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완기 명인이 내민 식혜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듯 시원함이 먼저 가슴에 퍼지고, 뒤이어 달짝지근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혀와 코를 맴돈다. 그런데 뒷맛은 전혀 텁텁하지 않고 오히려 개운하고 깔끔하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께서 한 사발 퍼주시던 식혜 맛이 어렴풋하게 떠올랐고, 또 한 모금이 간절해진다. 이게 바로 전통 식혜의 맛이라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맛! 과연 명인이다.
Q. 우리 선조들은 식혜를 어떻게 즐겼나요? 식혜의 대표적인 효능도 궁금합니다.
옛날에는 소화제가 따로 없었는데, 식혜가 바로 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잔칫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를 하며 서로 음식 만들기를 돕곤 했습니다. 그때 빠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식혜였죠. 평소에는 맛보기 어려운 음식을 배불리 먹게 되니 배탈이 나기 일쑤였는데, 식혜를 먹으면 속이 편안해졌기 때문입니다.
발효음료인 식혜가 음식물을 삭히기 때문에 소화가 잘되는 것이죠. 변비에도 효과가 있고, 대장암 예방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식혜는 갈증과 숙취의 해소에도 좋습니다.
Q. 조선시대 문헌인 <소문사설>에 근거한 전통 식혜 제조비법을 3대째 이어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식혜를 무척 좋아했어요. 몸이 먼저 원했다고나 할까요? 입이 궁금하면 식혜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장가를 들었는데, 당시 장인어른께서 여름이면 당신의 어머님에게서 배운 전통 식혜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시곤 했습니다.
얼음을 동동 띄운 식혜 한 잔은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에게 두루 인기가 있었죠. 저는 그 맛을 보다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장인어른께 제대로 된 식혜를 만드는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지금의 전통 음료 제조업체인 세준푸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일이네요.
옛날에는 가정에서 솥단지 하나로 해결했던 가내수공업을 규모 있는 제조업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장인어른과 함께 전통 비법과 맛을 유지하면서 공정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죠.
침전, 당화 등 식혜가 만들어지는 각 과정에서의 계절에 따른 온도 조절 데이터를 쌓고, 고두밥을 지을 대형 밥솥을 개발하는 등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왔기에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2018년에는 이렇게 식혜 명인으로 선정되어 매우 뿌듯합니다.
Q. 대한민국식품명인 가운데 현재 유일한 식혜 명인이십니다. 식혜 분야에서 명인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가 있을까요? 또 전통 식혜를 만드는 비법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인가요?
시중에서 파는 일반적인 식혜는 효소제와 설탕 등을 넣어 다소 쉽게 단맛을 냅니다. 그렇게 만든 단맛은 전통 식혜의 깊은 맛이 나지 않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입니다. 전통 비법은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합니다.
싹을 틔운 겉보리를 말려 엿기름가루를 만들고, 우려낸 물을 무려 8시간 동안 침전시키고 여과하여 고두밥과 혼합하여 60℃ 정도의 은근한 온도로 당화하는 데 또 대여섯 시간이 소요됩니다. 대규모 생산시설을 갖춘 전통 식음료 제조업체 중에서 이처럼 장시간 당화 과정을 거치는 공정을 도입한 것은 세준푸드가 유일합니다.
저희가 하루 딱 한 번만 식혜를 생산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저는 소량 생산에 오랜 시간이 들어도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 식혜의 깊은 맛과 함께 안전한 먹거리와 건강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명인이라는 영광은 이러한 고집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Q. 식혜의 세계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어떤 식혜를 선호하는지요? 그간의 성과도 궁금합니다.
쌀 문화권을 제외한 국가의 외국인들은 우리 전통 식혜의 겉모습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수년 전 두바이에서 열린 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밥알이 둥둥 뜬 모습이나 무채색의 뿌연 빛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밥알을 보고는 이물질이냐고 묻거나, 식혜가 주스 혹은 스프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오렌지주스나 포도주스 정도의 예쁜 색깔은 아니더라도 좀 더 맑게 하여 먹음직스러운 색깔을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밥알은 빼서 거부감을 줄였습니다. 제가 경희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요, 경희대학교와 근처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음회를 열어서 가장 반응이 좋은 맛을 찾아내곤 합니다.
그리고 그간 식혜 세계화의 걸림돌이었던 유통기한을 획기적으로 늘렸습니다.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는 식혜를 만들다가 상해버리기도 하는데요, 멸균팩 포장으로 상온에서 18개월 동안 보관할 수 있습니다. 식혜의 수출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2001년 경기도 유망 수출 중소기업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미국, 일본, 중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수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같은 쌀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도 식혜와 유사한 음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식혜를 따라오려면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우리의 문화와 제품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듯이 K-푸드인 식혜도 머지않아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Q. 쌀, 엿기름 등 원재료를 100% 국산으로 엄선하여 식혜를 만드신다고 들었습니다.
재료가 좋지 않다면 아무리 전통 비법으로 식혜를 만든다고 해도 제맛을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부미나 수입 쌀에 비해 가격이 훨씬 비싸지만 쌀로 유명한 이천 등지의 경기미를 계약재배하고, 순수 국산 엿기름을 사용해온 이유입니다.
2년 전부터는 이천에서 직접 쌀농사를 지어 고품질의 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엿기름을 만드는 보리의 경우 기존에는 국산 맥주용 보리를 사용했는데, 작년부터 겉보리 계약재배를 시작했습니다. 전통 식혜의 맛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그리고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도 저희 식혜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렇게 국산 원료를 사용하면 농가소득에도 보탬이 됩니다. 세준푸드가 1년 동안 사용하는 쌀의 양은 약 100t, 보리는 약 300t에 달합니다. 선금 50% 계약재배로 농가의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고 있죠. 세준푸드의 식혜를 수출하면 우리 농산물을 수출하는 셈입니다.
장애인 고용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도 사고로 한쪽 귀가 잘 안 들리고, 시력도 좋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장애인의 마음과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적극적인 것이지요. 전통 식혜를 만들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먼저 아이들을 위한 전통음료 체험시설을 만들 예정입니다.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알게 되듯,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식혜 등 전통음료를 제대로 만들고 맛볼 수 있다면 성장해서도 그 맛을 찾게 될 것입니다. 미래 세대가 그 맛을 알고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전통은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공장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 아궁이를 만들어 솥단지를 놓고 아이들을 위한 체험학습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설을 보다 본격적으로 큰 규모로 마련하여 내후년쯤 문을 열 계획입니다. 전통음료의 세계화에도 더욱 매진할 것입니다.
재작년 곤지암IC 부근에 전통음료연구소인 하늘청 중앙연구소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에서 세계시장을 공략할 우리만의 음료를 전문적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올가을에는 대추와 감으로 만든 음료를 각각 출시할 계획입니다. 이를 통해 한식 세계화에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