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을 말리는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늦가을, 정성스레 껍질을 벗겨낸 감을 주렁주렁 내걸면 주홍빛 커튼이 겹겹이 늘어선 듯 진풍경이 따로 없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감을 스치고 어루만지며 단맛을 응축시키며, 쫀득쫀득한 식감을 만들어낸다. 바람의 맛, 곶감을 찾아 경남 하동의 신지식농업인 방호정 님을 찾아갔다.
Q. 대대로 대봉감 농사를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악양대봉감마을’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이곳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자리한 대축마을입니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마을이죠. 옛날에는 둔위마을이라고도 불렀는데, 대봉감의 시배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분지 지형으로 인해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많으며 토질도 우수하여 대봉감 농사에 매우 적합합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제가 아주 어릴 때에도 높이 4m가 넘는 매우 큰 감나무들이 많았습니다. 적어도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대봉감 농사를 짓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Q. 대봉감과 관련된 어릴 적 추억이 많으실 듯합니다.
감과 관련된 추억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직 익지 않은 파란 감을 먹었던 기억입니다. 8~9월이면 태풍이 와서 감이 떨어지곤 했는데, 그걸 주워다가 장독대에 소금물을 붓고 10~15일 정도 담가놓았습니다.
그러면 설익은 감 특유의 떫떫은맛은 없어지고 단맛이 났어요.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얼마나 맛나던지요. 그걸 ‘우린감’이라고 불렀는데, 먹고 나면 동네 아이들의 얼굴과 몸에 났던 부스럼이며 버짐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감에 풍부한 비타민C 등의 영양소 덕분이었을 테죠.
대봉감 수확철이 되면 동네잔치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상인들이 10월쯤 되면 찾아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작황을 보러 다닌 것이죠. 이후 계약이 성사되면 수확한 감을 담을 박스를 만들 차례입니다. 마당 넓은 집에 짚을 깔고 목재소에서 받아온 나무를 늘어놓습니다.
그러곤 동네에서 망치질 잘하는 이들을 불러 종일 나무 박스를 만드는 것이죠. 마을 전체에 목돈이 들어오게 되었으니 잔치 분위기에 인심도 후했습니다. 일꾼들을 위해 막걸리와 안줏거리 등 먹을 것이 한 상 차려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나 동네 아이들도 얻어먹곤 했죠
Q.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감 농사를 지으시고 축산업도 크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83년에 사천농고를 졸업하고 대봉감 농사를 짓는 한편, 소를 키웠습니다. 농업과 축산업에 경험이 쌓이면서 돈도 꽤 벌었습니다. 그런데 축산법인을 만들고 대봉감 농사도 8,000평 규모로 키우는 등 사업을 크게 벌이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말았죠.
2000년 즈음 사업에서 손을 떼고 1년 정도 고민을 거듭하다가 가업인 대봉감으로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당시만 해도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대봉감 곶감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죠. 1980년에 경상남도에서 곶감 단지를 지정해 자금을 지원했는데요, 저희 지역도 선정되어 다른 지역의 토종감을 사다가 깎아서 만들곤 했습니다. 대봉감으로 곶감을 만든다고 하면 혀를 차기 마련이었죠.
Q. 대봉감으로 곶감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어릴 적 기억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할아버님은 팔고 남은 감을 손수 깎아다가 곶감을 만드시곤 했습니다. 나무를 깎아 꼬챙이처럼 만들어 10개씩 꽂아 처마 밑에 걸어두면 과즙이 줄줄 흐르기도 하면서 벌이 꼬이기도 했죠. 저도 하나씩 빼먹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작이지만, 그 달짝지근한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린 감은 광에 보관했다가 손님 접대용이나 제사용으로 쓰곤 했습니다.
