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비 온 뒤 자라나는 죽순
❞내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냈던 시골마을에는 대나무가 많았다. 대나무는 마을 뒤편 언덕의 가장자리를 따라 쭉 늘어서서 마을 전체를 감싸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 대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우리 집 역시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나무 숲을 놀이터 삼아 자라난 우리들에게 이 나무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월 대보름날의 달집 짓기, 방패연 만들기, 죽순 꺾기 등은 대나무가 있는 곳에서만 체험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추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계절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5월을 맞아 고향의 대나무들도 생기를 더하고 있다. 이 화려한 계절이 되면 고향에서 어김없이 해야 할 일과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죽순 채취 작업이다.
시골집 뒤편의 대나무 숲에는 해마다 죽순들이 돋아난다. 잦은 비와 따뜻한 날씨로 금년에는 이 식물이 다른 해보다 많이 돋아났다.
대나무는 대개 5월쯤 땅속에서 죽순이라는 새싹이 올라오면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죽순은 대나무 뿌리에서 움이 돋아난 것으로, 대나무는 이와 같은 뿌리의 움을 통해서 번식한다.
죽순은 특히 초여름 비 온 후에 많이 돋아나며, 이로 인한 고사 성어가 우후죽순 雨後竹筍이다. 이는 어떤 일이 한때에 많이 생겨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 변하지 않는 담백하고 아삭한 죽순의 맛
옛날에는 대나무가 발이나 광주리, 소쿠리, 부채 등 여러 생활용품의 재료로 사용되어 귀한 대접을 받았다. 대나무도 비싼 값에 팔려 대밭이 있는 집은 부자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죽순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가끔 대나무 숲 주변의 논밭에 자라나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죽순만을 채취하여 마치 산삼처럼 요긴하게 음식 재료로 사용하였다. 플라스틱 등 새로운 소재가 나온 이후, 대나무는 수요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였다.
불필요해진 대나무를 잘라내지 않으니 대숲이 사람 다닐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빽빽해졌다. 다양하고 풍부해진 식재료들로 인해 죽순에 대한 관심 또한 멀어져 갔다. 삼라만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죽순은 예로부터 식재료로 많이 애용되어 왔다. 매년 이맘때면 내가 다른 일을 제쳐두고 죽순을 따는 이유는 자명하다. 담백하고 아삭한 죽순 특유의 맛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식재료로서의 독특한 맛과 식감이 나를 대나무 숲으로 이끄는 것이다.
다리에 칭칭 감기는 덤불들을 걷어내고 대나무밭 속으로 들어가는 일조차도 만만하지가 않다. 마치 정글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기분이다. 곳곳에 쓰러져 널브러진 대나무 줄기들이 컴컴한 숲속의 유령처럼 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촘촘하게 자라난 대나무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이제 막 솟아나는 죽순을 찾는 일도 보통은 아니다. 이에 비해 죽순을 꺾는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어린 대나무는 연약해서 발로 살짝 밀어주기만 해도 쉽게 부러지기 때문이다. 반 시간 정도 대나무 숲속을 헤매고 나니 죽순을 담은 마대가 묵직해졌다. 무거운 자루를 메고 정글로부터 간신히 탈출함으로써 작업은 완료되었다.
♣ 자연 속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순수한 자연식품
죽순은 수분함량이 높은 반면 칼로리가 100g당 13kcal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저칼로리 식품이며,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또한 단백질과 섬유질의 함량이 곡류와 육류에 비해 높으며, 칼륨, 칼슘, 마그네슘 등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이들 미네랄 중 상당수가 수용성이기 때문에 죽순 삶은 물을 버리지 말고 수시로 음용하면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죽순 삶은 물을 버릴 바에는 차라리 죽순을 버리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죽순은 아무런 인공적인 도움이 없이 자연 속에서 저절로 자라난 순수한 자연식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징과 효능으로 인해 이 식물은 비만과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현대인들에게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때는 버림받았던 죽순이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최근에는 대나무나 죽순과 관련된 축제를 개최하는 곳도 생겨나고 있다. 담양 대나무 축제와 거제 맹종 대나무 축제가 그것이다. 특히 맹종 대나무 축제에서는 죽순을 맛볼 수 있는 죽순시식회도 열린다. 불행히도 금년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이들 축제는 모두 취소되었다
♣ 죽순을 데쳐 넣은 들깨죽
죽순을 식재료로 쓰는 음식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들깨죽이다. 죽순을 데쳐 넣은 들깨죽은 죽순 특유의 향과 아삭한 식감을 느낄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죽순을 넣고 끓인 들깨죽 한 그릇은 맛이나 영양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한 끼 식사였다.
