 지녀 스스로 습도를 조절한다.
또한 열과 산성에 강하며, 전자파를 흡수한다. 최근에는 살균력과 항암 효과도 밝혀졌다. 그 많은 기능적 장점은 둘째치고라도, 무엇보다 칠기는 아름답다. 그 특유의 우아한 색과 은은한 광택은 어떤 인공적인 재질 따위가 흉내낼 수 있을까.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장점이 많은 칠기지만 아쉽게도 단점도 있다. 옻나무에서 옻을 채취하는 것도, 도료를 취급하는 것도 여간 까다롭지 않은 것이다. 옻 채취는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 반해 얻을 수 있는 양이 적다.
게다가 계절별 산출량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간편하고 가격이 저렴한 합성수지도료에 밀려 옻칠 생산과 보급은 20세기 후반 거의 쇠락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옻칠이 친환경 도료로서의 가치를 다시금 인정받고 있다.
옻칠은 어떤 합성수지도 지니지 못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주방기기나 전통 공예품 이외의 활용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해저 케이블, 선박, 비행기 등을 비롯한 각종 현대 기기의 산업 도료로서 옻칠이 각광 받을 날이 머지않은 듯싶다.
최근에는 옻의 품질 기준을 과학적으로 밝혀냈고, 이를 다양한 산업 분야에 적용할 방안을 계획 중이라는 뉴스 보도도 있었다. ‘옻 오를까’ 두려워 직접 닿을 수는 없지만, 옻나무가 내주는 귀한 옻은 다양한 사물을 감싸 보물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칠장들은 옻칠을 신이 준 선물이라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