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보양식 겸 청량음료로 궁에서 즐겨 마신
‘제호탕’으로 살펴보는 왕들의 여름나기
❞제호에서 제(醍)는 “타락 윗물 제”, 호(醐)는 “타락 윗물 호”이다. 제호란 항아리(酉, )에 담긴 우유가 발효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생긴 윗물을 가리키니 제호탕은 이 윗물로 만든 탕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효 시킨 우유의 윗물로 만든 탕이 아니다.
허준(許浚, ?~1615)이 광해군 5년(1613)에 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의하면 제호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제호탕(醍醐湯)
서열(暑熱)을 풀고 번갈(煩渴)을 그치게 한다.
오매육별말(烏梅肉別末) 1근, 초과(草果) 2냥, 축사(縮砂) 5전, 백단향(白檀香) 5전, 연밀(煉蜜) 5근을 가루로 만든 다음 꿀을 넣고 불에 달여서 자기(磁器)에 저장해 둔다.
냉수에 타서 마신다(국방局方)
그가 기술한 제호탕은 국방(局方)의 것을 인용하였고, 국방은 내의원의 처방을 뜻하니 이는 허준이 조선왕실 내 의약을 담당한 관청의 처방문을 『동의보감』에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의보감』의 「제호탕」은 조선왕가에서 마시던 여름음료이다.
조선 왕실은 단오부터 제호탕을 마시기 시작하여 음력 4월부터 6월까지 지속되는 여름을 났다. 제호탕은 5월 여름의 중간 무렵부터 여름이 끝나는 6월까지 찾는 음료였다.
올 여름은 단오(端午)가 음력 5월 5일인 5월 30일, 하지가 음력 5월 27일인 6월 21일이고 하지에서부터 셋째 경일(庚日, 10 천간 중에서 7번째 오는 날)인 7월 12일(庚子日)이 초복(初伏)이며, 넷째 경일인 7월 22일(庚戌日, 음력 5월 29일)이 중복(中伏), 입추 후 첫째 경일인 8월 11일(庚午日, 음력 6월 20일)이 말복(末伏)이니 음력 6월 한 달이 한 여름에 속하고 곧 제호탕은 음력 5월과 6월의 여름나기 음료인 셈이다.
♣ 그러면 왕실은 왜 제호탕을 여름나기 음료로 택했을까?
오매육별말은 특별히 만든 오매육 가루이다. 매실의 껍질을 벗기고 씨를 발라낸 과육만 짚불 연기에 그을린 뒤 잘 말린 가루를 1근 사용한다. 현재의 도량형 단위로 환산하면 640g이다. 목이 말라서 물을 자꾸 마시는 소갈(消渴, 갈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넣은 약재이다.
초과는 초두구의 한 종류로서 그 씨의 성질이 따뜻하다. 찬 음식을 많이 먹고 또 계절적 요인에 의하여 자칫 냉증에 처해지기 쉬운 비위를 다스리기 위한 처방이다. 2냥을 사용하며 약 80g이다.
축사는 축사밀의 씨로, 배 속을 편안하게 하고 소화를 잘 시키는 효능이 있다. 5전, 20g이다.
백단향은 성질이 따뜻하면서도 열(熱)을 없애는 약재로 5전, 20g이다.
연밀은 백밀(白蜜)을 불에 올려 한번 끓여낸 것으로, 물기가 없이 졸여진 꿀을 말한다. 성질이 평(平)하거나 따뜻하고 속을 보호하며 기(氣)를 북돋우는 약재이다. 뿐만 아니라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해독 효과와 비기(脾氣)를 길러주는 약재 중의 약재이다. 5근, 3200g이다.
오매육 가루 640g에 초과 가루 80g, 축사 가루 20g, 백단향 가루 20g을 섞은 후 여기에 연밀 3200g을 가루로 만들어 다시 꿀을 넣고 잠깐 달인다. 그 다음 자기항아리에 담아두고 그때그때 냉수에 타서 마시는 것이 제호탕이다.
비위를 보하고 서열을 풀면서 목이 마른 증세를 다스리는데 동원된 음료이다.
1년을 사상(四象, 태음⦁소양⦁태양⦁소음)으로 나누어 볼 때, 5월부터는 소음(小陰)으로 향하여, 사물은 점차 양증에서 음증으로 향하고 인체 역시 땀을 많이 흘리면서도 점차 소음체질로 변하는 시기이다.
다시 말하면 몸이 양증을 상실하여 허(虛)해지는 시기에 더위를 막고 허함을 보충해주는 음료라고 말할 수 있다.
제호란 음료는 불교가 이 땅을 지배했던 시절에는 발효시킨 우유의 윗물에 꿀을 합하여 마셨던 것이 아마도 조선왕실로 넘어 오면서 여름철 청량음료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 한다.
냉수에 타서 마신다고는 하나, 왕실 내에서는 궁에 소속된 장빙고(藏氷庫)의 얼음을 이용하여 얼음에 채웠다 마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얼음은 왕의 전용물이 아니었고, 왕은 신하들에게 빙표(氷票, 얼음 표)를 주어 궁의 장빙고에서 얼음을 타 가게 하였다. 상류층에서도 궁중과 마찬가지로 얼음에 채운 제호탕을 즐겼을 것이다.
허준과 비슷한 시기에 생존했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에게도 제호탕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는 31세에 예조참판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정주(定州)에 이르러서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건너가 원병을 요청하여 지원군 파견에 성공했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오르고, 38세(1599)로 우의정에 승진, 이어서 좌의정에 올라 도제조(都提調)를 겸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직이 삭탈되어 양근(楊根)에 내려가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다음의 내용도 야화 중 하나이다.
이덕형이 도제조 시절, 대궐 가까이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고 소실(小室, 첩)을 하나 두었다. 복중(伏中)의 어느 한 여름날, 더위에 제호탕이나 한 그릇 마셨으면 하면서 소실집에 들렸다.
집에 들어서는 즉시 소실은 제호탕을 갖다 바쳤다. 그는 한참 동안 소실의 얼굴을 쳐다 보다가 그 길로 돌아서 나와 발을 끊었다. 다시는 소실을 찾지 않은 것이다.
얼마 후 이항복이 찾아 갔다가 그 사실을 알고 이덕형을 붙들고 왜 그 여인을 버렸는지를 물었다.
이덕형이 대답하기를, “그 날 목이 무척 타서 제호탕을 생각하며 손을 내 밀었더니 선뜻 내어 주는데 어떻게나 영리하고 귀여운지, 그러기로 지금 이 시국에 명색이 대신으로서 한 여인에 혹해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딱 그만 끊어 버린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여인에게 빠져 나랏일을 그르칠게 보아 여인을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왕에서부터 귀족층에 이르기까지 한여름에 널리 애음되어 왕실 내의원의 처방을 허준이 『동의보감』에 기술하기까지 했던 제호탕은 지금은 잊혀 진 음료가 되었다.
허준이 사망하고 402년이 흐른 2017년 현재,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청량음료에서 과연 몇 개나 순수한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오매육과 꿀을 주원료로 한 청량음료 제호탕은 후손들에게 물려 줄 고급 음료로서 복원 개발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