특히 모내기철, 죽순과 머윗대와 감자, 미역을 넣고 끓인 들깨죽은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여자들은 허리를 굽혀 농부가를 부르면서 모를 심고, 남자들은 못 짐을 져다 나르는 고된 작업을 하느라 지치고 허기져 있을 때, 논 주인이 가져다주는 이 음식은 반가운 선물이었다.
때로는 도심의 분위기 있고 값비싼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화려하고 기름진 메뉴와 예전의 전통 음식들에 대한 소위 효용의 크기를 비교할 때가 있다. 가끔 후자의 그것이 크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이는 잊혀져가는 옛날 음식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리라.
♣ 죽순과 부추의 궁합, 죽순나물
죽순은 성질이 차갑기 때문에 따뜻한 성질의 부추와 같이 나물로 무쳐 먹으면 금상첨화이다.
봄이나 여름에 올라오는 새싹들은 대개 약간의 독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종족 번식을 위한 자신의 방어기전 防禦機轉이다. 부추는 죽순이 가진 이런 독성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죽순과 부추는 서로 궁합이 맞는 식재료이다.
힘들게 채취한 죽순으로 추억의 죽순나물을 만들기로 하였다. 앞마당에 백솥을 건 후 죽순을 껍질째 넣고 물을 한 솥 가득히 부었다. 죽순 특유의 아린 맛을 줄이기 위해서는 삶을 때 껍질을 벗기지 않고 삶아야 한다. 삶은 죽순을 한나절 정도 찬물에 담가 놓으면 아린 맛은 대부분 제거된다.
물에 담가 놓았던 죽순을 식칼 자루로 부드럽게 다진 후 물기를 제거하였다. 집 앞 텃밭에 기다랗게 자라난 부추를 잘라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 준비된 죽순과 부추를 초고추장에 버무려 죽순나물을 만들었다.
모처럼 느껴보는 죽순의 담백한 맛과 아삭한 식감은 추억 속에 아스라이 남아있는 옛 맛 그대로였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혀가 이 무미건조한 음식에 대해 즉각적으로 실망의 반응을 보인다. 씹을수록 구수하고 산뜻한 맛을 보이는 이 기억 속의 메뉴에 대해 이번에는 미각을 담당하는 중추신경이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어온다.
♣ 여름날을 위한 죽순장아찌
음식의 맛이라는 것은 또한 단순히 음식의 재료나 조리방법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맛은 음식을 먹는 장소나 분위기, 식사 모임의 구성원 등에 따라서도 좌우된다.
음식의 맛은 모름지기 영양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정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 복합적인 함수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황석영은 음식이란 무엇보다도 사람끼리의 관계이며, 시간에 얹힌 기억들의 촉매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혀끝의 미각만을 추구하는 미식가나 식도락가들을 ‘맛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규정한다. 모처럼 맛보는 이 죽순나물은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준다. 이 음식은 또한 어머니께서 무쳐주시던 죽순나물의 맛을 떠올리게 하고 부모님의 사랑과 가족 간의 우애를 되새기게 하는 촉매가 된다.
오랜 기간 동안 죽순의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남은 죽순으로 장아찌를 만들기로 했다. 맹물에 간장, 마늘, 생강, 설탕 등을 넣고 팔팔 끓인 다음 불을 낮추고 30분 정도 더 끓였다.
