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라면을 삶지 않고 ‘끓인다’. 그만큼 면보다 국물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국과 탕, 찌개, 전골에 이르기까지 ‘국물’에 진심인 한국인. ‘국물도 없으면’ 서운하고 ‘진국’이 더없는 칭찬인 우리의 국물 문화를 들여다본다.
♣ 평생 국물과 함께
조금 과장하자면 한국인은 국으로 시작해 국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산모는 미역국을 먹고 모유로 아기에게 그 영양분을 나누어준다. 생일날엔 미역국을, 결혼식엔 잔치국수를, 장례식에선 육개장을 먹는다.
설날에는 떡국, 추석에는 토란국, 술 마신 뒤에는 해장국을 먹고, 몸보신을 위해 삼계탕을 먹는다. 잘 차린 밥상에는 국과 찌개가 함께 오르기도 하고, 오죽하면 국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까. 우리는 왜 이토록 국물에 집착하는 걸까.
한식에서 국물의 위상은 이미 단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먹을 것을 ‘음식’이라고 한다. 즉 먹는 것만이 아닌, 마시는 것까지 아우른 말이다. 사실 국물 요리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식의 ‘국물’이 독특한 것은 국이 부메뉴가 아니라 밥과 짝을 이루는 필수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서양의 수프, 중국과 일본의 국물은 주식과 분리된 별개의 요리거나 부수적인 음식이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3첩, 5첩, 7첩 등 반상의 반찬(첩) 개수를 셀 때 국은 밥과 동등하게 취급해 반찬에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 내력 깊은 국물 사랑
‘끓이는’ 조리법은 인류가 그릇을 발명했을 때 시작됐으니 국의 역사도 그만큼 오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선 <고려사>에 왕이 밥과 국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시대 이미 국이 중요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려와 조선 시대 문헌에서는 국에 대한 언급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전집>이란 책에 “비빔밥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데, 배를 채우기로는 국밥이 제일이다”라고 적기도 했다.
또한 조선 시대 음식과 요리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에는 무려 58가지의 탕 음식이 실려 있기도 하다.
요즘은 물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끓인 음식을 우리말로 ‘국’, 한자로 ‘탕’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 갱, 확, 찬, 손 등 주재료에 따라 그 이름을 구분한 것. 갱은 채소, 확은 고기, 찬은 곡식을 주재료로 끓인 국물 음식을 일컫는다.
그 밖에 손이란 음식도 있는데, 물에 곡식을 말아 먹는 국물 음식이다. 요즘으로 치면 물에 밥을 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재료에 따라 국물 음식의 이름을 일일이 구분해 쓸 정도였으니 선조들의 국물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 쌀밥을 더 맛있게
우리 민족이 국물 음식을 즐겨 먹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일단 온돌 덕분에 아궁이 가마솥에 항상 물을 끓였고 이를 이용해 국물 문화가 발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깨끗하고 풍부한 식수도 한몫했다고. 보다 오래된 주장으로는 없이 살아 적은 재료로 많은 이들이 배불리 먹기 위해 국물 음식을 주로 먹었다는 설이 있다. 요즘은 이에 대해 반론이 많은 편으로, 그 이유를 쌀에서 찾는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쌀밥을 많이, 즐겨 먹었다. ‘고봉밥’이라 부를 만큼 양이 많은 밥을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고기가 부족해 밥으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쌀이 그만큼 영양가가 높은 곡식이었기 때문이란 것.
이렇듯 영양분이 풍부한 밥을 쉽게 삼키고 많이 먹기 위해서는 국이나 찌개 같은 국물 음식이 필수였기에 국물 음식이 발달했다는 설명이다.
기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유로 꼽힌다. 길고 추운 겨울엔 국물로 몸을 따뜻하게 해야 했으며, 여름은 여름대로 뜨끈한 국물을 먹어 땀을 배출해 시원함을 느끼게 한 것이라고.
정확한 근거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우리 민족이 국물 음식을 즐겨 먹는 까닭은 이렇듯, 다양한 문화와 환경적 요인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 국물 음식에 숨은 과학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국물 음식은 금방 만들 수 없다. 어떤 국이나 탕이든 재료를 넣고 한참을 끓여야 그 맛도 깊어진다. 정성은 또 말해 무엇하랴. 국물 요리의 핵심이 시간과 정성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속에는 과학이 숨어 있다.
국물 음식의 주재료로 많이 쓰이는 고기는 제대로 요리하지 않으면 맛은 물론이요 소화 흡수도 포기해야 한다. 고기의 탄력에는 근육과 콜라겐이 중요한데, 특히 격한 움직임을 담당하는 큰 근육은 강한 콜라겐과 두꺼운 근섬유로 인해 질기다.
긴 시간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이 콜라겐은 부드러운 젤라틴으로 변한다. 고기가 아니어도 소뼈를 8시간 정도 가열하면 뼈의 콜라겐 중 20%가 젤라틴 형태로 우러나온다. 고기는 풍미가 좋지만 비싸고, 뼈와 껍데기는 그에 비해 맛은 떨어지지만 싸고 훌륭한 젤라틴 공급원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를 잘 알아 고기는 물론이고 소뼈나 돼지 껍데기 등을 우리고 우려 맛 좋고 영양가 높은 국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고기 외에도 우리는 다시마, 멸치 등을 국물 재료로 많이 쓴다. 이들이 내는 맛은 바로 ‘감칠맛’. 감칠맛은 한 가지 재료를 쓸 때보다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쓰면 그 맛이 훨씬 증가한다고 한다.
다시마에 풍부한 글루탐산과 멸치에 많은 이노신산이 50:50으로 만나면 감칠맛이 무려 일곱 배까지 늘어난다니, 알게 모르게 우리는 국물을 낼 때 과학을 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국물 음식에는 많은 의미와 지혜가 우려져 있다. 아무리 식생활이 변한다 해도 한국인이 밥심으로 살고 국물로 힘을 낸다는 진리는 불변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