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는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이다.
❞대둔산과 모악산 등 명산으로 둘러싸인 완주는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이다. 그동안 전주의 명성에 가려 진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지만, 적당히 시골스러운 풍경 속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세련된 갤러리와 문화공간은 완주의 저력을 짐작게 한다. 대지 곳곳에 피어난 화사한 가을꽃을 배경으로 고아한 고택의 정취를 느끼고파 완주로 발길을 재촉했다
♣ 자연에게 품을 내어준, 고택의 풍경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오성마을은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뻗어오다 멈춰 선 끝자락, 종남산(終南山)에 자리한다. 하루에 읍내를 오가는 마을버스가 5대뿐일 만큼 외진 시골 마을에 요즘 부쩍 외지인의 발길이 잦다. 아원고택을 보기 위해서다.
‘우리들의 정원’이라는 뜻을 품은 아원(我園)고택은 경남 진주의 250년 된 한옥을 그대로 옮겨와 총 12년에 걸쳐 터를 닦아 조성한 곳이다. 광고도 하지 않고 그저 지역 문화 예술인의 아지트로 사랑받다 한옥스테이로 손님을 받기 시작한 지는 채 2년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마주친 건물은 회백색의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이다. 입구를 종잡을 수 없어 한참을 두리번대다 ‘아원 Gallery Coffee’라 적힌 글씨 아래 두툼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독특한 공간이 반긴다.
높고 좁은 통로는 오로지 빛과 조명만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복도를 지나자 곧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반쯤 열린 천장으로는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깊은 호수처럼 말간 물이 고여 있는 실내 연못 너머로 탁 트인 홀이 시선을 압도한다.
무려 하늘이 열리는 갤러리라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참을 둘러보았다. 작품은 예닐곱 편뿐이지만 아원 뮤지엄은 휑하다는 느낌보다는 활달한 예술적 감수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신선한 충격을 안긴 뮤지엄을 나와 본격적으로 고택 구경에 나섰다.
아원고택은 종남산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는 만휴당과 사랑채인 연하당, 안채인 설화당과 별채인 천목다실로 이뤄졌다. ‘만사를 제쳐놓고 쉼을 얻는 곳’이라는 의미를 품은 만휴당 대청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산과 산이 겹겹이 둘러쳐진 종남산의 산수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대청마루 앞에 찰방찰방 물을 채워둬 산과 하늘이 고스란히 물 위에 내걸린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마루를 쓸고 닦으며 집을 단장했을 주인장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연하당은 자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송광사 초입의 벚꽃길이 흐드러지게 만개할 무렵 제대로 절경을 즐길 수 있으니 한 번 더 오라는 주인장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그때는 아원고택의 이야기를 더 오래, 많이 들어보리라 다짐한다.
♣ 고즈넉한 휴식과 만나다
뚜렷한 경계 없이 아원고택과 이웃하는 소양고택은 다르지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소양고택은 고창과 무안의 철거 위기에 놓인 130여 년 된 고택 세 채를 고스란히 옮겨와 전통 방식대로 복원했다. 예를 들어 하얀 방석 위에 직접 색색의 수를 놓고, 액자 대신 조각보를 걸어두는 식이다.
이제는 예약자가 줄을 이을 정도로 소양고택은 한옥의 고즈넉함과 현대인이 사용하기에 불편함 없는 시설로 사랑받고 있다. 넓은 잔디밭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자리한 고택은 별다른 장식을 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받아들여 멋을 냈다.
그저 처마 밑에 하얀 무명천 한 장 매달아두었을 뿐인데, 바람이 불 때마다 나풀거리는 모습이 한갓지고 운치 있다. 고택이 품고 있는 심심한 매력이 일상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차분히 어루만진다. 소양고택에 머물지 못해도 위로받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소양고택의 또 다른 핫 플레이스인 두베카페다. 차 한잔 앞에 두고 묵직한 연주곡을 들으며, 창밖 너머 한옥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끄럽던 마음이 더없이 평온해진다. 주말이면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니 평일에 방문하거나 이른 오전에 여유롭게 들르는 것이 좋다.
