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공기를 맞으며 상쾌한 기분을 느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이제는 따스한 옷부터 꺼내 입는 것이 자연스럽다.
두 볼을 타고 스치는 바람이 몸을 가뿐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은 날씨다. 가을, 여느 때처럼 아니 온 듯 오셨다가 가시겠지. 그리웠던 산들바람이 돌아오는 계절이다. 그것도 불쑥. 그렇다면 제대로 즐겨야 할 터. 이번 목적지는 강원도 횡성이다.
♣ 바람도 머물다 가는 곳
서해에서 출발한 너른 지형이 박차고 오르기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횡성이다.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며 보드라운 풍경을 한껏 선보이는 땅은 별안간 하늘로 치솟아 태기산을 빚어냈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달릴 때 사실상 처음으로 맞이하는 백두대간의 모습이다. 바람도, 구름도 이곳에 와서야 처음으로 휴식을 누린다.
살랑거리며 날아드는 바람을 직접 만나러 가자. 횡성 둔내면에서 평창 봉평면으로 향하는 옛길 양구두미재가 시작점이다. 양구두미재의 꼭대기에는 비밀 통로가 있는데, 태기산 풍력발전단지로 향하는 길이다. 등산로가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는 덕분에 산들바람 또한 이리저리 불어댄다. 서쪽으로부터 흘러온 뭉게구름도, 위잉위잉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도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양구두미재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는 대부분 포장된 임도에 가깝다. 길옆에 꾸준히 관리가 필요한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서 있고, 정상부에 전파 송신소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고개를 살짝 돌리면 평창 방향으로 펼쳐진 백두대간의 위용을, 횡성 시내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인 마을들의 귀여운 모습을, 저 멀리 원주 치악산 비로봉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풍경도 감상할 수 있으니까.
이곳에 진한의 마지막 왕이었던 태기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강원도 곳곳에서 그의 이름이 꽤 많이 등장하는데, 신라 박혁거세에 끝까지 맞선 인물로 유명하다. 경남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진한의 이야기가 왜 이곳에 있을까.
신라군에게 삼한 지역을 빼앗긴 진한의 잔존 세력은 재기를 꿈꾸며 태백산맥으로 향했다. 한 달을 쉬지 않고 달려 횡성 덕고산에 도착한 그들은 산성을 쌓고 훈련하며 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결국 이곳까지 따라온 신라군에게 패배했지만, 지역 주민들은 그들을 기렸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신라군에게 맞섰던 덕고산을 ‘태기산’으로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태기산 정상부에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사람이 살았다. 일제강점기 때 자리를 잡은 화전민이었단다. 1960년대에는 이곳에 화전민들을 위한 분교가 설치되기까지 했다.
지금도 태기분교 주변으로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철거된 관사의 흔적, 지하에서 물을 뽑아내는 작두펌프를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태기산에는 수많은 애환이 담겨 있는 셈이다.
아쉽게도 태기산의 정상부는 출입 금지 구역이다. 대신 정상 인근에 정상석과 전망대가 놓여 있다. 이곳에 와서야 횡성의 지형을 가늠할 수 있다.
너른 평지가 펼쳐진 횡성의 서쪽,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횡성의 동쪽 그리고 우뚝 솟은 태기산의 근엄한 모습까지도 눈 앞에 펼쳐진다. 이곳에 바람이 있다. 한껏 쓸어올린 머리칼을 이리저리 치대는 녀석의 장난기마저 그저 정답게 느껴진다. 아쉬운 것은 그저 이 순간이 찰나일 뿐이라는 것.
♣ 강원도로 향하는 길, 자연이 낳은 음식
횡성은 강원도의 출입구다. 서울을 떠난 영동고속도로가 처음 만나는 곳이 원주라고는 하지만, 그보다는 횡성의 분위기가 조금 더 강원도답달까.
그래서인지 횡성에는 강원도의 향토 음식이 많다. 산나물로 한 상 가득 차리는 백반, 메밀로 만든 면에 동치미 국물을 부어 내어주는 막국수, 그리고 안흥의 찐빵도 그중 하나다. 당연히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자란 한우를 맛볼 수도 있다.
막국수는 강원도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을 심어 끼니를 해결했던 화전민들의 소울푸드였다. 막국수라는 이름도 ‘막’ 만드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횡성에 있는 막국수 식당들 또한 맛과 매력이 천차만별이다. 만드는 이마다 다른 레시피로 만들기 때문에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안흥찐빵이 유명해진 것도 강원도의 출입구인 횡성의 독특한 특성 덕분이었다. 강릉행 시외버스가 잠시 쉬어가던 곳이 바로 횡성의 안흥면이었기 때문이다. 안흥 사람들은 버스 승객들에게 주전부리를 팔았고, 그중에서도 저렴한 가격에 배를 가득 채워주는 찐빵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뒤로는 20여 개의 찐빵집이 횡성 곳곳에서 성업 중이다.
무엇보다도 횡성 하면 떠오르는 것은 한우다. 다른 지역에 한우가 없는 것은 아니어도, 횡성과 한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적당한 고지대, 너른 초원 등이 어우러지며 맛있는 소고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횡성 측의 설명이다.
과거 강원도에서 서울로 소를 이동시키는 길목에 횡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횡성한우마을을 비롯해 지역 내에 한우를 취급하는 식당이 많다. 마음에 드는 부위와 등급의 고기를 직접 골라 바로 구워 먹을 수 있는 정육식당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발길 닿는 대로, 횡성을 거닐다
최근 횡성을 찾는 여행자 사이에서 떠오르고 있는 장소가 하나 있다. 횡성호가 그곳이다. 그곳에 호수의 곁을 따라 거닐어볼 수 있는 ‘횡성호수길’이 조성되어 있다. 횡성호수길을 방문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5코스를 최고로 친다.
걷는 내내 횡성호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어서다. 임도와 오솔길 등으로 이어지는 횡성호수길 5코스는 다시 A와 B코스로 나뉘어 각각 4.5km 길이로 꾸며져 있다.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누구나 쉽게 도전할 만하다. 고요한 자연에 파묻힌 채 두어 시간쯤 걷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곁에 함께한다.
풍수원성당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쉽다.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서양식 성당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이야기는 잠시 미루어 두어도 좋다.
미사가 열리는 날이라면 아름다운 성가와 종소리가 울려 퍼질 테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고즈넉한 공기가 성당과 주변 마을 전체를 오롯이 감싸고 있을 테니 말이다. 언제든 좋다. 성당의 성스러운 분위기에 취한 채 천천히 거닐어보는 것도, 이제 막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이곳까지 스며든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