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절기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일 년 중에 가장 먹거리가 풍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계절을 이야기 할 때 보통은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 계절을 나누는 단위가 있었으니 바로 절기이다. 일년중 열두달을 다시 반으로 나눈 24절기라는 농경사회부터 만들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계절의 단위이다.
24개의 절기는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 자연달력이다. 24절기 흐름에 따라서 농사짓고, 각각의 절기에 따라서 수확한 음식을 먹고, 절기마다의 다양한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온갖 곡식이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보통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는데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있지만 가을의 풍성함을 뜻하기도 하다. 말 그대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의미인데, 말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축이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제사음식의 영향으로 고기음식들이 발달하였고, 그 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가장 즐기고 좋아하는 외식에는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직화 형태로 고기를 구워먹는 음식점이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널리 즐기는 모습일 것이다.
여러 나라에 다양한 고기음식이나 문화가 있겠지만 숯불을 피워 화로에 넣고 구워먹는 한국식의 즉석구이문화는 한국만의 독특한 구이 문화로서 지금도 고깃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회식은 소고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옛날의 회식자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슷했을까?
♣ 추위를 이기는 난로회
그 옛날 소는 농사와 물자의 운반에 주된 노동력이기 때문에 아무나 소고기를 먹기는 힘들었다. 아마도 평민보다는 양반들이 소고기를 먹기가 쉬웠을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회식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보자. 우선 동국세시기에는 음력 초 하루날, 큰 화로에 숯불을 피워 솥뚜껑 모양의 번철을 올려놓고 갖은 양념을 한 쇠고기를 볶고 가운데는 장국을 끓이면서 먹었다는 조선시대의 회식풍경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형태의 모임을 난로회(煖爐會)라고 부르며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 하였는데 그것에 관한 기록은 동국세시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글과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특이하게도 겨울철에 고기를 구워먹는 기록이 많은데 당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상단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김홍도의 설후야연(雪後夜宴)인데 눈밭에 둘러 앉아서 화로에 고기를 구워먹는 조선시대의 회식자리가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변의 산과 나무위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있어 한겨울임을 짐작케 한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에 굳이 밖으로 나와 추위에 떨며 고기를 구워먹었을까? 아무래도 추위를 이기는 고기 맛이 때문이지 않았을까?
김홍도의 그림 외에도 대표적인 한국음식인 불고기는 설야멱(雪夜覓)이란 이름으로 옛 문헌에 등장하는데 설야멱(雪夜覓)이란 의미 역시 눈 오는 밤 구워먹는 고기를 의미한다.
♣ 겨울에 즐기는 소고기
겨울과 소고기는 과연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여러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겠지만 우선 여름에 먹는 소고기 보다는 겨울에 먹는 맛이 더 좋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보통 동물이 그러하듯 소도 추운겨울에는 지방을 몸에 비축하는 성질이 있어 여름 소 보다는 마블링이 좋다. 반면에 봄, 여름이 되면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편해져서 지방(마블링)을 잘 비축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겨울에 출하되는 소는 지방함량이 높아 숙성기간이 짧아도 감칠맛이 높은 반면, 여름에 출하되는 소는 지방함량이 적어 숙성기간도 길어져야한다.
따라서 겨울소가 맛이 좋게 느껴지고 이처럼 겨울에 소고기를 즐기는 기록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내용들을 오래전부터 연구하다보니 요리사로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필자는 예전부터 설야멱적이라는 요리를 메인으로 만들고 있다.
현재 오너 셰프로 있는 두레유에서도 인기 있는 메뉴 중 하나이다. 이 설야멱적에는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우선 맛에 있어서는 예전 설야멱의 맛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기 위해 유기화로에 숯불을 이용하여 고기를 굽고, 눈밭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듯한 느낌의 플레이팅을 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다.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기의 조리방식인데, 조선시대의 고 조리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 기록된 설야멱의 설명(레시피)에 눈여겨볼만한 중요한 조리법이 등장한다. ‘소고기를 구운 뒤 냉수에 담가 다시 굽는 것을 세 번 반복한 뒤 기름장등을 발라서 구워야 연하다.’ 라는 기록이다.
본래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해온 한국인들은 질긴 고기보다는 부드러운 고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러한 조리법이 생겨났다. 오리지널 설야멱의 맛과 조리법을 재현하기 위해 많은 테스트를 하였다.
결국 냉수에 담글 때 육즙이 빠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액화질소를 사용하여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고기를 굽고 액화질소에 담그면 고기의 표면이 영하 200도에서 급랭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육즙이나 양념의 손실을 방지하면서도 부드러운 육질을 얻을 수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절기상으로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을 지나고 있다. 이제 곧 입동을 시작으로 겨울의 절기가 시작된다.
연말이 다가오면 회식자리가 많아지기 마련이고 그만큼 불판위의 고기도 자주 접하게 될 것이다. 이번 겨울에는 불판위의 고기를 구우며 먼 옛날 눈밭에서 고기를 굽던 선조들의 풍류와 멋을 다시금 생각하고 느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