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 년 전, 청주 지역 양반가에서 먹던 음식을 한글로 생생하게 기록한 조리서가 있다. 바로 충청북도 최초의 음식 조리서인 「반찬등속」.
책에는 46가지 음식에 대한 재료, 손질법,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청주시는 이를 바탕으로 문화 콘텐츠로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는 지명순 유원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교수의 역할이 크다.
2013년 조리서에 기록된 요리들을 복원, 재현하는 데 성공한 그는 현재까지 전통음식 문화원 ‘찬선’을 운영하며 시민에게 「반찬등속」의 조리법을 전수하고 있다.
“충북 음식의 매력은 중용의 미학에 있다”며 자부심을 보이며 「반찬등속」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재현한 ‘백 년 전 청주 선비의 설날 다과상’까지 준비해온 지 교수를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만났다.
마침 박물관에서는 「반찬등속」 음식을 포함해 과거 청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100년 전 청주 이야기’ 전이 2월 10일까지 열리고 있었다.
1백 년 전, 청주 지역 양반가에서 먹던 음식을 한글로 생생하게 기록한 조리서가 있다. 바로 충청북도 최초의 음식 조리서인 「반찬등속」 책에는 46가지 음식에 대한 재료, 손질법,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 다과상의 차림이 정갈하다. 어떤 음식들인가?
백 년 전 설날, 양반가에서 손님을 맞을 때 내온 다과들을 추정해서 만들어보았다. 7가지의 떡과 6가지의 과자, 2가지 음료에 대한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걸 바탕으로 박고지정과, 산자, 화병, 약과, 꽃매작과, 수정과 등 6가지 음식을 준비했다.
조청에 졸인 박고지에 깨를 무쳐 만든 박고지정과는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산자는 찹쌀이 아닌 밀가루로 만들어 바삭바삭하다.
옛날엔 찹쌀보다 밀가루가 더 귀했고, 혜경궁 홍씨 수라에도 밀가루 산자를 만들어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수정과는 꿀물에 곶감을 하룻밤 정도 담근 것이다. 곶감의 단맛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계피나 생강을 넣고 끓인 수정과와는 다른 방식이다.
♣ 달걀지단을 묻힌 떡이 무척 독특하다.
이것은 ‘화병’이다. 「반찬등속」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인절미를 쌀 하나 없이 치되 달걀을 잘 부쳐 실같이 오리고, 좋은 고추를 잘 오려 실같이 오리고, 이 2가지를 합하여 그 인절미에 붙이고 파란 콩가루를 살짝 풍겨내라.’ 콩이나 깨고물이 아닌 달걀지단을 묻힌 떡은 오직 「반찬등속」에만 나온다.
진주 강씨 후손에게 물어보니, 집안에서 생일을 맞은 아이에게 해준 떡이라고 한다. 당시 달걀은 무척 귀한 식재료였다. 성장기 아이에게 꼭 필요한 단백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달걀로 정성스러운 음식을 만들며 그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것이다.
♣ 전시실에 있는 주안상 모형에 올린 차림들도 궁금하다.
육회, 북어대강이, 가물치회, 만두, 참죽나무․토란 줄거리, 과주 등이 차려져 있다. 바다와 근접하지 않은 청주는 바다 생선 대신 민물에서 잡히는 가물치를 회로 먹었다.
좋은 술에 빨아서 아랫목에 덮어두었다가 발효시켰다. 육회도 좋은 술에 빨아서 꿀과 고추장을 넣어 무쳐 먹었다. 술에 빨면 살균 효과가 있으며, 육질이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다.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청에 졸인 박고지에 깨를 무쳐 만든 박고지정과는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산자는 찹쌀이 아닌 밀가루로 만들어 바삭바삭하다.
❞♣ 「반찬등속」을 연구, 복원하게 된 계기는?
「반찬등속」은 2007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수집해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곳 학예사가 이 책을 주제로 충청도의 식재료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던 중 2011년 한 방송사에서 「반찬등속」의 음식을 재현해보자고 나에게 연락해왔다.
