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푸드의 한식 뷔페인 <올반>의 메뉴를 연구, 개발하는 컨설턴트, 지역의 향토 음식을 발굴하고 전수하는 음식 전문가, 소위 ‘손맛’이라고 불리는 어림치를 계량화된 표준 레시피로 만드는 한식 요리 연구가….
한식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바쁘게 활동 중인 박종숙 경기음식연구원 원장.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경기도 수원이다. 경북이 고향인 조부모님 손에서 컸다.
할아버지를 따라 황해도에서 살다가 수원에 터전을 잡은 할머니는 경상북도 음식과 황해도 음식, 해방 즈음의 경기 음식 등 각 지역의 특색이 고루 묻어난 밥상을 차려냈다. 소의 양과 곱창을 듬뿍 넣은 경기 육개장, 시원한 이북의 김치, 시원한 육수를 위해 소고기를 넣은 생태찌개 등등.
어릴 적 경험한 여러 지역의 향토 음식은 훗날 한식 요리 연구가의 길을 터주는 밑거름이 됐다. ‘경기음식연구원’에서 만난 박 원장은 겨울철 귀한 손님이 오면 꼭 준비하는 음식이라며 ‘유자화채’와 ‘조선간장으로 만든 약식’을 내왔다.
신세계푸드의 한식 뷔페인 <올반>의 메뉴를 개발하는 컨설턴트 지역의 향토 음식을 발굴하고 전수하는 음식 전문가
‘손맛’이라고 불리는 어림치를 표준 레시피로 만드는 한식 요리 연구가 박종숙 경기음식연구원 원장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경기도 수원
어릴 적 경험한 여러 지역의 향토 음식은 훗날 한식 요리 연구가의 길을 터주는 밑거름이 됐다.
❞Q. 유자화채의 상큼, 달콤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곱게 채 썬 유자의 담음새가 활짝 핀 꽃 같다.
20여 년 전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처음 접한 후, 유자가 열리는 겨울마다 만드는 디저트다. 유자의 겉껍질을 얇게 벗긴 후, 껍질의 노란 부분과 흰 부분을 분리해서 각각 가늘게 채 썬다.
그릇에 배채와 유자채를 돌려 담고, 가운데엔 석류알과 잣으로 멋을 낸다. 여기에 희석한 유자 시럽을 부어내면 완성이다. 정성이 듬뿍 들어간 섬세한 음식이다. 경기 음식은 어떤 지역의 음식보다 섬세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Q. 유자는 경기 지역이 아닌 고흥, 남해 쪽 특산물 아닌가?
대부분 지역에서는 보통 그 지역에서 나는 식재료 위주로 요리해 먹었지만, 경기 지역은 좀 특수했다. 임금이 있는 한양과 가깝다 보니 진상을 위해 바친 지방의 모든 산물이 모이는 곳이었다. 식재료는 먹어주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모이기 마련인데, 경기 지역은 인구도 제일 많았다.
그러다 보니 유통과 판매도 활발했다. 수도권에 모인 풍부한 산물들은 궁중•반가의 솜씨 있는 여인 손을 거쳐 섬세한 음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유자화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흥의 품질 좋은 유자와 경기 남양주의 먹음직스러운 먹골배의 만남이다.
Q. 경기음식연구원이 연구하는 음식 또한 ‘경기도’라는 지역의 범위에 국한되지 않은 것 같다.
최근엔 경북 울진의 특산물인 해방풍으로 음식을 개발하고, 맛의 방주에 올리는 작업을 도와줬다. 이에 대해 ‘경기음식연구원이 왜 다른 지역의 음식을 연구하느냐’는 의문을 품는 분도 있다.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전국의 음식과 식재료를 두루 공부해야 경기 음식이 나온다.
서울말을 표준어로 쓰는 것처럼 서울•경기권 음식은 바로 대한민국의 표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경기’란 의미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지금의 행정 구역인 ‘경기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고대 중국에선 왕의 침소로부터 사방 10리 구역을 경京이라 했고, 경으로부터 사방 5백 리 안을 기畿라고 칭했다. 이 개념은 고려 때 처음 적용됐는데, 다만 면적이 작은 우리나라는 경으로부터 사방 2백리 라는 개념을 적용했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를 합쳐 ‘경기’라 한 것이다. 넓게 보면 서울 근방인 경기도를 포함한 우리나라 중부 지역과 북쪽의 개성까지 아우른다.
