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품은 기다림의 맛, 옥수수와 감자, 강원

우리네 여름살이를 풍요롭게 채워주는 것으로 옥수수와 감자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예부터 가난한 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작물이면서 서툰 요리 솜씨로도 근사한 반찬으로 변신하는 게 옥수수와 감자다.

지금에야 시절이 좋아 사시사철 찐 옥수수와 통조림 옥수수를 맛볼 수 있고 감자 또한 언제든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맛으로만 승부를 낸다면 여름 햇볕 옴팍 받고 자란 여름 찰옥수수와 백일 넘게 땅 속의 기운을 끌어안고 자라난 감자를 그 어느 것이 이길 수 있을까?

작년 여름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광활한 옥수수밭의 옥수수도 우리네 여름 한낮에 꺾어 삶아 낸 찰기 가득 담긴 맛을 따르지 못했다.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감자 샐러드도 우리네 하지 감자가 보여주는 포슬포슬 달콤한 맛과 아주 다른 맛이었다.

♣ 모든 좋은 것은 기다림 뒤에 온다는 것을 옥수수를 삶으면서 배웠다

우리 땅에서 여름의 기운으로 자란 평범한 식자재로서의 옥수수와 감자에 얽힌 추억거리 하나쯤은 누구라도 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 가끔 냇가에서 옥수수를 삶아 먹기도 했다. 냄비를 챙기고 불을 피울 나뭇가지를 모아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있었지만 맛있는 옥수수를 먹기 위해서 기꺼이 감수하던 일이었다.

냇가 구석에 돌들을 쌓고 냄비를 올린 후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우고 옥수수가 살짝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놓고 뚜껑을 눌러 두고 익기를 기다렸다. 모든 좋은 것은 기다림 뒤에 온다는 것을 옥수수를 삶으면서 배웠다.

옥수수는 긴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야만 쫀득거리는 식감과 달면서도 간간한 맛이 옥수수 알에 딱 맞게 배어들었다. 모든 좋은 것들은 늦게 오는 법이라 그때의 우리는 불 위에 올려 둔 옥수수가 익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야만 옥수수가 삶기면서 풍겨내는 구수한 냄새가 우리를 불러냈다. 잘 익은 옥수수를 입으로 크게 베어 물면 터진 옥수수 살이 입술에 달라붙었다.

입천장에 짝짝 달라붙는 옥수수 알을 입에 가득 물고 씹어 삼키면 옥수수의 단맛은 오래도록 입속에 머물러 있었다. 푹 꺼져 있던 배가 옥수수 알들로 두둑해지면 많은 것들이 괜찮아지곤 했다.

삶에 조금 지치고 열정이 식을 즈음에는 찐 옥수수를 먹는 재미로 견딘 시간도 내게 있었다.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시기, 아이의 젖을 물리며 내 삶이 엄마라는 옷 뒤로 사라져가는 막막함을 견딜 때도 난 미역국 대신 삶은 옥수수를 뜯어 먹고 있었다.

어느 여름 계획도 없이 떠난 대관령으로의 여행길에서 만난 찰옥수수 삶는 냄새는 그 어떤 멋진 풍경보다 날 더 감동하게 했었다.

물기 많이 머금어 톡톡 터지는 수입산 옥수수에 비할까? 평창에서 홍천으로 이동해가며 야무지게 맛보던 강원도의 찰옥수수는 찰기라면 찰떡의 찰기에 뒤지지 않는 특별한 찰기 아니던가? 입에 짝 들어붙는 옥수수를 원 없이 먹으면 삶의 생기를 다시 채웠던 특별한 여행이었다.

♣ 어디서나 잘 자라는 옥수수

옥수수는 척박한 땅에서도 아주 잘 자라는 식물이다. 심는 시기는 4월부터 7월까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심는 시기가 길다는 것도 옥수수의 특징이다. 예전에는 옥수수를 말려서 다음 해의 씨앗으로 사용을 했는데 요즘에는 씨앗이나 모종을 사서 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는 날로부터 2-3개월 정도 지나면 옥수숫대는 2미터 이상으로 자라고 하나의 대에 옥수수 네댓 개가 열린다. 보통 옥수수수염이라고 부르는 것이 옥수수의 암꽃인데 이 수염이 적당히 마른 상태가 되면 옥수수가 잘 익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흙이나 물의 질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성장 기간이 짧아서 한국의 시골 마을 어디에서나 옥수수를 키운다. 대량 생산지도 많지만 집 근처의 텃밭에서 작은 규모로 키우는 경우도 많다.

옥수수의 원산지는 원래 아메리카 대륙이지만 유럽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온 서구의 옥수수를 개량한 찰옥수수 종자가 훨씬 맛있고 대중적이다.