충북 음성이 고향인 나는 오래전부터 지역의 향토 음식을 연구해야겠다는 열망이 컸기 때문에 바로 수락했다. 방송이 나간 후 「반찬등속」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청주시에서 음식 복원을 지원하기로 해 김향숙 충북대 교수와 함께 복원 작업을 했다.
♣ 음식 복원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조리서엔 재료 양을 어느 정도 써야 하는지 생략되어 있다. 요리 도구나 가전제품이 없었을 당시 상황에 맞게 계량하는 것이 어려웠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반찬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김치를 지금보다 더 짜게 담갔을 것 같은데, 그 시대에 맞출 것인지, 아니면 현대인의 입맛에 맞출 것인지 고민됐다.
그 시대의 조리 방향에 대한 문헌을 보거나, 후손의 이야기를 참고하기도 했다. 결국 복원은 원전에 최대한 근접하게 하고 지금은 현대인이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변형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
♣ 고문서에 기록된 요리들은 무엇이며, 저자는 누구인가?
김치류, 짠지류, 반찬류, 떡류, 음료, 술 등 46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먹는 국이나 반찬은 안 쓰고 두고두고 먹어야 하는 저장 음식이나, 특별한 날 먹은 음식들 위주로 적어놨다.
옛날에는 종이도 귀하고, 쓰는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꼭 알아야 할 요리 위주로 적어둔 것으로 보인다. 앞표지엔 ‘계축 납월 이십사일’이라고 써 있어 1913년 12월 24일 책을 완성한 것으로 보이며, 뒤표지에 ‘청주서강내일상신리’라는 지명이 쓰여 있었다.
누가 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상신동 일대가 진주 강씨 집성촌이었다는 점에서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 후손을 찾아가 확인해보니 집안에서 내려오던 요리들이 상당 부분 일치했다. 저자는 증평에서 시집온 밀양 손씨라고 추정하고 있다.
김치류, 짠지류, 반찬류, 떡류, 음료, 술 등 46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먹는 국이나 반찬은 안 쓰고 두고두고 먹어야 하는 저장 음식이나 특별한 날 먹은 음식들 위주로 적어놨다.
❞♣ 기록된 저장 음식에는 무엇이 있나?
김치류 9가지와 짠지류 8가지가 있다. 충북 지역에선 김치를 짠지라고 부르거나, 소금 말고 간장에 절인 음식도 짠지라고 불렀다. 북어짠지, 마늘짠지, 무말랭이짠지, 콩짠지 등이 대표적인 예다.
김치에는 조기를 넣은 점도 독특하다. 충남 서해에서 잡혀 금강나루로 들어온 조기를 김치에 사용한 것이다. 생선을 넣었는데도 비리지 않고 오히려 구수한 맛이 난다. 특히 조기를 넣은 무짠지는 궁중에서 즐겨 먹던 석박지와 비슷한 맛이 난다.
깍두기에도 조기가 들어간다. 깍두기 조리법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이른 기록이다. 외이김치는 초양념을 무친 어린 열무를 오이에 끼워 넣는 김치다. 식초를 넣은 것으로 봐서 오래 익히지 않고 바로 먹는 김치로 추정된다.
♣ 몇 년 전엔 케이블 채널의 요리 경연인 ‘한식대첩 2’에 나와 「반찬등속」의 음식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충북 음식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하고, 「반찬등속」을 알리기 위해 출연했다. 조리서에 나온 화병과 박고지정과 등을 선보였다. 결국 최종 4강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충북은 먹을 게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해 문물이 교차하는 지역으로서 남한강과 금강을 통해 들어오는 타 지역의 특산물을 음식에 접목하였다.
임금이 불러주길 기다리는 선비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라 반가의 내림 음식이 다양하게 전해오기도 한다. 여타 지역의 음식을 잘 접목해 녹여낸 중용의 맛이면서도 양념 맛이 과하지 않고,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는다.
♣ 음식이 선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김치가 그렇다. 양념을 세게 하지 않아 짜거나 맵지 않으며, 삼삼하고 맑은 맛이 난다. 바다가 근접하지 않아 젓갈이 귀해 많이 쓰지 않은 대신 질 좋고 풍부한 채소, 과일을 활용해 맛을 냈다.
