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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가을과 겨울 사이의 연포회,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가을과 겨울 사이의 연포회, 경주 포석정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조선의 선비들 연화장소 경주 포석정

조선의 선비들은 계절마다 다양한 모임을 통해 맛과 멋을 즐겼다. 이런 회식자리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집중됐는데 모임을 갖는 명분만큼이나 이름도 다양했다. 봄에는 곡강연과 앵도연, 비영회를 즐겼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난로회, 연포회를 가졌으며 첫 눈이 온 후에는 난한회를 열었다.

곡강연(曲江宴)은 계곡 정자에 모여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이다.

술잔이 물길 따라 흘러가다 멈추면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술을 마신 후 시를 지어 다 같이 감상한다. 처음에는 새로 급제한 진사를 위해 베푼 연회에서 시작했지만 훗날 시 낭송회를 겸한 선비의 회식자리로 변했다. 경주 포석정이 대표적인 곡강연 터이다.

앵도연(櫻桃宴)은 앵두가 한참 열릴 무렵의 봄을 감상하는 선비의 회식자리, 비영회(飛英會)는 꽃이 만발한 계절에 봄을 즐기는 모임이다.

꽃잎이 바람에 날려 술잔에 떨어지면 벌주를 마시는데 웃고 떠드는 사이, 산들바람이 불면 참석한 사람 모두의 잔에 꽃잎이 떨어져 다 같이 벌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모임 이름도 날릴 비(飛) 꽃부리 영(英)으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에 의하면 보통 4월에 연다고 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또 다른 회식모임이 있었다. 첫눈이 온 후 열리는 난한회(暖寒會)는 큰 눈이 내리면 집 대문에서부터 골목까지 눈을 깨끗이 쓸고 길을 낸 후 손님을 초대해 벌이는 잔치다. 부잣집에서 동네 눈을 깨끗이 치운 후 하루를 즐기는 모임이니 이름 그대로 추위를 따뜻하게 녹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늦가을인 음력 10월 초하루에는 난로회(煖爐會)를 가졌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서울의 풍속으로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석쇠를 올린다음 쇠고기를 기름·간장·달걀·파·마늘·후추 등으로 양념해 구워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소개했다.

쌀쌀해진 날씨를 핑계로 고기를 구워먹으며 풍류를 즐기는 모임이지만 원래는 음력 10월 초하루부터 대궐에서 난로에 숯을 피운 것을 기념하면서 시작되었다.

난로회(煖爐會)
▲ 난로회(煖爐會)

♣ 산속에서 즐기는 연포회

10월이면 또 친한 벗들이 모여 연포탕을 먹는 “연포회(軟泡會)”를 가졌다. 앞서 말한 모임이 모두 중국에서 비롯된 풍속인 반면 연포회는 순수하게 조선 선비들이 만든 모임으로 주로 야외, 그것도 산속 절을 찾아 연포탕을 먹으며 친목을 다졌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중기의 문신 이소한(李昭漢)은 진주의 청곡사(靑谷寺), 숙종 때 문인 이인엽(李寅燁)은 두타산 영수암(靈水庵), 영조 때 문신 김하구(金河九)는 정흥사(淨興寺), 역시 영조 때의 유언술(兪彦述)은 공주 마곡사(麻谷寺)와 봉일암(鳳逸庵)에서 어릴 적 벗과 동료들과 더불어 연포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이쯤에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닷가도 아닌 산속에서 연포탕을, 그것도 육식을 금하는 절에서 무슨 풍류라고 낙지탕 먹을 궁리를 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만약 이런 생각을 했다면 연포탕에 대한 오해가 낳은 의문이다. 금은 맑은 육수에 산 낙지를 넣어 살짝 데쳐먹는 낙지탕을 연포탕이라고 하지만 원래 의미는 연포(軟泡)로 끓인 국(湯)으로 연포는 다름 아닌 두부를 가리킨다.

연포탕이 왜 졸지에 전혀 관련도 없는 낙지탕으로 둔갑하였을까? 조선시대 문헌에 연포탕은 주로 닭 국물이나 쇠고기 국물에 두부를 넣어 끓인다고 나온다.

하지만 예전 바닷가 마을에서는 닭고기나 소고기 대신 쉽게 잡을 수 있는 낙지를 대신 넣고 끓인 두부장국을 낙지 연포탕이라고 했다. 그러다 두부 값은 싸지고 지천으로 잡았던 낙지는 오히려 비싸졌기에 두부는 사라지고 낙지만 남아 낙지탕이 연포탕이 됐다.

낙지탕, 연포탕
▲ 낙지탕, 연포탕

♣ 그렇더라도 왜 하필 절에서 연포탕을 먹었을까?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두부가 그렇게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일반 가정에서는 명절이나 제사, 잔칫날처럼 특별한 날 두부를 만들었다. 대신 절이 두부 공급처 역할을 했다.

특히 제사용 두부 만드는 절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했고 전국에 51곳이나 있었으니 두부장국, 연포탕 먹는 모임을 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게다가 절은 호젓한 산 속에 있으니 늦가을 친한 벗끼리 나들이를 겸해 풍류를 즐기며 친목을 다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 그래도 좋은 음식 다 놔두고 왜 두부장국일까?

영조 때 문헌 증보산림경제의 연포탕 만드는 법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연포탕은 겨울철에 먹어야 좋다면서 들어가는 재료로 살찐 암탉이 최고, 다음이 꿩고기, 돼지고기, 소고기의 순으로 꼽았다. 그리고 기름에 지진 두부와 생강, 파, 느타리버섯 종류인 참 버섯, 표고버섯, 석이버섯, 그리고 밀가루와 계란을 넣고 초피가루, 후춧가루를 뿌려서 먹는다고 했는데 지금이야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이지만 18세기에는 파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비싼 재료들이다.

연포탕이 흔한 두부장국이 아니라 상당히 고급요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연포회 중 일부는 선비들의 친목 모임을 넘어 민폐를 끼치는 호화판 잔치로 변질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은 어느 시대에나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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