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 성을 가진 제주도 토박이. 서울로 대학을 다니기 전까진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개성 강한 사투리가 민망할 때쯤, 다니던 대학의 공중보건학 교수가 ‘비위생적’인 사례로 제주에서 본 돼지 생간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돼지를 잡는 날이면 어머니는 시퍼렇고 뜨거운 핏덩어리를 들고 오셨다. 눈을 ‘보영’하려고 먹은 보양식이 그때는 참 징그러웠다. 하지만 당시 제주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교수의 말투엔 화가 났고, 열등감도 생길 만큼 괜히 부끄러웠다.
어느덧 식품영양학을 가르치다 보니 전국의 향토 음식을 돌아볼 기회가 많아졌다. 그때서야 제주 식문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피게 됐다. 특별한 조리와 양념 없이 신선한 재료로 간편하게 완성한 제주 음식. 차림은 투박하지만 자연주의에 가장 가까운 건강 밥상이었다.
2002년 초청 강연으로 선재 스님의 사찰 음식을 접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나하나 맛을 보니 오신채와 고기를 사용하는 것 빼곤 제주 향토 요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한 제주인의 지혜와 맛.
애정으로 들여다보니 영양과 궁합을 따진 조리법이 보였고, 거친 환경을 이겨낸 투쟁 정신마저 전해졌다. 타고난 손맛과 세련된 감각으로 다시 품어 안은 제주. 고정순 교수와 제주식 슬로푸드 밥상을 차리기 위해 제주 동문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 ‘제주 동문 재래시장’에 나왔다. 제주의 제철 향토 식재료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인가?
사실 더 즐겨 찾는 건 오일장(제주 민속 오일 시장)이다. 알다시피 오일장은 한 달에 단 여섯 번만 개장해 날짜를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바다에서 직접 잡았거나 밭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좀 더 경제적인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물론 제주 동문 재래시장도 충분히 훌륭하다. 특히 해산물의 상태가 좋아 자리물회국수를 말거나 멜젓을 담글 땐 동문으로 온다. 국 끓일 각재기(전갱이)가 필요할 때도 마찬가지다.
♣ 딱 제철이라 최상의 맛을 내는 식재료를 추천한다면?
원래 지금이 자리돔 철이다. 근데 어제도, 오늘도 제대로 된 자리돔을 보지 못했다. 크기가 작거나 너무 비싸기만 하다.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지구 온난화로 수온이 올라가 제주 바다에선 더 이상 자리돔을 보기 힘들다고 한다.
오분재기(오분자기)도 그렇다. 오히려 전라도 쪽 바다에 가면 볼 수 있을 법도 하다. 옛날부터 제주 사람들은 자리돔을 워낙 좋아해 사계절 내내 자리돔을 끼고 살았다. 그중 ‘자리물회’는 여름철 최고 인기 요리. 물회에 국수를 말아 먹어도 시원하게 맛있다.
또 ‘자리젓’은 제주인의 밥상에서 가장 흔한 밥반찬이었다. 타지로 떠난 제주인들이 초여름만 되면 자리돔 생각에 향수에 젖을 정도.
나비박사 석주명은 해변에 자리회 먹으러 가는 걸 ‘제주도민의 취미’라고까지 표현했다. 수두리보말도 제철이다. 오늘 보니 물이 꽤 좋아 잔뜩 사갈 생각인데, 바글바글 국을 끓일지 뭉근하게 죽을 끓일지 아직까지 고민이다.
옛날부터 제주 사람들은 자리돔을 워낙 좋아해 사계절 내내 자리돔을 끼고 살았다. 그중 ‘자리물회’는 여름철 최고 인기 요리. 물회에 국수를 말아 먹어도 시원하게 맛있다. 또 ‘자리젓’은 제주인의 밥상에서 가장 흔한 밥반찬이었다
❞♣ 콩잎도 눈에 띈다. 제주에선 콩잎도 즐겨 먹나?
제주 토종 콩으로 유명한 게 푸른 콩. 7월 말경엔 무성하게 자란 콩잎을 따서 쌈으로 먹는데, 그 맛이 진미다. 육지에선 콩잎으로 장아찌를 만들어 먹는데, 제주에선 자연 그대로 콩잎을 먹는다. 콩잎과 환상의 짝꿍은 멜젓이나 자리젓.
사실 제주 사람들은 요리할 때 젓갈을 거의 쓰지 않는데, 쌈을 먹을 땐 된장이나 젓갈을 꼭 넣는다. 멜젓은 멸치로 만든 젓갈. 비린내가 살짝 감도는 편인데 비린 콩잎에 비린 멜젓을 올리면 비린 맛은 사라지고 고소한 맛만 피어난다. 제주에 오면 꼭 한 번 맛보길 권한다.
