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의 게국지와 당진의 꺼먹지. 지금은 이 지역에 가면 꼭 맛봐야 할 별미로 꼽히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음식은 아니었다. 그 지역 사람들만 집안에서 소소하게 만들어 먹었다.
이런 숨은 향토 음식들이 타 지역에 널리 알려지고 전문 식당까지 생겨난 건 윤혜려 공주대 외식상품학과 교수의 공이 크다. 미국에서 외식 경영학 박사를 취득하고 국내에서 기업 대상 푸드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활약한 그는 2006년 공주대학교 외식상품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충남의 향토 음식과 연을 맺었다.
충청남도농업기술원에서 2009년 시작한 ‘충남 향토 음식 명품화 사업’에 참여해 지역 구석구석을 발로 뛰었다. 주민을 인터뷰해 향토 음식의 원형을 채굴하고 어떻게 하면 상품화할 수 있을지 연구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게국지와 꺼먹지를 다루는 농가 맛집이 등장했고,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향토 음식들은 대표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전통을 잇고 미래를 여는’ 연구와 후학 양성에 여념이 없는 윤 교수를 공주대 예산캠퍼스에서 만났다.
지역 구석구석을 발로 뛰며 주민을 인터뷰했다.
향토 음식의 원형을 채굴하고 어떻게 하면 상품화할 수 있을지 연구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게국지와 꺼먹지를 다루는 농가 맛집이 등장했다
❞Q. 공주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충남 향토 음식을 표면화하는 데 한 획을 그었다. 그전에 이곳과 인연이 있었나.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결혼 후 시아버지가 당진 분이셔서 시어머니를 도우며 충청도 음식을 종종 접했다. 그러다 공주대에 오면서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충남농업기술원과 각 지역의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사업에 조언을 해주고 컨설팅을 하며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생겼고, 9년 전 진행된 ‘충남 향토 음식 명품화 사업’에도 참여하게 됐다. 그땐 향토 음식에 대한 개념도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향토 음식이란 무엇인지 정의부터 세웠다. ‘지역 사람들이 그 지역의 식재료를 활용해서 대대로 내려오는 조리법으로 요리해 두루두루 먹는 음식’이라고. 그 후 각 시군을 직접 다니며 향토 음식을 조사하고 상품화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Q. 그렇게 해서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향토 음식은 무엇인가.
대표적으로 게국지가 있다. 태안에서 세미나를 할 때, 그 지역 분들에게 “보통 집에서 드시는 음식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그때 게국지를 처음 알게 됐다.
게장을 담가 먹고 남은 국물을 버리기 아까워서 시레기와 함께 큰 독에 담가놓았다가 어느 정도 익으면 국물을 넣고 자작하게 끓여 먹는다고 했다. 그분들은 “게국지가 무슨 향토 음식이냐”며 의아하게 여겼다. 태안에선 어느 집이든 흔하게 먹는 음식이었으니까.
이렇게 조리법을 채굴하면 실제로 만들어본다. 기본에 충실한 ‘원형’이 있어야 목적에 맞게 상품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마다 맛이 다른 게국지를 타 지역의 누구나 먹어도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조금씩 변형하고 표준화하는 것이다.
이걸 바탕으로 게국지를 다루는 ‘농가 맛집’이 생겼다. 당시 농촌진흥청과 충남농업기술원은 음식 관광 활성화를 위해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향토 음식을 판매하는 농가 맛집 시범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종의 6차 산업의 시작이었다
향토 음식이란 지역 사람들이 그 지역의 식재료를 활용해서
대대로 내려오는 조리법으로 요리해 두루두루 먹는 음식이다.
지역 어른들의 향토 음식 조리법을 채굴하면 실제로 만들어본다.
기본에 충실한 ‘원형’이 있어야 목적에 맞게 상품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Q. 향토 음식의 원형을 채굴하면서 알게 된 이 지역 음식 고유의 특징은?
