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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4. 절기음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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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무더위에 지친 입맛 돌아오는 여름철 보양 수산물 3선

무더위에 지친 입맛 돌아오는 여름철 보양 수산물 3선

날이 더워질수록 보양식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기력이 없고 입맛도 없는 요즘, 팔딱이는 건강한 제철 수산물을 이용한 보양식은 어떨까? 회·구이·탕 등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민어, 보양식의 대명사 추어, ‘보기만 해도 약이 된다’는 농어까지. 입맛 돌아오게 하는 제철 수산물을 만나보자.

♣ 겨울의 얼음을 여름까지, 장빙

옛날 옛적에도 무더운 여름엔 얼음이 사용됐다. 특히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맞이할 때 얼음은 필수적이었다. 제사와 손님맞이에는 음식 장만이 빠질 수 없었고, 날이 더울수록 식재료와 음식이 금세 상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시원한 냉국, 음료 등을 만드는 데도 얼음이 필요했다. 그런데 냉장고도 없던 시절 어떻게 여름철 얼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보관하는 장빙의 기술을 발달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얼음을 보관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신라 유리왕이 얼음 저장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 6년(505년) 11월에 왕이 얼음을 저장하도록 명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에는 얼음 창고에 관한 일이 맡아 보던 빙고전이란 관아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얼음을 보관하고 필요한 때에 나누어줬다는 기록이 보인다. <평양속지>에 의하면 평양의 빙고는 내빙고, 외빙고로 나눠 마련하였고, <고려사>를 살펴보면 3대 정종 때 얼음 배급 시기를 음력 4월 입하로 한 기록이 있으며, 문종 3년(1049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들과 고위 관리들에게 해마다 6월부터 입추까지 얼음을 나누어줬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한강 변에 얼음 창고를 만들었다. 오늘날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은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듯, 그 옛날 석빙고가 있던 곳이다. 태조 5년(1396년) 얼음 저장고인 서빙고를 이곳에 만들어 직접 관리 운영했던 것. 다만 동빙고동은 서빙고의 동쪽에 있어 이름 지어진 곳으로, 실제 옛날 동빙고와는 상관이 없다.

과거 실제 동빙고는 현재 성동구 옥수동 한강 변 두모포(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현재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동빙고의 얼음은 국가 제사에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데 썼고, 서빙고의 얼음은 궁중과 관아 재상에게 배급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무료병원인 활인서의 환자들과 죄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저장했던 얼음의 양도 어마어마해서 동빙고에만 약 1만 개, 서빙고에는 13만 개 이상 저장돼 있었다고 전한다. 궁궐 안에는 별도로 내빙고를 두어 궁궐의 얼음 수요를 맡았다고 한다.

얼음의 공급은 <경국대전>에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다. 그만큼 얼음의 공급은 중요한 국가 행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라에서 관리하던 관빙고에 이어 사빙고도 생겨났다.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물동량이 많았던 한강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사빙고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단종 2년(1454년)에 사헌부에서는 ‘국가의 빙고에서 저장하는 얼음에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없으므로 정1품에서 종4품의 대부 이상과 각사에서 얼음을 보관할 수 있게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버릴 것이 없는 팔방미인, 민어
▲ 민어

♣ 귀한 대접을 받았던 보석 같은 얼음

한겨울 얼음 채취는 국가적으로 큰 과업이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는 고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한강 변 민가 남자들이 채빙 노역을 피해 달아나는 경우도 많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부역을 피해 도망간 남편을 기다리는 어린 부인을 가리켜 ‘빙고청상’이란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빙부 혹은 빙정이라 불린 이들은 혹한의 추위 속에서 두께 4치(약 12cm)의 얼음을 잘라 동빙고와 서빙고로 날라야 했다. 손과 발이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음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도 채빙 부역의 어려움을 잘 알아서 빙부들에게 경작할 논밭을 주기도 하고, 일을 할 때면 후한 밥과 술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얼음을 캐는 일도 큰일이었지만 관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행여 보관된 얼음이 녹기라도 하면 관리자는 파면을 면치 못했다. 성종 24년(1493)에는 군관들이 술을 마시고 얼음 저장하는 일을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

빙고의 얼음이 녹아 물이 밖으로 새어나왔던 것이다. 이에 성종이 크게 노해 관원 전원을 파직했다. 이듬해에는 관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얼음을 관리했기 때문에 여름은 물론 가을까지 빙고에 얼음이 남아돌았다고 한다.

세종 5년(1423년) 11월 장빙군에게 술 830병, 생선 1,650마리를 하사했고, 세조 13년(1467년) 11월에는 환관과 선전관을 동서빙고에 보내 군인 가운데 동상이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게 한 것을 보면 얼음이 얼마나 국가적으로 소중한 자산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얼음의 첫 번째 용도는 분명 음식의 저장과 요리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겨울철 얼음을 보관했다가 더울 때 사용함으로써 여름철 넘쳐나는 양기를 억제하여 자연의 조화를 꾀한다는 측면도 있었다. 때문에 농사를 위해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듯, 겨울이 왔음에도 날씨가 춥지 않아 한강이 얼지 않으면 기한제를 지내기도 했다.

얼음을 만들고 보관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얼음이 들어간 시원한 여름 음식들은 왕족과 높은 벼슬아치 등 상류층이 누리는 특권의 맛이었다. 삶은 면을 얼음물에 헹궈 탱글탱글해진 면발로 초계국수, 냉면, 콩국수를 만들어 먹고, 얼음을 동동 띄운 물회, 오이냉국, 미역냉국, 화채, 오미자차 등을 맛보는 일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얼음이 들어 있는 나무상자(아이스케키 통)를 메고 다니는 얼음과자 장수가 있었고, 냉장고 대신 스티로폼 또는 목재로 만든 아이스박스를 사용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더욱 실감이 날 터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 시원한 팥빙수 등 얼음으로 만든 한식을 즐기며 그때 그 시절 보석과도 같은 ‘얼음’이라는 호사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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