유럽의 각지에서 키우는 옥수수와 우리나라 옥수수는 찰기부터 다르다. 외국의 옥수수가 노랗고 무른 속을 가진 것이 특징이라면 우리나라의 옥수수는 하얗거나 까만 것, 노란 것 등 종류도 다양하고 속도 꽉 차있다.

쌀이나 밀과 함께 3대 작물에 속하면서 쌀이나 밀과 같은 도정 과정을 거치지 않고 쉽게 조리해 먹을 수 있으며 기름을 짜거나 가루를 내어 빵이나 면으로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경제적인 작물이기도 하다.

가난했던 한국의 5, 60년대에는 밥 대신 끼니를 해결해 주던 훌륭한 식량이었던 옥수수다. 먹을 것이 넘치는 지금도 여름철 맛있게 먹는 간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쪄서 먹기만 할 것 같은 옥수수는 다양한 방법으로도 요리할 수 있다.

옥수수 알을 까서 프라이팬에 소금과 후추만 살짝 뿌린 채 버터에 볶아내서 숟가락으로 밥 대신 퍼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옥수수 알을 마요네즈와 꿀 한 수저 넣어 섞은 후 철판에 펴놓고 모차렐라 치즈를 올려서 살짝 익히면 미슐랭 별표 부럽지 않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옥수수 철판 치즈구이가 된다.

먹다가 질리면 콩 대신 옥수수 알을 넣어서 밥을 짓고, 오이냉국에도 옥수수 알을 넣으면 별미가 된다. 옥수수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모든 여행으로의 시간이 멈췄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농부들도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있으니 많은 양의 찰옥수수를 주문하려 한다.

먹어 보았던 기가 막히게 찰지고 달콤했던 홍천의 옥수수든 내 고향 문경의 옥수수든, 맛 좋다고 내게까지 소문난 옥천의 어느 농가의 옥수수든 주문을 해야겠다. 일 년을 기다려 용기 내서 수화기를 든 옛 연인처럼 수줍게 옥수수를 원한다고 전해야겠다.

어느 날 선물처럼 옥수수 포대가 도착하면 설레는 마음으로 껍질을 벗겨 푹푹 찔 것이다. 이왕이면 몹시 더운 날이면 좋겠다.

더운 태양의 열기를 옥수수 삶는 열기로 덮어서 그 열기 안에서 삶의 좋은 것은 천천히 기다려야 온다는 것을 다시 새겨 보련다. 옥수수 삶는 시간을 견디면 코로나19로 달라져버린 새로운 일상을 살아갈 힘이 생길지도 모른다.

♣ 여름에 캐 먹는 감자의 맛

감자는 보통 봄과 가을에 나누어 심는다. 맛은 역시 여름에 캐 먹는 감자가 맛있다. 보통 장마가 시작되는 유월 말에서 칠월 초 이전에 감자를 캐야 하기 때문에 감자를 심는 시기도 보통 3월 중순 이후로 잡는다.

이즈음 심은 후 100일 정도 성장의 시기를 거치면 여름에 맛있게 감자를 먹을 수 있다. 감자 역시 특별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바로 먹을 수 있는 경제적인 식자재라 모두에게 사랑받는 작물이다.

가난한 시절에는 허기진 배를 채워줬다면 다이어트가 일상이 된 현대에는 칼로리는 낮으면서 포만감을 주는 작물로 인기가 많다. 비타민C가 다량 함유되어 있어 피로 해소에도 도움을 주고 감자에 함유된 마그네슘이 수면을 돕는 세로토닌 생성을 활성화해 불면증에도 크게 효과가 있다.

휴가철 물놀이 끝에 햇볕에 탄 피부를 진정시켜야 할 때 감자를 얇게 저며서 피부에 붙여두면 열기가 빠진다. 노화를 방지하고 피부를 개선해 주는 효능까지 있어 이모저모로 건강에도 아주 좋은 작물이다.

여름이면 상자채 들여놓고 먹는 하지 감자는 따로 장을 보지 않아도 며칠은 거뜬히 먹을 반찬이 되어준다.

