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가 없을 때도 먹을 수 있는 제사 음식, 바로 헛제삿밥이다. <한국음식의 뿌리를 찾아서>의 저자인 김영복 식생활연구가에 따르면 헛제삿밥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태두로 한 경상 사림파의 서원문화가 만들어낸 음식이다. 진주, 안동, 대구에서만 헛제삿밥을 만날 수 있는 이유이다.
❞♣ 경상도와 헛제삿밥의 유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 음식은 가장 좋은 음식재료를 선별해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그러니 제사 음식의 맛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이는 제삿날만 손꼽아 기다린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맛은 ‘제사가 없을 때도 제사 음식을 먹을 방법’을 자연스럽게 찾도록 만들었을 것인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헛제삿밥이다.
그러니까 헛제삿밥은 제사가 없는 날에도 먹는 제사 음식을 말한다. 이는 헛제삿밥이 진주, 안동, 대구 등 경상도를 중심으로 발달한 이유와도 통하는데, 유교 문화가 강했던 경상도는 제사도 많았다.
아울러 식생활연구가 김용복 씨는 조선역사지리서인 ‘택리지’에 ‘조정의 인재 반이 영남인’이라고 적힌 부분에 주목했다. 경상 좌도였던 안동의 이황과 경상 우도였던 합천을 중심으로 한 조식은 영남사림파의 두 축을 이뤘고, 사림은 16세기 이후 중앙 정계에 본격 진출했다.
이들이 관직에서 떠나 낙향 후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길러내는 과정에서 태생한 음식이 바로 헛제사밥이라는 설명이다.
헛제삿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양반들이 춘궁기에 드러내 놓고 쌀밥을 먹기가 미안해서 제사 음식을 차려 놓고 가짜로 제사를 지낸 후 제사 음식을 먹은 데서 유래됐다는 설과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천민들이 한이 맺혀 제사도 지내지 않고 제삿밥을 만들어 먹은 데서 시작됐다는 설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서원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깊은 밤까지 공부를 하다 출출해지면 제사 음식을 차려 놓고 축과 제문을 지어 풍류를 즐기며 허투루 제사를 지낸 뒤 먹은 음식이 바로 헛제삿밥이라는 주장이다.
♣ 헛제삿밥 상차림
조상에 제사를 지낼 때 차려내는 음식을 제수 또는 제찬이라고도 한다.
기본 제수는 메(기제-밥· 설-떡국·추석-송편), 삼탕(소·어·육), 삼적(소·어·육), 숙채(시금치·고사라·도라지의 삼색나물), 침채(동치미), 청장(간장), 포(북어·건대구, ·육포 등), 갱(국), 유과(약과·흰색산자·검은깨 강정), 과실(대추·밤· 감·배), 제주(청주), 경수(숭늉) 등이다.
지체가 높거나 살림이 넉넉한 집안에서는 3탕, 3적, 3채를 더해 5탕, 5적, 5채를 올리는 등 지방, 학파, 가문에 따라 제수가 달라지기도 한다.
헛제사밥은 이 제수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차려내는데,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3탕(三湯: 명태·건홍합·피문어), 3적(三炙: 육적·어적·두부적), 3채(三菜: 숙주·고사리·시금치)를 기본으로 차려낸다.
또 마른 찬으로는 민물고기나 조기 등을 약간 말려서 쪄서 냈으며, 탕국은 생선대가리 남은 것을 전유어와 함께 끓여서 냈다. 다만, 제사상에는 고추가루가 들어간 찬은 내놓지 않는 데 비해 헛제사밥에는 배추김치라든가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이 오르기도 했다.
여기에 후식으로 떡, 과일, 식혜를 올린다. 김용복 식생활연구가는 “헛제사밥은 차려 놓은 그대로 먹기도 하지만 놋대접에 삼채나물과 탕국,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비벼 조상과 자손이 함께하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의미를 갖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헛제삿밥을 먹을 때는 나물에 고추장을 넣지 않고 깨소금 간장으로 간을 해 비벼 먹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지만, 일부 음식점에서는 손님의 기호에 따라 고추장을 내놓기도 한다.
♣ 진주 헛제삿밥
진주 헛제삿밥은 진주냉면, 진주비빔밥, 진주 교방음식과 더불어 진주의 4대 향토 음식이다.
진주시청에 따르면 진주의 헛제삿밥은 조선시대 유생들이 밤늦게 공부를 하다가 밤참을 먹고 싶었지만 가난한 이웃이 마음에 걸려, 제사를 지내는 척하고 그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다는 데서 유래했다.
