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벼가 자라고 있다. 그것도 광화문 근처에서 말이다. 봄이면 모내기를 하고 가을에는 추수도 하는 진짜 논이다.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서울 시내에서 논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5호선 서대문역 5번 출구에서 길을 따라 조금만 더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빌딩 앞마당에서 벼를 키우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쌀박물관과 농업박물관이다. 농업협동조합중앙회(농협중앙회)가 운영하는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농업의 발달 과정과 쌀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 공간이다. 잠시 시간을 내서 들러보자. 생각보다 훨씬 다채로운 전시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를 것이다.
♣ 쌀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
매일 먹는 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쌀박물관이라면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쌀박물관은 쌀이 주는 의미를 그 기원에서 찾았다. 전국 각지에서 출토된 탄화미를 첫 번째 주제로 삼은 이유가 그것이다.
탄화미는 일종의 쌀 화석과도 같은 것인데,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언제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 후기의 것으로 알려진 일산 가와지 볍씨, 청동기 시대의 것인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의 볍씨가 대표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비교적 최근에는 김포, 청주 등지에서도 꽤 오래전에 벼농사를 지은 흔적이 발견되었을 정도로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현재 진행 중이라고.
한 톨의 쌀마저 귀했던 시절부터 지금처럼 다양한 종류의 쌀 품종이 우리의 기호를 충족시켜주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쌀 사랑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1950년대에는 소고기 한 덩이 수준이었던 쌀 한 되의 가치가 이제는 커피 한 잔 수준이 되었다는 점이 가장 눈길을 끈다. 쌀의 가치가 떨어졌다기보다는 그만큼 벼농사가 고도화되었음을 의미하는 자료다.
한반도 내에서도 쌀의 활용법이 조금씩 달랐다는 점이 흥미롭다. ‘팔도 쌀 문화 이야기’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쌀을 재료로 만드는 음식과 그 문화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음식을 통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이 오롯이 담겨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쌀 문화권에서 오랜 세월 즐겨 먹는 전통 요리를 비교해볼 수도 있다. 그저 ‘한국 쌀’과 ‘동남아 쌀’로 구분했던 것이 ‘자포니카’와 ‘인디카’라는 품종으로 나뉜다는 사실도, 종류에 따라 모양과 맛이나 향도 다르다는 사실도 신기할 따름이다. 쌀 문화권 국가들의 전통음식 중 쌀로 만든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 농업의 미래, 스마트팜
쌀박물관에서는 실제 스마트팜이 작동하는 모습을 관람하고 체험할 수도 있다. 흙도, 햇볕도 없이 채소들은 싱싱하게 잘도 자란다. 양액은 흙을, 조명은 햇볕을 대신하며 날씨와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는, 집약적이면서도 고도화된 농경 현장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스마트팜을 건설해 농산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는 단계라고 하니, 앞으로 농경지가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쌀박물관 2층은 어린이 관람객을 위한 스마트팜 체험관이다. ‘어린이 농부의 하루’라는 이름의 부제를 달고 운영 중인 이곳에는 스마트팜 운영과 농산물 유통의 과정을 게임처럼 재미있게 배워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도슨트와 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스마트팜 체험관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스마트팜에서 자라고 있는 농작물을 직접 수확할 수 있기까지 하다. 아이와 함께라면 반드시 예약 후 방문하기를 권한다.
♣ 주먹도끼부터 탈곡기까지, 농업박물관
이번에는 농업박물관이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농업의 역사를 다룬다. 한반도에서 실질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신석기 시대부터 출발한다.
기원전 8,000년 전으로 시곗바늘이 돌아간다. 눈앞에 움막이, 그 주변으로는 너른 들판에 잡곡을 심어 재배했던 풍경이 펼쳐진다. 잡곡 수확만큼이나 중요했던 채집, 사냥 등의 활동 또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전시는 시간 순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청동기와 철기를 거치며 농작물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순간 또한 놓치지 않는다. 이미 이 시기에 다양한 농기구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한반도의 조상들이 농경 중심의 사회로 발전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전시물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농업역사관 전체를 통틀어서 꼭 살펴보아야 할 전시는 바로 온실이다. 수백 년 전에 온실이 있었다니! 그것도 세계 최초의 온실로 알려진 독일의 온실보다도 무려 170년 이상 앞선 것이라는 사실. 조선시대의 온실은 천장에 격자무늬 창틀을 만든 뒤, 거기에 기름 바른 한지를 덮어 햇볕이 들어올 수 있게 한 시설이다.
내부의 기온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거적과 흙벽으로 견고함을 더하기도 했단다. 어디 그뿐일까. 가마솥과 구들장을 설치해 습도와 온도를 높이는 장치 또한 마련했다.
조선시대를 거친 타임머신은 어느덧 1970년대에 다다른다. 어릴 적 시골 창고에서 많이 보았던, 향수를 자극하는 수동 탈곡기와 제초기, 새끼틀 등등 옛날 농업 기계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2층에서 확인하도록 하자.
♣ 농부의 사계절과 농업의 현재와 미래
2층 농업생활관에서는 논과 밭에서 이루어지는 사계절의 모습을 초대형 디오라마로 소개한다.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농촌의 풍경을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계절마다 어떤 작업을 하는 것인지는 물론이고, 그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까지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나라 농업의 특징을 꼽자면 ‘두레’를 빼놓을 수 없다. 마을 단위로 조직을 만들어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전통을 지켜나갔던 이들의 이야기 또한 디오라마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농촌에서 흔했던 풍경을 상세하게 구현한 전시는 관람객 사이에서 기념사진 명소로 손꼽히기도 한다.
전통 농가의 삶 속에서 한 장, 전통 장터에서 한 장 사진을 남겨가며 전시를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옛 물건을 하나씩 곱씹으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동행한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 한 소절 들려주는 것도 좋다.
농업박물관 지하에는 농촌에서 재배한 농산물은 물론, 6차 산업 등으로 새롭게 개발된 가공식품류까지 한데 모아 소개하는 ‘농업홍보관’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특산물을 활용해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가공식품을 주로 소개한다. 몇몇 지역에서는 이미 시작한 6차 산업의 결실 또한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농업박물관의 마지막 주제는 농업의 미래다. 미래의 농업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미래의 주도권이 될 농산물의 씨앗을 보관하는 ‘종자보관소’, AI 기술로 최적의 경작 환경을 만들어내는 ‘스마트팜’ 등을 이곳에서 체험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