충남의 향토 음식은 담담하다. 양념도 최소화하여 재료 그대로의 맛을 잘 살렸지만 그렇다고 마냥 소박하기만 한 건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반가 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수도권에서 가깝다 보니 양반의 본가가 많이 있었는데 살림은 한양에 차려 나랏일을 보고, 본가는 지방에 있는 식이다. 이들은 궁중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궁중음식 또한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양반들은 임금이 하사한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았고, 그런 음식을 본가에서 해 먹기도 했다.
본가의 음식은 지역민들에게 알게 모르게 전파됐다. 반가의 살림을 돕는 지역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반가 음식은 후대에 내림도 잘된다. 그러므로 지금껏 전해오는 향토 음식이 다양한 것이다.
Q. 충남의 대표적인 반가를 예로 들자면?
예산에 본가를 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있다. 추사 선생이 남긴 글에는 집에서 주로 해먹은 음식에 대한 내용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두부를 최고로 좋은 반찬 중에 하나로 꼽았고, 여름엔 은어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이야 두부를 쉽게 구하지만, 옛날엔 두부도 만들기 까다로운 음식이었다. 콩을 일일이 맷돌에 갈고, 불에 끓이며 계속 젓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도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인가. 예안 이씨의 종가도 아산에 있다.
막걸리로 자연발효 시켜 먹는 기주떡과 고추, 깻잎 등 제철 채소로 만든 부각 등이 내림음식으로 전해온다. 모두 사치스럽진 않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Q. 환경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식문화의 특징은 있는가.
당연히 있다. 식재료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옛날에는 유통이 발달하지 않아 지역에 나는 것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에 양반이 많았던 이유는 이곳이 평화롭고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우선 예당평야를 비롯한 넓은 평야가 많다.
그래서 쌀농사가 잘된다. 또 타 지역에 비해 자연재해를 심하게 받지 않는 편이다. 공주, 천안, 예산이 특히 그렇다. 높고 험한 산이 많지 않아 물이 흘러들어 홍수가 나거나, 골이 깊어 더운 공기를 가둬 폭우가 쏟아지는 일이 적었다.
지형이 아늑하게 들어가 있어 외세로부터의 침략도 비껴갔다. 오죽하면 천안(天安)이라는 지명에 담긴 뜻이 ‘하늘 아래 편안한 동네’일까. 넉넉하고 여유롭다 보니 음식도 조선시대 양반의 기품을 닮았다.
충남의 향토 음식은 담담하다.
양념도 최소화하여 재료 그대로의 맛을 잘 살렸지만 그렇다고 마냥 소박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 지역이 반가 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Q.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교통 요충지라는 점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그렇다. 지역별로 크게 나누자면 내륙과 해안지역인데, 내륙에서 주목할 지역은 내포 문화권으로 불리는 홍성과 예산이다. 내포는 내륙 깊숙이 들어온 하천을 따라 배가 들어온 지역을 뜻한다. 바다를 건너야 할 물자들이 다 모이는 항구였다.
그래서 물줄기 주변에 다양한 장터 문화가 형성됐다. 홍성에서 새우젓이 유명한 이유도 이 주변에 서해안에서 잡은 새우를 기반으로 한 새우젓 장터가 열렸기 때문이다. 해안지역은 태안, 서산, 보령이 대표적이다.
태안, 서산은 제사상에 황태 대신 말린 우럭포를 올린다. 황태는 동해에서 주로 잡히는 생선이므로 서해안에서 흔한 우럭을 올리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향토 음식이 바로 우럭젓국이다. 꾸들꾸들하게 말린 우럭을 물에 넣고 끓이는 음식이다.
Q. 이 지역은 백제 문화권이기도 하다. 백제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점이 있나.
아쉽게도 백제 음식에 대한 원형은 구체적으로 전해오는 게 없다. 확실한 사실은 밤과 대추가 백제시대에도 있었다는 것. 주식 외에 다른 걸 먹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음식문화라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며 학습되는 것이다. 타 지역의 문화가 흘러들어온다 하더라도 기존의 문화에 흡수되거나 동화된다. 분명히 백제의 음식문화도 전승, 변형되며 지금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Q. 일반인은 잘 모르는 토속 식재료는 어떠한 것이 있나?