단순히 지리적인 구분을 떠나서 고려와 조선에 걸친 천년 동안 중앙 문화를 만들어내고, 발전시키면서 누리던 공간이 바로 경기였다. 그 의미를 음식에서 찾고자 경기음식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다.
전국의 음식과 식재료를 두루 공부해야 경기 음식이 나온다.
서울말을 표준어로 쓰는 것처럼 서울•경기권 음식은 바로 대한민국의 표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Q. 궁중 음식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예는?
경기는 궁궐과 사대부의 음식 문화가 가장 먼저 전파된 지역이었다. 궁에서 활동하는 숙련된 숙수에 의해 그 조리법이 민간에 퍼지기도 했고, 왕실의 행차 때 백성들에게 음식이 내려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수원 화성에서 벌어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들 수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정조가 혜경궁 홍씨와 경북궁을 출발해 수원 화성에 가서 진찬을 베풀고 다시 환궁하기까지 8일간의 식단이 자세히 실려 있다. 궁중 음식 중 유일하게 일상식의 기록이 남아 있는 문서다.
특히 회갑연 다음 날 수원 거주 노인들을 위해 펼친 ‘양로연’과 백성을 위한 ‘낙성연’ 때 차린 술과 음식에 주목할 만하다. 왕실이 민중을 위해 내린 음식이므로, 의미와 스토리가 있어 현대의 잔치 음식에 응용해도 좋은 것들이다.
Q. 경기 음식의 전반적인 특징도 궁금하다
경기 음식은 다채롭고 섬세한 양념으로 원재료의 맛을 살린다. 맛이 강하지 않으면서 심심할 정도의 염도로 만든다. 평균 온도가 아래 지방보다 낮아서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기 때문에 간을 약하게 할 수 있었다. 된장을 담글 때 쓰이는 소금물도 아래 지역보다 저염으로 사용했다.
건강 저염식을 추구하는 최근 트렌드에 딱 맞는다. 김치는 멸치젓, 액젓보다 황석어젓이나 새우젓을 넣어 담그는데, 많이 넣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도 시원하면서 아삭하다. 김장 김치에 양념을 적게 넣은 것도 김치가 다음 해 봄까지 무르지 않는 비결이었다.
소금 대신 간장을 활용한 음식이 발달했는데, 정초의 떡국 상에 올라가는 나박김치도 간장으로 간을 맞춰 장김치로 올렸다. 떡도 임금 생신상에 오른 두텁떡을 비롯해 집 간장으로 간을 한 떡이 많다. 간장 간을 한 떡은 소금 간을 한 떡보다 감칠맛이 뛰어나다.
Q. 원장님이 만든 약식도 끌리는 감칠맛이 있다. 직접 담근 조선간장 덕분인가?
그렇다. 소금으로 만족할 수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섬세한 입맛을 간장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조상은 조선간장도 여러 가지로 분류해서 사용했다. 그해에 담은 간장을 ‘청장’이라 하는데, 맑은 국 간을 맞출 때 쓴다.
2, 3년 묵은 ‘중장’은 나물을 무칠 때나 찌개 간을 맞출 때 사용한다. 5, 6년 이상 묵힌 간장은 그 빛이 검고, 농도가 매우 진하다. 이것을 ‘진장’이라고 부르며, 조림할 때나 약식의 맛과 색을 낼 때 사용한다. 나는 보통 5년 이상 묵은 진장을 사용해서 음식의 감칠맛을 끌어올린다.
경기 음식은 다채롭고 섬세한 양념으로 원재료의 맛을 살린다.
맛이 강하지 않으면서 심심할 정도의 염도로 만든다.
된장을 담글 때 쓰이는 소금물도 아래 지역보다 저염으로 사용했다.
건강 저염식을 추구하는 최근 트렌드에 딱 맞는다
❞Q. 5년째 ‘전통 장 아카데미’ 강좌를 지속할 정도로 장에 대한 애정이 깊다.
한식 문화의 뿌리가 전통 장, 특히 간장에 있다고 확신한다. 경기음식연구원의 모든 교육과 한식 컨설팅은 전통 장에서 출발한다. 경기음식연구원 옥상에는 3백여 개의 장독이 있는데, 그 장독을 살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죽하면 별명이 ‘장꼬마마’일까. 궁중에서 장고 옆에 살며 궁중의 장을 지키는 주방 상궁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장 제조법은 대부분 달걀을 띄워 염도를 가늠할 정도로 계량화되어 있지 않다.
맛있는 장은 손맛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랜 경험으로 몸에 익은 손맛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전통의 참맛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계량만이 방법이다. 그래서 장을 만드는 모든 작업을 계량, 측정해서 제대로 된 표준 레시피로 남기는 데 힘쓰고 있다.
