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계절마다 얻을 수 있는 식재료로 특징적인 음식을 만들고 절기에 맞춰 절식을 먹는 풍속을 발전시켰다. 정월 대보름에도 다양한 절식을 즐겼는데, 그중에는 우리 몸에서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벽사’의 의미를 지닌 음식이 대부분이다. 소중한 가족과 이웃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새해 첫 만월을 맞이하며 먹는 음식에 오롯이 담긴 것이다.
♣ 오곡밥, 다섯가지 기운으로 몸의 영양을 찾다
정월 대보름은 한자어로 ‘상원(上元)’이라 하며, 이날 먹는 절식을 상원 절식이라 이른다. 이날은 우리 세시풍속에서 가장 중요한 날로, 설날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최상수의 《한국의 세시풍속》에서 소개하는 풍속의 가짓수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 해 총 192건에 이르는 세시 행사 가운데 정월에 행해지는 것이 절반을 차지하는데, 그중에서도 대보름날 하루에 관계된 것만 55건에 이른다. 보름날은 ‘달, 여신, 대지’로 이어지는 풍요 원리를 담고 있다.
농경이 중심이던 우리 문화에서 한 해의 생명력과 생산력을 결정짓는 새해 첫 보름날인 정월 대보름에 오곡밥을 지어 먹으며 풍농을 기원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터다. 오곡밥을 먹는 풍속은 신라 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은 역모를 알려준 까마귀에게 고마움의 뜻으로 해마다 음력 1월 15일에 귀한 재료를 넣은 약식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잣이나 대추 같은 귀한 재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서민들은 찹쌀, 수수, 팥, 콩, 차조 등을 넣어 지은 오곡밥으로 대신하며 한 해의 액운을 막고 건강과 풍년을 기원했다.
오곡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을 띠는 다섯 가지 곡물로, 한의학에서는 이 오색 기운을 고루 받아 몸 안의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이 밖에도 오곡은 ‘모든 곡식’을 일컫는 표현으로, 오곡을 다 지었다면 모든 농사를 지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오곡밥을 지으면 집안을 보살펴주는 가신들에게 먼저 올려 가정의 화합과 풍요를 빌었으며, 행여나 형편이 어려워 밥을 먹지 못하는 이웃을 배려한 것인지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 한 해 운이 좋다’는 속설도 생겨났다.
♣ 묵은 나물, 찾아올 여름 더위를 미리 물리치다
정월 대보름 오곡밥과 짝을 이루어 찬이 되는 것이 바로 묵은 나물이다. 지난해 봄과 가을, 산과 들에서 따다가 볕에 말려 겨우내 묵혀둔 나물 재료를 정월 대보름에 꺼내어 삶아 먹는다 하여 묵은 나물이라 칭하며, 한자어 표현으로는 ‘진채’라고 한다.
주로 호박고지와 가지, 버섯, 고사리, 도라지, 시래기, 아주까리잎, 토란대 등이 사용된다. 묵은 나물은 여름 더위를 무사히 보내기 위해 먹던 건강 기원 음식으로, 《동국세시기》에는 ‘묵은 나물을 먹으면 다가올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신선 채소가 귀했던 겨울철에 묵은 나물은 영양소를 공급하는 귀중한 식재료였다. 오랜 기간 저장하여 먹을 수 있는 뛰어난 저장성과 높은 활용도는 묵은 나물의 큰 장점으로 꼽힌다.
말린 나물을 물에 잘 불렸다가 삶아서 기름에 볶거나 육수를 붓고 푹 끓이면 생채소와는 또 다른 구수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묵은 나물은 추운 날씨에 열량을 돋우는 음식이기도 한데, 제맛은 역시 대보름을 전후한 때다.
절기상으로는 초봄이지만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아 열량 있는 절식이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편, 묵은 나물은 지역에 따라 종류를 달리한다. 강원도처럼 산이 많은 곳에서는 취나물을 말려 두었다가 먹으며, 바다 인근 지역에서는 모자반 같은 해초류를 사용하기도 한다.
