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는 100년 짧게는 40년, 서울 미식 문화의 원점으로
오늘까지 꾸준히 사랑받으며 미쉐린가이드 서울 2022에 선정된 노포를 소개합니다.
고향같은 분위기, 오랜 음식으로부터의 위안으로 혼자가기에 좋습니다.
❞복고와 회귀라는 말은 뉘앙스가 비슷하나 혼용하지 않습니다. 복고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감을 회귀는 원래 있던 곳으로 걸어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미식도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을 탐닉하다가 극에 달하면 시발점으로 돌아가려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원점으로의 회귀, 노포.
1900년대 초반 서울에서 처음으로 외식 문화가 생겨날 무렵 불고기, 냉면, 삼계탕, 국밥을 파는 식당이 문을 열었습니다. 길게는 100년 짧게는 40년, 서울 미식 문화의 원점으로 오늘까지 꾸준히 사랑받으며 미쉐린가이드 서울 2022에 선정된 노포를 소개합니다.
♣ 이문설농탕 里門雪濃湯 (종로구,1902)
미쉐린가이드서울 2022 빕그루망
구수한 탕 안에 밥 소면 고기의 삼위일체
이 식당은 유관순 열사와 동갑내기 입니다. 고종 재위기인 1902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국밥을 끓여내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입니다 100년을 넘게 공평동 한옥 식당에서 영업을 해 왔지만 재개발이되어 건축물이 허물어 졌고 현재 견지동으로 이전하여 음식을 하고 있습니다.
설렁탕, 도가니탕, 머리탕이 주 식사 메뉴이며 술안주로 수육, 도가니, 혀밑, 소머리고기 등이 있습니다. 인공 조미료를 넣지 않는 뽀얀 탕국에 촉촉한 고깃살이 특징입니다.
뚝배기 아래는 토렴된 밥과 소면이 같이 말아져 있는데 대파를 넣고 후추만 뿌려 맑은 국을 만끽하다가 절반 정도 남으면 깍두기 국물을 넣고 고기에 김치를 올려 먹으면 맛이 좋습니다.
설렁탕은 “보통”과 “특”이 있는데 보통은 양지 수육이 위주인 반면 특에는 양지, 소 머리 고기, 마나(소의 비장), 혀밑 등이 푸짐하게 들어있어 소 한 마리를 통으로 삶아 먹는 쾌감이 듭니다. 테이블을 둘러보면 대부분 1인 손님들입니다. 20대에서부터 70대까지, 세대를 초월하여 소외감 없는 분위기가 따뜻한 탕과 함께 합니다
♣ 용금옥 湧金屋 (종로구, 1932)
미쉐린가이드서울 2022 빕그루망
육개장 스타일의 얼큰한 서울식 추탕
곱창 육수를 우려낸 후 버섯과 애호박. 느타리버섯, 목이버섯, 두부, 유부, 간마늘을 넣고 끓입니다. 양념은 고춧가루가 풀어져 있어 칼칼하게 얼큰합니다. 뚝배기 하나에 육개장과 어탕, 소곱창전골을 한번에 먹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미꾸라지는 따로 푹 삶아서 먹기 좋은 시점에 넣기에 모든 재료가 조화롭습니다. 보양식이라면 대부분 2인분 이상을 주문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용금옥의 추탕은 1인분 안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 우래옥 又來屋 (중구, 1946)
미쉐린가이드서울 2022 빕그루망
육수가 자작한 불고기에 평양냉면 곁들임
소고기 만을 우려내고 동치미 국물을 넣지 않는 냉면 육수는 간장과 소금간을 하기에 투명한 갈색이 됩니다. 밍밍한 평양냉면에 익숙한 사람은 다소 짜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하고 구수한 메밀면이 어우러지면 묵직한 감칠맛으로 치고 들어옵니다.
이런 형식의 평양냉면이 다른 식당에도 퍼졌는데 이를 “우래옥 계열”이라고 지칭할 정도 입니다. 여름에는 워낙 인기가 많아 대기 시간이 40분을 넘습니다. 혼자 편안하게 와서 이름을 걸어두고 인근 재래시장을 둘러보다 보면 핸드폰으로 순서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타인과의 약속 보다는 홀로 근사한 냉면을 즐기기에 좋습니다.
♣ 피양콩할마니 (강남구, 1980년대)
미쉐린가이드서울 2022 빕그루망
뜨끈하게 먹는 콩비지, 시원하게 먹는 콩국수
이 식당은 남북이산가족찾기 생방송으로 온 국민이 눈물 바다를 이루던 1980년대 문을 열었습니다. 피양콩할마니 ‘평양의 콩 할머니’ 라는 의미의 이북식 사투리에서 알 수 있듯 평양에서 내려와 서울에 정착한 할머님이 이북식 콩요리를 합니다.
일반적으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를 비지로 치는데 여기는 콩을 껍질 채 통째로 갈아 만든 되비지를 만듭니다. 매일 아침 맷돌로 갈아낸 콩을 가마솥에 뭉근히 끓여내는데 인공 조미료 없이 좋은 콩의 고소함이 가득하며 돼지고기나 새우젓으로 감칠맛을 더합니다.
뽀얀 우유빛에 걸죽한 식감은 최상의 크림 스프를 연상케 합니다. 묵은지, 무, 버섯 등으로 맛의 다양화를 꾀하고 다섯 가지 정성스러운 반찬은 양껏 집어먹을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여름에는 고소하고 진한 콩국과 투명하게 쫄깃한 생면이 잘 어우러지는 콩국수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한국의 전통 제례 음식인 모듬전도 인기가 많아 명절 전후로 주문이 밀려듭니다. 특히 묵은지와 어우러지는 콩비지의 구수함은 한국 가정식의 원형을 아로새긴 메뉴입니다. 시골 할머님이 차려주는 밥상 같습니다. 혼밥을 하면서도 누군가 나를 기다려 주는 고향으로 회귀하는 기분이 듭니다.
노포란 배고픈 사람들이 도시에 박은 거대한 뿌리이기에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도 밥그릇을 올리고 개발의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쳐도 민들레 홀씨처럼 저 멀리 날아가 다시 간판을 겁니다. 우리 시대의 ‘지속가능성’은 다름 아닌 노포에서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