♣ 식당에 가보니 갈치국을 끓일 때, 갈치의 내장만 빼고 손질 없이 비늘째 쓰더라.
조냥정신(절약정신). 과거 식량뿐 아니라 모든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제주 사람들은 음식 찌꺼기 하나 허투루 버리는 게 없었다. 생선을 비늘째 쓴 건 물론, 뼈나 가시째 씹어 먹는 생선도 많았다.
물론 선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비늘째 심지어 내장째 넣어도 비린내를 찾기 힘들었다. 보말이나 전복도 내장째 그대로 썼다. 역시나 선도가 좋은 터라 특유의 쓴맛은 오히려 깊은 감칠맛을 더했다.
일물전체식, 채소를 손질할 때도 칼 대신 손을 써 버려지는 음식물 찌꺼기를 최소화했다. 정말 남김없이 모조리 먹었다. 쉰다리는 조냥정신의 최고봉. 제주의 여름은 습도도 높고 더워 금방 해놓은 밥도 쉽게 잘 쉬었다.
이렇게 쉬어버린 밥을 그냥 버릴 수 없어 발효시켜 마신 것이 쉰다리. 누룩과 물을 넣어 밑술처럼 빚은 뒤 여름철 음료로 즐겼다. 팍팍한 생활 속에서 악착같이 버틴 선조들의 지혜는 놀라울 정도. 어제와 변함없이 오늘도 조냥정신은 제주의 뿌리다.
일물전체식, 채소를 손질할 때도 칼 대신 손을 써 버려지는 음식물 찌꺼기를 최소화했다. 정말 남김없이 모조리 먹었다
❞♣ 제주도 음식의 조리법은 육지와 어떻게 다른가?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데, 우선 양념이 강하지 않다. 제주도는 자연환경 탓에 고추 농사를 짓지 않아 고추장 양념 문화가 없었다. 오로지 소금과 된장, 간장만으로 간을 한 것. 물회에도 된장을 넣었고, 여름철 냉국도 맹물에 날된장을 풀고 톳만 빨아 넣어 된장국으로 먹었다.
단순한 조리법도 제주 향토 요리의 특징. 제주 여자들은 농사도 짓고 물질도 했기 때문에 가사 노동시간을 줄이려 최소한의 조리법을 선호했다. 반면 높은 평균 기온 덕분에 사시사철 신선한 식재료를 충분히 구할 수 있어 풍성한 양념이나 복잡한 조리과정 없이도 맛있는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또 제주도 가옥 구조는 ‘우영팟’으로 부르는 텃밭을 하나씩 두어 집집마다 모든 채소를 자급자족해 먹었다. 즉 겨울을 나기 위해 음식을 저장할 필요가 없었다. 요즘 웰빙 음식, 슬로푸드를 강조하는데 제주 음식을 찬찬히 살펴보니 바로 웰빙이더라
제주 여자들은 농사도 짓고 물질도 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조리법을 선호했다. 반면 높은 평균 기온 덕분에 사시사철 신선한 식재료를 충분히 구할 수 있어 풍성한 양념이나 복잡한 조리과정 없이도 맛있는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 선조들의 숨은 지혜, 재료나 음식 간 궁합도 알고 싶다.
겨울이면 제주 남단의 모슬포가 북적인다. 제철을 맞은 수려한 방어 때문. 쫄깃쫄깃한 식감과 두터운 지방층은 참다랑어 뱃살 부럽지 않게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을 낸다.
겨울에 맛보는 ‘방어’는 봄 ‘도다리’, 여름 ‘민어’, 가을 ‘전어’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제철 생선. 제주 사람들은 신 김치를 곁들여 방어를 먹는데, 방어의 묵직하고 담백한 맛이 톡 쏘는 신 김치와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육류로는 ‘돔베고기(흑돼지고기 편육)’를 즐겨 먹었는데, 육지에서 먹는 새우젓 대신 김치를 쌈처럼 더해 먹었다. 찬 성질과 더운 성질이 만난 최고의 음식은 꿩 메밀 칼국수. 툭툭 끊기는 메밀의 투박한 식감과 차지기로 소문난 꿩고기의 식감이 변화무쌍한 풍미로 다가온다.
♣ 어릴 때 즐겨 먹어 때때로 그리운 어머니의 내림 음식이 있다면?
어릴 때 아버지가 꿩 사냥을 나가시면 한동안 꿩고기를 풍족히 먹었다. 한데 바로 구워 먹거나 국을 끓이기보단 엿기름에 고아 꿩엿을 해먹었다.
