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왠지 모르게 따스하고, 앙상하기만 했던 나뭇가지의 끄트머리에 몽글몽글한 망울이 맺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껏 얼어붙었던 물줄기에도, 황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푸석했던 논밭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봄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바로 그 봄이다. 나도 모르게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자. 기지개를 켤 시간이다.
새해가 밝았다며 인사를 나눈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이 오고 있다니. 우리에게 여유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설레고도 반가운 계절의 변화를 조금 더 빠르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하기엔 이르다. 아직 봄꽃도 피어나기 전이니 걱정하지 말자.
봄의 기운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시장이다. 그중에서도 전국 각지의 먹거리들이 한데 모이는 오일장이야말로 봄날의 생기를 가득 품어내고 있는 곳일 터. 구경이나 한번 가보자. 그렇다면 경기도 양평이 좋겠다. 여전히 큼지막한 오일장이 열리고 있는 용문천년시장이 그곳에 있으니까. 그렇다. 이번 목적지는 용문역이다
♣ 없는 건 없답니다
날짜가 0, 5로 끝나는 날이면, 용문역 앞 광장을 중심으로 오일장이 열린다. 양평역 인근 양평물맑은시장에서 열리는 오일장, 양수리에서 열리는 양수리전통시장, 그리고 이곳 용문천년시장을 두고 양평의 3대 전통시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아직도 오일장이, 그것도 수도권에 있느냐고? 양평에 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규모의 오일장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양평 구석구석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저마다의 물건을 앞에 깔아둔 채 손님을 맞이한다. 오랜만에 맞이한 봄 날씨에 다들 상기된 표정으로, 큰 목소리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용문역 앞 광장과 주변 도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북적거리는 분위기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야 겨우 판매하는 물건을 둘러볼 수 있을 정도. 이런 풍경을 다시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양평의 특산물인 버섯이 종류별로 진열된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나 어디 양평 특산물뿐일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신선한 먹거리들 또한 좌판에 가득하다. 남도의 섬에서 자라는 시금치인 섬초와 방풍나물을 필두로, 봄의 전령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봄동, 양파와 당근 등등 이제 막 수확하기 시작하는 채소들이 각자 저마다의 빛깔로 신선함을 뽐낸다.
집에서 직접 담근 메주와 장류, 정성스레 짜냈을 전통 기름류도 봄맞이에 나서고 있다. 봄이 왔음을 의미하는 고로쇠 수액도 페트병에 한가득 담긴 채 진열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양평을 비롯해 전국에서 한창 수확하고 있을 딸기, 제주에서 비타민C를 책임지는 귤과 레드향, 겨우내 말려 가지고 왔을 상주 곶감도 당당히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다. 재미있는 점은 어찌 되 었든 한 바구니에 5,000원이라는 것. 청자몽도, 키위도, 토마토도 마찬가지다.
조금씩 차이가 있 을 법도 한데, 과일 노점을 연 상인에게 복잡한 셈법 같은 것은 없나 보다. 아니면 과일 개수나 바구니의 크기가 조금씩 차이 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좌판마다, 상인마다, 혹은 원산지마다 조금씩 가격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어쨌 든 시장 내에서도 가격 책정에 관해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슬렁슬렁 둘러보 며 가격 비교를 해보는 재미도, 마음에 드는 곳에서 물건을 고른 뒤 조금의 에누리를 위해 흥정 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게 바로 시장의 매력이지 않은가. 넉살 좋게 한두 마디 던져 보자. 여기 저기서 조금씩 깎다 보면 간식 한 봉지쯤은 더 살 수 있을 테니까.
♣ 시장 구경도 식후경
조금이라도 좋은 품질의 음식 재료를 찾아 시장을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 그러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푸근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조금 쉬었다 가자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합리화하고야 만다.
이 모든 것이 오일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점 식당 탓이다. 양평이 아니고서야 쉬이 즐기기 어려운 도래창 구이, 가볍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분식류나 잔치국수가 시장 곳곳에서 계속 유혹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메뉴는 우거지국밥이다. 오일장이라는 정체성을 한껏 부각하기라도 하는 듯이 큼지막한 솥에 재료를 잔뜩 넣고 강한 화력으로 푹 익혀내는데, 그 모습만 보고도 찾는 손님이 상당하다. 여기에 주먹만 한 선지 하나를 딱 넣어주니 그냥 지나치기란 쉽지 않다.
한참 줄을 서서라도 먹겠다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맛은 검증된 셈이다. 인근 식당과 비교해도 저렴한 가격과 푸짐한 양을 자랑한다. 시장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종일 고생하는 상인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오일장터를 빠져나와 용문천년시장 아케이드 쪽으로 이동하면 양평 지역의 특산물인 버섯을 잔뜩 넣고 끓여낸 능이버섯국밥을 맛볼 수도 있다. 능이버섯을 포함해 여러 종류의 버섯을 넣고, 칼칼한 양념과 함께 끓인 능이버섯국밥은 시장을 둘러보느라 쌓였을지도 모를 피로를 싹 풀어준다. 든든하게, 건강하게 한 끼 식사를 즐기고 싶다면 추천한다.
물론 복잡한 시장을 걷는 이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집중시키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포문을 여는 것은 언제나 뻥튀기 장수다. 일정 간격으로 “뻥이요!”를 외치는 그의 앞에는 먹음직스러운 뻥튀기들이 적당량씩 담겨 있다. 이에 질세라 각설이가 나선다.
시장 한가운데서 당당하게 춤추고 노래하며 울릉도에서 가지고 온 엿을 팔아댄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아도 될 실력자들이다. 좌판에 각종 과자를 잔뜩 깔아둔 채, 오가는 사람들에게 맛보라며 건네주는 상인의 손길을 뿌리치기도 쉽지만은 않다.
어릴 적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과자를 한 입 먹고 나면 그냥 떠날 수만은 없을 테니 신중히 고민할 것. 이미 한 아름 잔뜩 담아서 포장해가는 손님들의 얼굴에 묘한 웃음꽃이 피고 있겠지만. 가마솥에 가득 기름을 채운 채 튀겨내는 통닭도 추억을 담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어디 그뿐인가. 강원도 지역의 별미인 수수부꾸미, 부산에서 유명해진 씨앗호떡 등등 전국 각지의 유명 간식거리를 한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오일장을 맞아 새벽부터 부지런하게 쪄냈을 떡도 먹음직스러운 자태로 진열돼 있다. 분명 능이버섯국밥을 먹고 나왔는데, 입안에서는 다시 군침이 도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