♣ 부럼, 이를 튼튼하게 하고 부스럼을 예방하다
정월 대보름 이른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부럼 깨기다. 온 식구가 모여 밤이나 호두, 은행, 잣과 같은 견과류를 어금니로 단번에 깨물며, “올 한 해 무사태평하고 부스럼 안 나게 해주옵소서” 하고 축원사를 함께 외운다.
이때 먹는 견과류를 ‘부럼’ 또는 ‘부름’이라 칭하며 나이 수대로 깨무는데, 처음 것은 축원사를 외며 마당이나 지붕에 던지고 두 번째부터는 껍질을 깨문 뒤 먹는다.
예로부터 부스럼을 예방하고자 행했던 이 세시풍속은 조선 후기의 여러 기록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광범위하게 전승돼온 민속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보다 한참 앞서서 부럼 깨기는 ‘단단한 것을 깨물어 치아를 튼튼하게 한다’는 인류 공통의 주술적 목적에서 비롯된 행위다. ‘부럼’은 굳은 껍질의 과일을 총칭하는 뜻과 부스럼의 준말인 종기라는 두 뜻을 담고 있는 동음이의어다.
이것이 종기를 동반한 피부병이나 전염병의 위험이 현실적으로 크게 의식되던 시대와 만나 ‘부럼 깨기’라는 말로 변하고, 정초 세시풍속의 특징에 따라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뜻이 더해져 주술성과 축원성을 띠는 한국적 세시풍속으로 뿌리내린 것이다.
2017년 세계보건기구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인의 1인당 하루 평균 채소 섭취량은 384g로 권장 섭취량인 250g보다도 웃도는 수치였다. 언뜻 전 세계인이 채식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균을 끌어올린 데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할이 컸다.
최근에는 서구화된 식생활로 우리나라도 채식의 비중이 줄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밥상에 나물은 빠지지 않고 오르는 기본 찬이다. 다양한 채소 요리법을 자랑하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나물 요리를 꼽자면 묵은 나물, 바로 진채식이다.
‘일제강점기, 북간도에는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주변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그중 조선 사람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른 봄, 나물 바구니를 끼고 산에 오르는 이들은 모두 조선 사람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조선 사람들은 봄만 되면 산과 들로 나물을 캐러 다녔다.’
* 언론인 홍승면의 말
♣ 건강에 이로운 산나물
우리 민족은 밥상 위의 나물 종류로 계절을 가늠했을 정도로 사시사철 때에 맞게 나물을 즐겼다. 그만큼 친숙해서 우리에겐 특별할 것 없는 반찬, 나물. 하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옛 선조들의 소박하지만 건강한 음식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나물이다.
쌀밥이 주식인 우리 밥상에 나물은 풍부한 식이섬유와 비타민, 무기질, 그리고 파이토케미컬을 더해주는 급원 식품이다. 특히나 고사리나 씀바귀 같은 산나물은 우리 몸을 약알칼리성 체질로 바꿔주며, 체내 항산화력과 면역력을 강화하는 성분을 풍부하게 품고 있다.
산림청에 따르면, 산나물 추출물의 효능을 실험한 결과 대부분 산나물 추출물이 높은 항암 효과를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산나물이 항당뇨, 항비만 등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농촌진흥청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주요 산나물 23종 가운데 당뇨와 비만 등 대사질환 예방에 효과가 있는 산나물은 선씀바귀, 배초향, 섬쑥부쟁이, 쑥부쟁이 4종이다. 선씀바귀는 산골짜기나 냇가에서 흔히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어린잎과 뿌리를 나물로 먹었으며, 민간에서는 진정제 등 약제로도 사용해왔다.
배초향은 ‘한국의 허브’로 알려진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독특한 향 덕분에 향신료로 주로 쓰이며 유해 미생물을 없애는 효과로 유명하다. 항비만 효능이 밝혀진 섬쑥부쟁이와 쑥부쟁이는 예로부터 항염 효과가 있어 편도선염 및 기관지염 치료에 활용돼왔다고 한다.
먹는 것과 약의 근원을 같다고 본 ‘약식동원’의 시선으로 우리 몸에 이로운 자연의 먹을거리를 탐구해온 노력이 소박하지만 다채로운 음식 유산으로 남은 것이다.