Q. 경기 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장은 무엇이 있나?
옛날 반가에서 주로 담가 먹은 ‘어육장’이 있다. 육해공의 재료를 메주와 함께 담그는 장이다. 조선 후기의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생활경제 백과사전 「규합총서」에는 ‘그 맛이 아름답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동물성 재료를 삭히는 과정에서 변질이 걱정되어 염도 높은 소금물로 담가야 하며,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야 하는 등 번거로운 점이 있다.
어느 날 문득 땅속에서 장이 발효되는 1년간의 변화가 궁금하고, 실험도 해보고 싶어서 15% 염도의 소금물로 어육장을 담가 땅속이 아닌 옥상에서 숙성시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꾸둑꾸둑 말린 소고기 업진살과 토종닭, 민어가 만지면 부서질 정도로 잘 삭아 있었다. 물론 이 성공의 전제 조건에는 잘 뜬 메주와 섬세한 관리가 있었다. 전통 그대로를 계승하는 것도 좋지만, 끊임없는 재해석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Q. 한식 뷔페 <올반>의 메뉴 컨설턴트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다양한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각 지역 향토 음식이 큰 인기를 얻었다.
친환경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지자체와 연계해 지역 농가의 판로를 넓히고, 소득 증대에 기여하는 방식을 함께 고민했다. 울진의 해방풍, 철원의 오대쌀, 서산의 육쪽마늘 등 귀하고 좋은 식재료들과 생산자, 담당 공무원의 적극적인 태도가 뿌듯한 결과를 만들었다.
특히 철원 오대쌀과 연잎으로 만든 연잎밥은 연근의 매력과 차진 쌀의 맛이 어우러진 메뉴다. 밥을 찐 후 보통은 소금 간을 하는데, <올반>에선 조선간장으로 간을 해서 밥맛을 단단하게 받쳐준다. 무심히 버릴 수 있는 식재료를 활용한 메뉴도 있다.
바로 미강 타락죽이다. 쌀을 도정하면 나오는 미강(쌀겨)에는 현미의 영양이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궁중음식인 타락죽에 볶은 미강을 넣었더니, 단맛이 돌며 맛이 풍성해졌다. 이 밖에 양주 연포죽, 남양주 배유자화채 등 경기 향토 음식을 기반으로 개발한 메뉴도 있다.
맛있는 장은 손맛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랜 경험으로 몸에 익은 손맛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전통의 참맛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계량만이 방법이다
❞Q. 잘 알려지지 않은 경기의 향토 음식을 소개한다면?
수원의 ‘겉절이 김치찌개’는 나의 어릴 적 향수가 담긴 음식이다. 김장하고 남은 배추 이파리들을 다 긁어모아서 남은 양념을 넣어 설설 버무린다. 허옇게 버무려진 우거지들은 김치 항아리 위에 덮거나 따로 담아두었다가 찌개처럼 지져서 먹는다.
김장한 다음날 할머니가 꼭 만들어주던 별미였다. 연천엔 ‘즘떡’이 있다. 삶은 감자에 삶은 팥과 강낭콩을 넣고 밀가루 반죽을 하여 수제비처럼 떼어 익힌 떡이다. 강원도의 ‘감자붕생이’와 비슷하다.
집 안에 남은 잡곡을 모아 만드는 검소함과 소박함이 깃든 음식이다. 배추의 노랗고 연한 속대를 넣고 끓인 남한산성 ‘토장국’도 서민들이 즐겨 먹었다. 한겨울 남양만의 자잘한 굴로 만드는 어리굴젓은 이맘때 설맞이 세찬상에 올려 먹는 별미다.
Q. 경기 음식 연구와 관련된 향후 목표와 계획은?
경기 음식의 체계적인 연구, 개발을 위해 경기음식 연구원을 사단법인으로 설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19년 연구원을 새로운 공간으로 이전하는 동시에, 현재 옥상에 있는 장독들은 경기 외곽의 한적한 지역으로 옮길 예정이다. 한식의 기본인 전통 장, 그중에서도 간장에 대한 공부는 하면 할수록 갈증을 느낀다.
전통 장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표준 레시피를 개발하고 널리 퍼뜨리는 작업은 나의 소명이다. 이와 함께 식재료 선택 및 조리부터 그릇 선정, 차림에 이르기까지 먹는 이를 배려하는 마음을 담은 ‘제대로 된 밥상’을 완성해 한식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