당진, 서산의 꺼먹지가 있다. 예산의 홍어 맛 삭힌 김치와 비슷하다. 동치미를 담그고 남은 무시래기가 아까워 큰 독에 넣어 천일염을 넣고 1년간 둔다.
삭힌 꺼먹지는 검게 숙성되는데 그걸 꺼내서 물에 끓여 먹는다. 또한 독특한 속성 장이 많다. 일반 된장과는 달리 만들어서 열흘 안에 숙성시켜 빨리 먹는 장을 속성 장이라고 한다.
음식문화라는 건 대대로 내려오며 학습되는 것이다.
타 지역의 문화가 흘러들어와도 기존의 문화에 흡수되거나 동화된다.
분명히 백제의 음식문화도 전승, 변형되며 지금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Q. 속성 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
동치미 국물을 넣어 빨리 발효시키는 천안의 빠금장, 소고기와 말린 대하를 넣어 만든 장을 발효시킨 예산의 집장, 팥과 밀가루를 활용해 만든 홍성의 팥장, 청국장의 일종인 공주의 퉁퉁장 등이 있다.
특히 예산의 집장은 궁중에서 먹던 청육장과 비슷하다. 콩을 발효시킨 후 쇠고기를 혼합한 형태의 장류인데, 그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Q. 속성 장이 발달한 특별한 이유는?
아무래도 담근 된장을 다 먹고 바닥날 즈음 된장을 대체할 다른 장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먹을 게 없는 겨울철엔 그나마 있는 된장을 주재료로 하는 요리를 많이 먹다보니 된장을 헤프게 쓰게 됐다.
그래서인지 봄이 되면 된장이 바닥나는 경우가 많았다. 된장을 담그면 1년간 기다려야 하니까 숙성을 촉진하는 매개체를 넣어 속성 장을 담근 것이다.
사실 속성 장은 이 지역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지역에도 고유의 속성 장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보리등겨를 넣은 경상도의 시금장, 깻묵을 활용한 전라도의 깻묵장이 있다.
충남엔 독특한 속성 장이 많다.
동치미 국물을 넣어 빨리 발효시키는 천안의 빠금장 소고기와
말린 대하를 넣어 만든 장을 발효시킨 예산의 집장
팥과 밀가루를 활용해 만든 홍성의 팥장이 대표적이다.
❞Q. 이런 고유의 향토 음식을 상품화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앞서 말했지만, 상품화의 기본은 향토 음식의 원형이다. 원형에 충실해야만 고유의 매력을 유지하며 전승, 발전할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지역 어른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함으로써 향토 음식을 채굴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해외에서도 원형을 무시하고 외국인의 입맛에만 맞춘 퓨전보다는 한식다움에 충실한 코리안 레스토랑이 더 인기가 많다.
Q. 세계인에게 한식을, 충남의 음식을 더 알리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외국인의 눈높이에 맞춘 한식 요리책이 필요하다. 영어로 번역된 한식 요리책은 이미 많지만, 외국인이 보기엔 어렵다. 한국의 요리책을 그대로 번역한 수준이다.
일반인들은 절대 보고 따라 만들 수 없다. 밤묵 무침을 예로 들자면 밤이 무엇이고, 어디서 구할 수 있고, 또 밤으로 묵은 어떻게 만드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해줘야 한다. 식재료도 그 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몇 년 전 미국에 교환교수로 근무했을 때 학생들과 ‘김밥 키트 개발’을 주제로 수업을 한 적이 있다. 김밥을 만들 때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한 건 밥 짓기였다. 요리책엔 그저 ‘쌀을 물에 끓여라’라고 나와 있었다.
냄비로 밥 짓는 건 한국인들도 까다로워하는데 말이다. 해외에선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케이 컬쳐와 한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케이 컬쳐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들과 함께 만든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