한 번 만들어두면 1년 내내 보양식으로 먹었는데 지금도 생각날 만큼 늘 그리운 맛이다. 요즘은 꿩고기가 귀해 때마다 직접 만들어 먹긴 힘들고, 기운이 떨어지는 여름에만 원기 회복을 위해 꿩엿을 사먹곤 한다.
전라남도에서 익히 알고 익숙한 전통 음식은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의례 음식을 정리하며 참고할 요량으로 여러 차례 고문헌을 살폈는데, 안동 쪽 종가나 조선 시대 궁중 음식 기록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남도 종갓집 음식이나 전라남도 민간 음식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찾기 힘들었다.
♣ 제주 대표 향토 요리로 소개한 메밀 범벅도 생소하다. 왠지 강원도 음식 같기도 한데, 특별한 날 먹는 별식인가?
제주답게 조리법이 매우 간단한 춘궁기 시절 음식. 메밀은 서귀포 중산간 지대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작물로, 고구마나 무, 톳 등을 섞어 범벅을 만들면 허기를 채우는 한 끼 식사로 손색없었다.
육지 범벅은 풀처럼 되게 쑨 반고체 형태인 반면, 서귀포 범벅은 손에 쥐고 먹을 수 있는 고체 형태. 달콤한 고구마가 담백한 메밀과 어우러져 물리지 않는 맛을 낸다. 요즘은 끼니보단 간식이나 별식으로 찾는 편이다.
찬 성질과 더운 성질이 만난 최고의 음식은 꿩 메밀 칼국수. 툭툭 끊기는 메밀의 투박한 식감과 차지기로 소문난 꿩고기의 식감이 변화무쌍한 풍미로 다가온다
❞♣ 제주향토음식문화연구소 ‘세심재’를 운영 중이다. 국제슬로푸드협회 부회장은 물론 해외에서 귀빈이 올 때면 가장 먼저 '세심재’를 찾는다고 들었다.
사실 보잘것없는 제주 음식이 부끄러운 사람 중 하나였다. 한데 고향으로 돌아와 향토 요리를 연구하면 할수록 제주인의 자연 친화적인 삶이 다시 보였다. 그때 주변을 돌아보며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소문난 제주 향토 음식점에선 남도의 양념이 섞인 요리를 내놓거나 관광객의 취향에 맞춘 메뉴를 선보여 정체성마저 혼란스러웠다. 그때 같은 생각을 가진 제주도 초대 향토 음식 명인 김지순 박사와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 양용진 원장을 만났다.
1970년대 초반부터 꽤 오랫동안 준비해온 김지순 박사의 기록과 녹취를 기초로 함께 연구하고 논의하면서 3백 50가지의 제주도 음식을 담은 「제주인의 지혜와 멋, 전통 향토 음식」을 출간했다.
이렇게 틀을 잡아놓으니 제주 음식의 역사가 한눈에 보이더라. 이후에도 세심재를 통해 제주인의 토속적인 일상식을 차근차근 재현해오고 있다.
제주도 초대 향토 음식 명인 김지순 박사와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 양용진 원장을 만나 김지순 박사의 기록과 녹취를 기초로 함께 연구하고 논의하면서 3백 50가지의 제주도 음식을 담은 「제주인의 지혜와 멋, 전통 향토 음식」을 출간했다
❞♣ 선재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도 돋보인다. 어떻게 제주 향토 요리에 사찰 음식을 접목할 생각을 했나?
스님들 말이 오신채와 고기를 쓰는 거 빼곤 제주 향토 요리가 사찰 음식이나 진배없다고 하시더라. 실제로 생명철학을 중시하고 자연주의를 지향하는 건 물론 양념을 과하게 쓰지 않고 최소한의 조리법을 쓰는 것 역시 닮아 있었다.
이후 제주에 내려오신 선재 스님의 강연을 듣고 배우며 제주 향토 요리에 사찰 음식을 접목했고, 마침내 건강한 슬로푸드 밥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 끝으로 제주 향토 요리 전문가로서 추구하는 요리 철학은 무엇인가?
전통을 뿌리로 영양과 맛을 고려하고, 모던한 감각으로 시대의 미학을 담아내는 것. 그래서 푸드코디네이터 과정도 밟았다. 투박한 제주를 곱고 예쁘게 알리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간 세심재에서 제주 향토 요리를 가르치고 꾸준히 전시도 해왔다. 앞으로도 국내외에 제주의 뿌리를 알리는 일은 멈추지 않을 계획. 슬로푸드의 원형에 가까운 제주 음식의 가치를 더욱 자랑스럽게 선보일 예정이다.
전통을 뿌리로 영양과 맛을 고려하고, 모던한 감각으로 시대의 미학을 담아내는 것. 특히 슬로푸드의 원형에 가까운 제주 음식의 가치를 더욱 자랑스럽게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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