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인류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를 제공해준 곡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몸은 물론 세상도 지금과 달라졌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의 든든한 기반이 되어준 곡식과 그에 얽힌 속담을 살펴본다.
♣ 밥·빵·면, 인류의 주식이 된 곡식
곡식은 사람의 식량이 되는 쌀, 보리, 콩, 조, 기장, 수수, 밀, 옥수수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곡물, 곡류 또는 알곡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쌀 이외의 곡식을 잡곡이라고 부른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식의 알은 낟알 또는 곡립이라고 하며, 곡식 낟알이 열릴 부분이 마지막 잎새 밖으로 나온 것을 이삭이라고 한다. 곡식에는 사람에게 영양이 될 수 있는 전분질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전분질이 있는 감자와 고구마도 넓은 의미의 곡식에 포함하기도 한다.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벼는 몬순 기후대에 있는 아시아 동부권과 남부권에서 주로 재배되고, 밀은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아시아, 인도와 중국,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러시아, 호주 등지에서 생산되고 있다.
수수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고, 감자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재배하고 있다. 그 밖에 보리와 기장, 호밀, 콩 등 다양한 곡식이 세계 곳곳에서 재배되고 있다.
인류가 줄곧 농경을 지속해온 것은 바로 주식인 곡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날것으로 섭취하긴 어렵지만 가공을 거치면 밥과 빵, 국수 등 인류의 식단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식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대다수 문화권의 식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인류의 주식인 곡식은 독성이 없고 담백한 맛을 지녀 손쉽게 먹을 수 있다. 기후와 토질에 따라 재배 시기가 한정돼 있고 재배 기술이 필요하지만, 널리 재배될 수 있고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는 데다 장기간 저장도 가능하다.
다수 문화권에서 곡식을 주식으로 섭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고기와 채소, 과일 등에 비해 생산량이 많다. 또한 곡식 대부분은 탄수화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열량이 높은 편이어서 몸에 많은 에너지를 공급해줄 수 있다. 물론 높은 열량 때문에 최근에는 다이어트 등의 목적으로 곡식을 기피하는 경우도 있다.
6·25 전쟁 이후 한국은 쌀 부족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쌀을 비롯한 식량 자급이 이루어지면서 식량 걱정이 사라졌다.
1980년대 이전에는 곡식의 질보다 생산량에 치중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졌고, 식량 자급 이후에는 맛과 영양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밥맛이 좋고 유용성분 함량이 높은 쌀·보리 품종을 육성해 그 성과를 거두고 있다.
♣ 곡식에 대한 애착이 담긴 속담
곡식은 오래전부터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식량인 만큼 많은 속담이 전해진다. ‘숙성된 곡식은 여물기도 일찍 된다’는 속담은 곡식이 충분히 익어야 맛있는 것처럼, 지식이나 경험 따위를 충분히 기르고 쌓아야 원하는 일의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곡식의 숙성과 수확 등을 소재로 당시 서민들의 삶에 교훈을 주는 속담들은 그 밖에도 많다. ‘오뉴월 품앗이 논두렁 밑에 있다’는 여름에 빌린 돈은 가을 추수 때 곡식을 거둬 갚게 된다는 뜻이다.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우리 선조들에게 가을 수확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으리라.
이 속담에는 아직 빚 갚을 날은 멀었지만, 그날을 기다린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곡식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곡식이 익을수록 고개가 기울어지듯, 지식이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딸은 제 딸이 고와 보이고, 곡식은 남의 곡식이 탐스러워 보인다’는 남의 물건이 제 물건보다 좋아 보임을 이르는 뜻으로 사람의 물욕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다.
농사가 항상 잘될 수는 없는 법. 흉년과 관련된 속담들도 있다. ‘흉년에 뱀이 조 이삭을 먹는다’는 농사를 망치면 곡식이 귀해지니 별별 것이 다 달라붙어 곡식을 축낸다는 뜻이고, ‘흉년의 곡식이다’는 말 그대로 곡식이나 물건이 적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알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한 해 농사는 곧 선조들의 생명과도 같았다. ‘자식 죽는 것 봐도 곡식 타는 건 못 본다’라는 속담에는 농사에 대한 애착이 잘 담겨 있다. 오죽하면 혈연보다 한 해 농사를 더 중요하다고 말하겠는가.
♣ 선조들의 삶을 담은 쌀과 떡
여러 곡식을 다룬 속담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벼에서 껍질을 벗겨낸 알맹이를 뜻하는 ‘쌀’이다. 그렇다 보니 벼와 쌀은 물론 쌀로 만들어진 떡과 관련된 속담이 많이 전해진다.
‘숯은 달아서 피우고 쌀은 세어서 짓는다’는 숯은 저울에 달아서 불을 피우고 쌀은 한 알씩 세어서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몹시 인색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나무가 묵어야 쌀이 묵는다’는 땔나무를 여유 있게 쌓아둔 집이라야 곡식도 그만큼 많은 법이라는 뜻으로 땔나무가 쌓인 것만 봐도 그 집안의 형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곡식 가루를 찌거나, 그 찐 것을 치거나 빚어서 만든 떡은 오랜 기간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왔다. ‘누워서 떡 먹기’는 유명한 속담으로 매우 쉬운 일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맛있는 떡을 편한 자세로 누워서 먹는 것이 무척 편하고 쉽다는 데서 착안한 속담인데, 사실이 자세로 떡을 먹다가는 체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남이 어떤 일로 굿을 하든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주는 떡이나 잘 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오지랖은 되도록 자제하자는 교훈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안 그래도 하려고 했던 일을 기회가 온 김에 해치울 때 쓰는 말이다. 떡은 제사상에 항상 오르는 만큼, 한번 마음먹은 일을 미루지 말고 해치운다는 뜻이 담겨 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에는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을 미루어 짐작해 행동하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 있고,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준다’에는 자녀가 귀할수록 잘 가르쳐야 한다는 선조들의 교육관이 담겨 있다.
이처럼 선조들은 쌀을 비롯한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고 따뜻함과 행복을 느꼈다. 그 안에는 당시 선조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