곱게 썰어 전분을 제거하고 기름에 마늘과 소금만 넣고 볶은 감자채볶음, 장독대를 열어 금방 퍼 온 된장 두어 숟가락을 풀어 멸치를 넣고 끓이다가 멸치를 건져내고 그 안에 감자를 썰어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다른 반찬 없어도 밥 한 그릇은 뚝딱 먹을 칼칼한 감자된장국,

얇게 썰어 앞뒤 바삭하게 구운 감자를 달콤한 간장 양념에 버무린 구운 감자 무침, 작은 알감자를 일부러 사서 아주 오랜 시간 쪼글 거릴 때까지 조린 알감자조림, 고등어와 조기와 갈치, 그 어떤 생선과도 환상적인 맛의 궁합을 보여주는 생선 감자조림,

출출할 때 그냥 쪄서 분꽃이 하얗게 핀 상태에서 소금 찍어 먹는 찐 감자, 찐 감자를 으깨서 마요네즈에 버무리면 근사한 감자 샐러드, 세로로 길쭉하고 가늘게 썰어 살짝 말린 후 기름에 튀겨내면 어느 패스트푸드점 부럽지 않은 감자튀김, 요리를 잘 못하는 나도 감자 요리 몇 가지는 거뜬하게 해낼 수 있을 만큼 감자는 너무나 친절한 식자재다.

사람이 감자처럼 누구와도, 무엇에도 조화롭게 잘 어울릴 수 있다면 아마 이 세상에는 사랑이 흘러넘칠 것이다.

♣ 그 자체로 너무 근사한 여름의 멋진 요리

시골 어느 텃밭에서도 무심한 손길 탓하지 않고 저대로 잘 자라는 옥수수와 감자, 기대하지 않아도 여름이 되면 귀한 보물처럼 우리에게 맛있는 먹거리가 되어 여름 한 철을 행복하게 해준다.

강원도 홍천에서는 7월 말에서 8월 초에 걸쳐 찰옥수수 축제가 열린다. 충북 옥천에서는 잘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옥수수와 감자가 함께 축제라는 옷을 입고 손님들을 맞는다고 한다. 옥수수와 감자의 만남 축제라니, 이름부터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이쪽저쪽에서 벌어질 옥수수와 감자 요리의 향연을 상상하니 군침이 돈다. 대나무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올린 찐 옥수수와 찐 감자는 그 자체로 너무나 근사한 여름의 멋진 요리다. 누구든 반기며 받을 한 상이다.

올여름도 옥수수를 찌고 감자를 삶으면서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담아야겠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을 즐기면 가을이 선물처럼 도착할 것이며 겨울 또한 쓸쓸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미래를 기쁘게 기다릴 것이다.

코로나19로 모든 일상의 시간이 답답하게 흘러간다 해도 삶의 소중한 것들은 옥수수가 익고 감자가 익는 시간의 기다림을 견딘 후에야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 강원 홍천 찰옥수수 축제

높고 넓은 산야 가운데 맑은 홍천강 물이 흐르는 홍천. 배수와 통기성이 좋고 무기질이 풍부한 토양과 상대적으로 큰 일교차 덕분에 홍천의 옥수수는 다른 지역보다 당분이 많고 쫀득하다. 이렇게 옥수수 명산지로 알려져 있는 홍천에서 23년 넘게 열리는 축제가 있다.

강원도 홍천의 대표 축제인 찰옥수수 축제가 그것이다. 옥수수 하나만을 테마로 열리는 축제이지만 흥겹고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올해는 한풀 꺾였던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고 있어 축제를 개최하진 않지만, 대신 홍천 찰옥수수 판매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판매 행사는 7월 31일부터 3일간 홍천군 도시산림공원 토리숲과 홍천군 두촌면 장터 두 곳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드라이빙 스루와 워킹 스루 2가지 방식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 개최 시기: 매년 7월 말 - 8월 초

• 개최 장소: 강원도 홍천군 도시산림공원 토리숲

• 주최/주관: (재)홍천문화재단

• 홈페이지: https://www.hccf.or.kr/Home/H10000/H10100/html

♣ 충북 옥천 옥수수·감자 축제

대청호 상류 지역의 깨끗한 공기와 비옥한 토양에서 재배되어 인기가 높은 옥수수와 감자를 테마로 개최되는 <충북 옥천 옥수수·감자 축제>.

2019년에는 옥수수와 감자를 캐는 체험 행사, 즉석 음식 경연 대회를 비롯해 각종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고, 축제장에서 판매되는 옥수수와 감자가 2시간 만에 매진이 될 정도로 방문객의 호응이 높았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안타깝게도 축제가 취소되었다. 하지만 매년 7월 중순이면 축제가 진행되니, 내년 이 시기에는 구수하고 넉넉한 옥천의 정서와 함께 제철 옥수수와 감자를 맛보러 옥천으로 떠나보자.

• 개최 시기: 7월 중순

• 개최 장소: 충북 옥천군 안내면 종합축제장 및 생태공원 일원

• 주최: 옥수수감자축제위원회

• 주관: 안내면 농산물작목반

♣ 감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