♣ 진채식의 배경이 된 옛 삶의 풍경
우리 민족이 먹어온 채소 종류만 해도 300가지가 넘는다고 하니, ‘나물 민족’이란 수식어도 과하지 않게 들린다. 우리 민족은 왜 이토록 나물 반찬을 좋아했을까? 이는 지형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국토의 70% 가까이가 산지로 이뤄져 있다 보니,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산나물과 들나물은 우리 식문화에 빠르게 녹아들어 쌈 문화와 한식의 기본인 밑반찬 문화로 이어졌고, 이는 채식 중심의 한식 문화를 이끌었다.
우리 밥상의 중심인 밥과 반찬 문화를 지탱해온 곡식과 나물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수확한 곡식이 바닥을 드러내는 춘궁기가 되면 산에서 캔 뿌리채소와 열매가 삶을 연명할 구황작물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나물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한 진채식은 끼니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 생채소의 이로움을 끌어올린 진채식
오랜 저장 기간과 높은 활용도는 묵은 나물의 최대 장점이다. 말려두었던 나물을 삶아 기름에 볶거나 육수를 조금 붓고 약불에 끓여내면 생채소와는 다른 맛과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채소는 밭에서 갓 딴 싱싱한 것일수록 몸에 더 좋을 듯하지만, 의외로 마르는 과정에서 발효되기 때문에 말린 채소의 영양소가 더 풍부하다.
‘겨울 밥상 위의 보약’으로 꼽히는 시래기를 예로 들면, 무청에는 철분과 칼슘이 다량 함유돼 있으며 항암 효과와 눈 건강에 좋은 비타민 A도 풍부한데 건조 과정을 거쳐 시래기가 되면 이러한 성분은 더욱 증가한다.
든든한 포만감으로 체중관리 및 변비 예방에 도움을 주는 식이섬유 역시 건조되면서 3~4배 이상 증가한다. 다만 시래기를 고온에서 조리하면 영양소가 파괴되기 쉬우므로, 비타민 손실을 줄이려면 소금물에 살짝 데치는 것이 좋다.
표고버섯이나 무말랭이는 햇빛에 말리면 비타민 D가 증가한다. 고사리는 말린 뒤 삶아서 먹으면 독성이 사라져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이외에도 묵은 나물과 생채소는 맛에서도 차이가 난다.
나물은 말리면 수분이 빠지면서 단맛이 더 강해지고 구수함도 배가된다. 또한, 부피도 줄어들기에 더 많은 양의 채소를 섭취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 나물을 더욱 향긋하게 하는 우리 기름
건강과 미식에 대한 꾸준한 관심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식용 기름의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우리 나물에 어울리는 것은 역시 토종 기름이다. 대표적인 참기름과 들기름은 진채식에 향긋함을 더하는 한편, 우리 밥상에 부족한 영양성분을 균형 있게 잡아주는 몫을 한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들기름은 불포화지방산 중에서도 오메가-3 계열의 알파-리놀렌산이 62% 들어있다. 이는 식물성 기름 중 가장 많은 함량으로, 학습 능력과 기억력 증진, 각종 만성질환 예방에 도움을 주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참기름은 오메가-3 지방산은 적지만 오메가-6 계열인 리놀레산이 40%, 오메가-9 계열의 올레산이 40% 들어있다. 항산화 물질인 리그난도 풍부해 노화를 억제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우리 전통 기름은 궁합이 맞는 나물과 함께 먹으면 그 향과 맛이 더욱 살아난다.
특히 묵은 나물을 볶을 때는 참기름보다 들기름을 사용하면 특유의 향취가 스며 입맛을 살린다. 참기름은 열에 약해 주로 나물을 데친 뒤 무쳐낼 때 사용하면 향긋함을 오롯이 느낄 수 있으며, 시금치나물에 사용하면 지용성 비타민 흡수율을 높일 수 있다.
고사리나물을 무칠 때는 들기름과 참기름 어느 쪽을 사용해도 각각의 색다른 풍미를 즐길 수 있으므로 자신의 미식 취향을 따라 맛있게 골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