아울러 새로 부임한 경상관찰사가 진주의 제사밥을 먹어 보고는 그 맛에 감탄하여 틈만 나면 제사밥을 찾았고, 이에 하인들이 꾀를 내어 제사 밥 비슷하게 상을 차려 냈지만, 향냄새가 배어있지 않아 들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진주 헛제삿밥은 진주의 전통적 제례를 기본으로 하는 상차림으로, 안동이나 대구지역과는 그 차림새가 다르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기제사를 모실 때 마련하는 제물 중에 제음, 제탕, 숙채, 적, 생과 등이 있으며, 이를 수효에 맞춰 장만하는 관습이 있다.
탕이 3탕이면 숙채 즉 나물도 3채가 되고, 적도 3적, 실과도 3과가 되는 것이다. 계절에 나오는 나물들을 사용해 식품의 색깔을 배합하고, 계절의 나물로 숙채를 마련했다.
진주 헛제삿밥의 기본적인 상차림도 제수 음식과 같이 3탕, 3적, 3채를 중심으로 차려지며, 조기를 쪄 낸다. 진주 헛제삿밥에는 진주 유과와 식혜가 함께 곁들여진다. 진주 유과와 단술의 맛은 예로부터 조선 제일이라 하였다.
♣ 안동 헛제삿밥
안동지역에서는 헛제삿밥을 ‘헛신위밥’, ‘허신지밥’이라고도 불리며, 한자어로는 ‘허제반(虛祭飯)’이라고 호칭한다.
안동 헛제삿밥에 대해서는 안동지역의 도산서원과 병산사원 등 유명 서원의 유생들이 쌀이 귀한 시절 제사 음식을 차려 놓고 축과 제문을 지어 풍류를 즐기며 허투로 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사 음식을 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함께 경상도 관찰사가 진주의 제삿밥이 유명한 것을 알고 밤마다 부하들에게 이를 구해 오게 했는데, 부하들이 진주까지 갈 수 없어 꾀를 부려 헛제삿밥을 만들어 바쳤다가 향 냄새가 안 나서 탄로가 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안동 헛제삿밥 차림은 음복상의 모습 그대로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제사에 사용되는 고사리, 도라지, 무채, 시금치,콩나물, 가지, 토란 등의 3색 나물 한 대접과 각종 전과 적이 한 데 담겨 나온다.
산적에 간고등어와 상어고기가 들어가는 것이 특이한데,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돔배기를 제삿상에 올렸다. 대구 경북 지방의 제례에 돔배기가 쓰인 것은 삼국시대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탕과 깨소금, 간장 종지, 밥 한 그릇이 나오며, 탕은 어탕(어물로 끓인 것), 육탕(소고기로 끓인 것), 채탕(채소 위주로 끓인 것) 이렇게 삼탕이 모두 같이 석인 막탕이다. 제사 음식에는 고추장과 마늘 등의 양념이 들어가지 않는다.
안동 헛제삿밥에는 항상 안동식혜가 따른다. 안동식혜는 무와 고춧가루 물이 들어가는 독특한 음청류로, 우리가 흔히 아는 식혜와는 다르다. 밥과 얄팍하게 썬 무와 엿기름 우린 물과 생강, 고춧가루를 넣고 삭혀 만드는 안동식혜는 고춧가루와 생강의 매콤한 맛과 무가 어우러져 담백한 맛을 낸다.
♣ 대구 헛제삿밥
대구 헛제삿밥도 진주, 안동의 헛제삿밥처럼 유생들이 즐겨먹던 음식으로 보고 있는데, 1925년 최영년(崔永年)이 지은 《해동죽지》에 대구부의 헛제삿밥에 유명하다고 기술돼 있다.
《해동죽지》에는 “우리나라 민간의 제사에서 음식이 남으면 골동반(비빔밥)을 만들었는데 대구부 안에서 이를 모방하여 맛을 내어 시장의 가게에서 판매하면서 이름을 헛제삿밥이라고 했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 문구에서 대구에서는 헛제삿밥이 일찍이 외식상품으로 판매됐다는 것을 미뤄 짐작하기도 한다.
대구 헛제삿밥의 메뉴는 제수 음식과 같게 나온다. 3적(육적·어적·소적(두부적))과 3탕(명태·건홍합·피문어), 3색 나물(숙주·고사리·시금치), 김치, 소고기육전, 돔배기, 밥, 국이 올라가는 대구의 제사 음식을 중심으로 한 상차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