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생선! 담백한 맛이 일품인 명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인만이 주로 즐겨 먹는 생선이기 때문이다. 12월에서 1월까지가 제철로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리는 부위가 하나도 없다. 한국인의 삶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명태. 그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도 어김없이 만나게 된다.
♣ 조선 후기 기록에 이름 첫 등장
우리나라에서 명태 어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명태(明太)라는 이름이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명태는 조선 초기까지 그 어떤 기록에서도 보이지 않다가 1530년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무태어(無泰魚)라는 칭호로 비로소 등장한다.
이후에는 어렵지 않게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 효종 3년(1652)의 기록에 보면 강원도에서 진상하는 대구 어란에 명태 어란을 더 보태어 넣은 것을 두고 문제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이때 명태가 많이 잡혀 명태 어란은 귀하지 않았으며 명태라는 이름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만영의 『재물보(才物譜)』(1798)에는 북해(北海)에서 나기 때문에 북어라 한다는 기록이 나오고 서유구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1820)에서는 생것은 명태, 말린 것은 북어라고 한다고 했다.
명태를 조선 초기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이름이 없는 생선은 먹으면 안 된다는 미신이 있어서 이름이 붙은 이후부터 잡게 되었다는 설과 명태와 대구를 동일시했으리라는 설 등이다. 명태라는 이름의 기원에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보면 “명천(明川)에 사는 어부 중 성이 태씨(太氏)인 사람이 물고기를 낚았는데, 이름을 몰라 지명의 명(明) 자와 잡은 사람의 성을 따서 명태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나와 있다.
그 외에도 함경도 등에서는 명태 간에서 짠 기름으로 등불을 밝혀서 ‘밝게 해 주는 물고기’라는 의미로 명태로 불렀다거나 영양부족으로 눈이 침침해진 산간지방의 사람들이 해안으로 나와 명태 간을 먹고 눈이 밝아져서 명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 다양한 이름만큼 음식도 각양각색
명태는 북어 외에도 이름이 매우 다양하다. 상태에 따라 생태, 동태, 북어(건태), 황태, 코다리, 백태, 흑태, 깡태 등으로 불린다.
잡는 방법이나 장소, 시기에 따라서도 이름이 다르다. 그물로 잡은 망태, 낚시로 잡은 조태, 북방 바다에서 잡은 북어(北魚), 강원도 연안에서 잡은 강태(江太), 함경도 연안에서 잡은 왜태(倭太), 함경남도에서 섣달에 잡은 섣달받이, 동지 전후에 잡은 동지받이 등 놀랄 만큼 이름이 많다.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생태찌개, 생태매운탕, 명태조림, 황태구이, 황태찜, 북엇국, 북어무침 등 명태를 이용한 음식도 많다. 우리 조상들은 명태를 저장, 발효식품으로도 활용했다.
알은 명란젓, 창자는 창난젓. 아가미는 아감젓, 간장은 어유로 만들었다. 김장에 젓갈을 거의 쓰지 않는 동해 지방에서는 명태를 넣어 젓갈 대신 아미노산을 공급받고 동해 북부 지방에서는 명태로 식해를 담가 겨우내 반찬으로 활용했다.
겨울이 성어기인 명태는 얼려서 말리는 우리나라 특유의 가공법인 동건법으로 널리 유통될 수 있었다. 명태 어업이 대성황을 이루던 시기에 개발된 우리만의 가공법이다.
또한 명태는 우리의 관혼상제에서 절대 빠지지 않았다. 제사와 차례에는 북어를 상에 반드시 올리고, 이사한 집이나 개업한 가게에 북어를 실로 묶어 걸어 복을 비는 민간신앙도 아직 남아있다.
♣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으로!
단백질, 칼슘, 인, 비타민A와 필수아미노산 등 영양소도 풍부한 명태.
온 가족이 둘러앉은 겨울 저녁에는 무를 넣고 보글보글 끓인 생태찌개, 입맛 없는 날에는 밥 한 그릇 뚝딱 비워낼 수 있는 창난젓, 출출한 겨울밤 술안주로 제격인 황태구이, 연말 잦은 회식으로 속 아픈 아침에는 북엇국 등 어느 때라도 명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