가지김치, 고추소박이, 달래김치, 더덕물김, 무잎김치, 박김치, 시금치김치 등 다양한 재료의 향토 김치가 발달하였다.
간장으로 담그는 가지 김치는 간장 국물을 따라내 끓인 후 식혀서 붓기를 세 번 정도 반복함으로써 변질되지 않고 오래 먹을 수 있다. 박김치는 어린 박을 절여 배, 파채, 마늘채, 생강채, 설탕, 실고추를 버무린 후 연한 소금물을 부어 만든다.
양념을 세게 하지 않아 짜거나 맵지 않으며 삼삼하고 맑은 맛이 난다. 바다가 근접하지 않아 젓갈이 귀해 많이 쓰지 않은 대신 질 좋고 풍부한 채소, 과일을 활용해 맛을 냈다.
❞♣ 충북의 대표 식재료를 지역별로 나누어 소개한다면?
충북은 동남쪽의 소백산맥과 서북쪽의 차령산맥으로 둘러싸인 중부 내륙 지역으로, 구릉성 산지와 평야 지대로 이뤄져 있다. 8도 중 바다가 없는 유일한 지역이라 산과 들에서 나는 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충주, 제천, 단양 등 북부권은 산나물이나 도토리, 약초 등을 이용한 음식이 많다. 또한 충주댐에서 나오는 민물 생선을 활용한 붕어찜, 회무침 등이 유명하다.
청주, 증평, 진천, 괴산, 음성 등의 중부권은 산악 지대와 평야 지대가 어우러져 논농사와 채소 재배가 잘 되는 지역으로 쌀, 고추, 인삼 등이 유명하다. 남부권은 산간 지대와 평야지가 고루 분포되어 있고 일교차가 심해 과일 농사가 잘된다. 보은의 대추, 옥천의 복숭아, 포도, 영동의 포도, 복숭아, 곶감을 예로 들 수 있다.
♣ 다른 이들은 잘 모르는 충북의 향토 음식을 소개한다면?
충북인에게 일종의 ‘솔 푸드’로 올갱잇국과 누룽국이 있다. 충북 지역에서 잘 먹는 올갱잇국은 올갱이를 된장 푼 물에 삶아 살을 빼고 제철 채소(아욱, 근대, 부추) 등을 넣어 끓인다.
누룽국은 일종의 손칼국수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서 반죽해 면을 만든다. 육수는 특별히 내지 않고 물에 넣어 그냥 끓인다. 여기에 양념장과 지고추를 넣어서 먹는다. 두 음식 모두 소박하고 삼삼하지만 자꾸 생각나는 맛이다.
♣ 충북의 독특한 전통주도 궁금하다.
충주의 청명주, 보은 송로주 등이 있다. 충주의 목계나루는 청명이 되면 겨우내 운행을 멈췄던 배를 다시 띄웠는데, 마을 사람들은 뱃길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별신제를 올렸고 그때 사용된 술이 바로 청명주다.
보은 송로주는 ‘소나무 잎에 매달린 이슬’이라는 뜻으로 소나무 옹이를 갈아 빚었기 때문에 소나무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 곧 설날이다. 설에 먹는 충북의 향토 음식을 소개한다면?
즉석에서 떡을 만들어 끓이는 날떡국이 있다. 멥쌀가루를 반죽하고 길게 늘여서 돈짝처럼 썰어 육수에 끓인다. 떡국에는 만두를 꼭 넣었는데, 속엔 김치, 고기, 지고추, 두부를 넣어 찌거나 삶아서 먹었다.
♣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반찬등속」과 충북 음식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2월에는 호주 시드니한국문화원과 호주디자인센터에서 열리는 국제 교류전 ‘선비의 식탁’에서 「반찬등속」 워크숍을 진행할 계획이다.
또한 충북 지역에선 절기마다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연구를 해왔는데, 이 자료들을 모은 책이 2월 중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