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커녕 아이스박스도 없었던 그 옛날에도 여름철 얼음을 활용해 음식을 보관하고 차가운 음식을 만들었단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대답은 얼음을 보관하는 돌로 만든 창고, 석빙고에서 찾을 수 있다. 석빙고에 숨어 있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입이 떡 벌어진다.
♣ 거대한 아이스박스
냉장고가 흔하지 않던 시절, 집집마다 아이스박스라는 것이 있었다. 요즘도 캠핑용을 비롯한 다양한 아이스박스가 있지만 그 옛날 아이스박스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름 그대로 스티로폼 상자에 비닐을 씌운 형태로, 뚜껑을 여닫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안에 덩어리 얼음을 넣고 다양한 음식을 보관했기에 여름철 얼음은 필수품이었다.
더위를 이기는 데 얼음을 활용하는 것은 쉬운 발상인 듯싶지만 ‘물을 얼리는 기술’이 없던 시절엔 어째야 했을까. 우리 조상들은 그 방법으로 ‘채집’과 ‘보관’을 선택했다. 한겨울에 흔한 얼음을 모아 봄, 여름, 심지어 가을까지 보관하는 것.
그 기발한 발상이 실현 가능했음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얼음을 보관하는 돌로 만든 창고, 석빙고다. 사실 석빙고뿐 아니라 나무로 만든 목빙고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야기만 전할 뿐 현재 남아 있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석빙고는 어떻게 얼음을 오래도록 온전히 보관할 수 있었을까.
♣ 열기는 내보내고 냉기는 간직하고
석빙고는 천연 동굴 같은 자연환경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집약해 지은 건축물이다. 그래서 경주(보물 제66호), 안동(보물 제305호), 창녕(보물 제310호), 청도(보물 제323호), 현풍(보물 제673호), 영산(보물 제1739호), 해주(북한 국보 제69호) 등에 남아 있는 7기의 석빙고는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들은 조선 시대에 축조·개축됐다.
겉모습을 보면 석빙고는 언뜻 고분처럼 보인다. 외양이 특별한 것도 아닌 데다 얼음을 만든 것도 아니고, 그저 보관하는 데 얼마나 대단한 과학기술이 필요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집 안 냉장고 냉동실에 있는 얼음을 떠올려 보자. 잠깐의 정전으로 온도가 내려갔거나 실수로 문을 제대로 닫지 않으면 얼음은 금세 녹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겨울 넣어놓은 얼음을 가을까지 보관할 수 있다니, 특별한 과학기술이 어찌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 비밀은 먼저 천장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석빙고의 천장은 홍예 구조, 즉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화강암을 잘라 1~2m 간격으로 이어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둥근 공간이 더운 공기를 가두는 에어 포켓 역할을 한다.
여기 가둬진 더운 공기는 아래쪽은 넓고 위는 좁은 직사각형 기둥 모양의 환기 구멍을 만들어 밖으로 빼냈다. 즉, 얼음을 꺼내려고 출입구를 여닫을 때 들어온 열기와 복사열로 더워진 내부 공기는 위로 떠서 모였다 환기구로 빠져나가고 빙실 아래는 찬 공기가 머물러 얼음을 녹지 않게 한 것이다.
그리고 밖에서 보이는 석빙고 지붕에는 잔디를 심어 열을 차단했고, 빙실 바닥에는 배수로를 경사지게 파 얼음 녹은 물이 밖으로 흘러나갈 수 있도록 했다.
얼음과 벽 천장 사이는 왕겨나 밀짚, 톱밥 등을 쌓아 단열 효과를 높였다. 이렇듯 유선형의 외부 형태, 내부의 환기구와 배수구, 흙과 돌의 열전도율 차이를 이용한 축열 구조 등이 석빙고의 얼음을 오래도록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다.
♣ 현대로 이어진 석빙고의 과학
석빙고의 과학적 우수성은 이미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계명대 공성훈 교수는 출입구가 열려 있어도 석빙고 내부는 외부 기온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 기온이 1℃ 범위에서 일정하게 유지됐음을 밝혔다.
한편 계명대 신동수 교수는 경주석빙고의 장빙 가능성을 확인했는데, 석빙고 전체 체적의 60%를 얼음으로 채울 경우, 출입구와 사람에 의한 열 효과를 무시하였을 때 1년 내내 얼음을 저장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대와 같은 기술력이 없던 시절에도 석빙고는 이처럼 놀라운 기능으로 얼음을 지켜냈다. 석빙고에 숨은 과학은 현대 기술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줘 이른바 ‘석빙고 원리’가 에어컨, 냉장고에 활용되고 있다.
최근 광고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무풍 에어컨’도 석빙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바람을 직접 맞지 않아도 시원한 무풍 에어컨은 석빙고의 복사냉방 원리를 적용한 것이라고.
동짓달 긴 밤을 잘라 이불 아래 넣었다 님 오실 때 펴고 싶다던 황진이의 싯구처럼, 한겨울 얼음을 저장했다 한여름에 쓸 기발한 생각은 그 옛날 누가 처음 했을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것을 실현해 석빙고라는 대단한 발명품을 만들었는지. 새삼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