♣ 다시 찾아도 좋을 마을, 삼례문화예술촌
오래된 양곡창고를 개조했다는 말에 어느 외진 시골에 자리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삼례문화예술촌은 삼례읍 지척에 자리한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시골 읍내는 문화예술촌이 생기면서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던 낡은 창고에 디자인 박물관과 목공소, 책 박물관, 갤러리, 카페가 들어서, 이 문화예술 공간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삼례를 찾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도시 재생 사례로 평가받는 삼례문화예술촌은 고난의 역사를 상징하던 장소였다.
예부터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해 드넓은 곡창 지대를 품은 삼례는 일제 강점기에 양곡을 대거 수탈당해야 했다. 일본인 대지주가 세운 양곡창고는 삼례주민의 피눈물로 채워진 셈이다. 오랜 세월 아픔의 현장으로 방치된 곳을 완주군은 문화 예술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건물 외관은 옛 형태를 그대로 두었지만, 내부는 말끔히 리모델링해 현대적인 예술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입구에 들어서면 입장권부터 사야 한다. 입장권이 있어야 각 건물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번잡한 주말을 피해 평일 이른 오전에 방문한 삼례문화예술촌은 여유로움 그 자체다. 외부 조형물을 배경으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도, 갤러리를 홀로 전세 낸 것처럼 유유자적 둘러볼 수도 있다. 목공소를 지날 때는 잔잔한 나무 향기가 풍겨오고, 독특한 인테리어를 뽐내는 카페에서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쉬어 갈 수 있다.
삼례문화예술촌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삼례책마을 문화센터는 잔뜩 녹이 슨 양철 벽을 그대로 활용해 세웠다. 커다란 현수막에 적힌 ‘삼례는 책이다’는 문구가 마음을 설레게 하고, 어린왕자 조형물이 앉아 있는 북하우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아날로그적 분위기에 흠뻑 빠지고 만다.
고서점과 헌책방, 북카페로 이뤄진 북하우스는 2층 천장까지 빼곡하게 책이 들어차 있다. 아무리 책을 읽지 않는 이라도 이 광경을 눈앞에 보면 절로 책을 읽고 싶을 것만 같다. 천장의 트러스는 한옥의 그것을 그대로 살렸고, 2층은 미로처럼 책장이 이어진다.
헌책방의 책 가격이 그렇듯 3,000원부터 시작하는 저렴한 책을 한 권 사면 바로 옆 북카페에서 읽을 수 있다.
주말이면 주변에서 헌책 벼룩시장이 열리고, 도서전이나 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 행사도 열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삼례에 살며 이곳을 매일 드나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 생각이 나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터다.
♣ 구수함 뽐내는 할머니의 손맛, 비비정마을
삼례읍에는 삼례문화예술촌과 양대 산맥을 이룰 만큼 유명한 마을이 있다. 매스컴에 여러 번 소개될 정도로 마을 주민과의 상생을 도모하는 비비정마을이다. 비비정마을은 ‘할머니 셰프’가 요리하는 비비정 농가레스토랑과 만경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비비낙안 카페로 구성된다.
정부 공모 사업에 선정되어 시작된 비비정 농가레스토랑은 마을 주민과 함께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식자재는 마을에서 재배한 것을 우선으로 사용하고, 마을에서 음식 솜씨 좋은 할머니들이 주방을 책임진다. 손님에게 내놓는 모든 음식은 할머니 셰프의 손을 거친다.
물 한 잔이라도 볶은 무말랭이에 옥수수를 넣어 끓일 만큼 정성을 다한다. 수육과 생선구이, 잡채와 함께 방금 캔 봄나물을 무쳐 내오는 반찬 10가지는 하나같이 맛나다. 특히 푹 삭힌 김치를 씻어 들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쳐 볶은 김치볶음 한 접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어릴 적 할머니가 해준 밑반찬 맛이 비비정 농가레스토랑의 밥상 위에 고스란히 올라 있다. 한껏 배를 채웠으면 오솔길 계단을 따라 비비낙안 카페로 오를 차례다. 탁 트인 유리창 너머 만경강의 푸르른 풍경이 한눈에 와 닿는다.
풍경 못지않게 카페 주인장이 직접 캔 쑥과 뽕잎으로 발효시켜 만든 발효차도 깊고 진한 맛이 난다.
햇살이 가득 들이치는 카페 창 너머로 윤슬을 품은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그 위로 운행을 멈춘 만경철교가 서 있다. 끝없이 쭉 뻗은 철길을 따라 어서 다시 완주의 봄이 달려오기를, 온 평야에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이 어서 펼쳐지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