곶감은 주로 나주월하시, 산청고동시, 청도반시, 예천고종시 등 토종감으로 만들었습니다. 크고 과즙이 많은 대봉감은 말리기가 쉽지 않아 홍시를 만들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곶감으로 유명한 상주, 산청 등지를 숱하게 찾아가 묻고 배웠죠. 그런데 다들 대봉감은 곶감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만류했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수분이 많아 잘 마르지 않다 보니 주저앉아 터지거나 시큼한 맛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특히 감을 말리기 위해 걸어놓는 행거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행거는 받침대가 있었습니다. 섬유질이 많은 토종감들은 비교적 단단하고 마르는 시간도 짧아서 모양이 잘 잡히는데, 크고 수분이 많은 대봉감은 축 처지고 받침대와 맞닿는 부분에 곰팡이도 생기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꼭지에서부터 수직으로 대롱대롱 걸 수 있는 행거가 나왔습니다. 받침대 없이 대봉감을 걸 수 있게 된 것이죠. 수확한 후 냉장고에서 열흘 정도 숙성시켜 떫은맛을 뺀 후 깎는 노하우도 개발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맛보았던 대봉 곶감의 맛을 소비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렇게 2000년부터 꾸준히 테스트하면서 판매량을 늘려나갔고,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면서 2007년도에는 15만 개까지 판매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Q. 솔잎한방곶감, 발효곶감 등 차별화된 대봉 곶감을 개발하셨죠.
대봉감으로 만든 곶감이 전국적인 인기를 얻자 곳곳에서 찾아와 노하우를 물었습니다. 먼 데서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서 제가 터득한 기술들을 모두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렇게 전국 농가에서 대봉 곶감 생산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죠. 소비자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농가 입장에서는 차별화된 상품을 새롭게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 곶감을 만들 때 유황 훈증을 합니다. 감이 산화로 인해 검게 변하는 것을 방지하여 색깔을 곱게 유지하고, 곰팡이 등 병해충의 번식을 억제하기 위함이죠. 잔존 유황이 극소량이기 때문에 식품 관련 규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건강한 곶감을 만들기 위해 훈증 과정을 거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저는 솔잎과 매실을 이용해 유황 훈증의 효과를 내면서도 유익한 성분을 더한 솔잎한방곶감을 만들었습니다. 매실과 솔잎의 항산화 효과에 주목한 것이지요. 매실과 솔잎을 넣어 술과 식초 중간 단계의 액을 만들고, 여기에 깎은 감을 담갔다가 건조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발효곶감은 대봉감을 건시가 되도록 말리고, 그것을 다시 채반에 놓고 뒤집어가면서 안쪽까지 잘 말립니다. 이후 0℃에서 영하 15℃ 사이를 오가며 냉동 숙성을 하면 곶감의 안쪽에 농축된 과당이 밖으로 발현되어 감 표면에 하얗고 두텁게 만니톨이 형성됩니다. 깊고 풍부한 단맛을 느낄 수 있어 고가에 팔리고 있습니다.
Q. 곶감이 만들어지기까지 바람의 역할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곳 악양면의 바람은 어떤가요? 또 어떤 바람이 곶감을 만드는 데 좋은가요?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말리는 곶감은 한 가지 바람만으로 완성되기 어렵습니다. 보통 그저 차가운 바람만 잘 불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밤낮으로 찬 바람만 불면 감이 얼어버리고, 너무 따뜻하면 녹듯이 내려 앉아버리기 일쑤죠. 온도차가 있는 바람들이 수시로 교차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말랑말랑하고 모양도 예쁜 곶감이 만들어집니다. 악양면은 지리산, 백운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백운산을 넘어 남해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동시에, 지리산 찬바람이 내려옵니다. 곶감을 만들기에는 천혜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기후변화로 날씨가 따뜻해 자연건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를 비롯해 많은 농가에서 기계건조 시스템을 도입하는 이유이지요.
자연 바람으로 천천히 말리면 곶감 표면이 매끈하게 모양이 잘 잡힙니다. 기계건조를 하면 빠르게 말릴 수는 있지만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기 마련이죠. 기후변화로 감의 당도는 높아졌지만, 자연건조가 어려워졌다는 점은 많이 아쉽습니다.
Q. 좋은 곶감을 고르는 방법이 있을까요? 또 동심결농원의 목표나 계획이 있으시다면요?
곶감은 일단 색깔이 밝은 주황빛을 띠는 것이 좋습니다. 색이 좋다는 것은 당도가 높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대봉감은 반건시로 촉촉하게 드시고, 일반 토종감은 건시로 드시는 것을 권합니다. 또 단 것을 좋아하신다면 대봉감 반건시를, 덜 단 것을 찾으신다면 청도나 상주 곶감을 취향에 따라 선택하시면 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악양대봉감마을’만의 감 브랜드를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이곳이 대봉감 시배지인 만큼 오래된 감나무가 많은데요. 마을의 감나무를 전수조사해서 수령 100년이 넘는 나무들에서 수확한 감으로 ‘100년 대봉감’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해 마을의 소득을 높이고, 소비자에게는 대봉감의 색다른 맛을 선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