집 안에는 간장과 마늘 냄새로 가득 찼다. 그리 호감이 가는 냄새는 아니지만 여름 내내 죽순의 맛을 볼 수 있다는 일념 때문에 참기로 했다. 항아리에 죽순을 담은 후 식힌 간장을 붓고 죽순이 뜨지 않게 사발로 눌러 주었다.
죽순에서 빠져나온 물로 간장이 묽어지기 때문에 사나흘이 지난 후 간장을 따라내어 다시 끓여 붓는 과정을 3~4회 반복해야 한다.
이렇게 담근 죽순장아찌는 1~2개월 정도 지나면 먹을 수 있다. 커다란 용기에 가득 찬 죽순을 보니 마음도 넉넉하다. 올여름에는 수시로 죽순을 맛보면서 예전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 것 같다.
♣ 진정한 맛은 다만 담백할 따름이다
작업을 끝내고 거실 소파에 앉아 땀을 식혔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봉우리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 있고 산등성이를 넘은 바람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는 온갖 새들이 모여 경쾌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때를 맞춰 건너편 느티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있던 까치들이 일제히 합창을 한다. 마치 속세를 떠나 선경 仙境 에 든 느낌이다.
맑은 물처럼 담박하고 변함없는 우정과 교양을 기초로 한 군자들의 교제를 담수지교 淡水之交라 한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맛 대신에 담백하고 순수한 맛을 가진 죽순이야말로 군자들의 교제와 다름 아니다.
채근담 菜根譚에 의하면 ‘진한 술과 기름진 고기, 맵거나 단 것은 진정한 맛이 아니다. 진정한 맛은 다만 담백할 따름이다 膿肥辛甘 非眞味 眞味 只是淡’라고 하며 음식의 참맛을 갈파하고 있다.
공자는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꾸미는 사람들 중에는 어진 이가 드물다 巧言令色 鮮矣仁’고 하였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본모습을 화려한 화장품, 심지어는 성형수술로 가리는 것이 일상화된 요즘, 순수함과 깨끗함의 표상 表象 인 죽순으로부터 군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배운다.
[축제소개]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가득한 힐링의 시간
대나무의 고장이자 슬로시티로 유명한 담양에서 매년 5월 담양대나무축제가 열린다. 과거부터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나무를 심었던 죽취일(竹醉日)에서 유래한 축제로,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죽녹원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인 관방제림 일대에서 진행된다.
대나무 활쏘기, 대나무놀이 체험마당, 대나무 뗏목타기 등 대나무를 이용한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고 피톤치드와 음이온을 뿜어내는 대나무 숲을 거닐며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죽녹원 인근에 위치한 관방제림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거대한 고목들이 있어 대나무숲과는 또 다른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밤이 되면 관방제림의 고목들을 이용한 화려한 레이저쇼도 펼쳐진다.
[축제TIP] 죽취일이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대나무 심기 좋은 날로 음력 5월 13일에 해당한다. 물을 좋아하는 대나무의 특성을 이용해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 대나무를 마을 곳곳에 옮겨 심는 데서 유래했다.
[행사내용]
∙ 명품숲길휴체험 :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하는 명품 숲길 투어이다.
∙ 죽취아리랑플래시몹 : 죽취아리랑에 맞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안무 퍼포먼스이다.
∙ 대나무 뗏목체험 : 대나무로 만든 뗏목과 카누를 타고 관방천 위를 누려보는 체험이다.
∙ 대나무 소쿠리 물고기잡기 :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로 물고기를 잡아보는 체험이다.
∙ 대나무 족욕 : 죽초액이 포함된 온수로 족욕하며 몸과 마음 힐링해보는 체험이다.
[축제 주최/주관]
• 일시 : 매년 5월경
• 주소 :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죽녹원로 119
• 행사장소 : 담양 죽녹원, 관방제림 일원
• 주최 : 담양군
• 주관 (사)담양대나무축제위원회
• 전화번호 : 061-380-3150, 3152
• 홈페이지 : http://www.bamboofestival.co.kr
♣ 간장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