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떡 한 조각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시큼하면서도 달큰한 막걸리 냄새가 먼저 후각을 자극하고, 한 입 베어 물자 촉촉하면서도 포근포근한 식감이 이어진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이내 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기정떡(증편). 그 맛은 또 어떤가. 막걸리와 쌀의 구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에 발효의 깊은 맛이 어우러져 자꾸 손이 간다. 과연 명인의 솜씨다.
Q.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명인까지 3대째 기정떡을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 얽힌 추억이 많을 듯합니다.
제가 맏딸이었는데 부모님은 외지에서 일을 하셨고, 외할머니가 저를 각별하게 생각하셨는지 이곳 전남 화순 사평면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기 때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그리고 학업을 마치고 시집을 가기 전에도 외할머니와 살았죠. 외할머니는 저보고 손녀가 아니라 막내딸 같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전의 이씨 종갓집 맏며느리인 외할머님은 음식 솜씨가 매우 뛰어나셨어요. 동네에서도 유명해서 잔칫집에서 모셔가 음식 만들기와 상차림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 종갓집이었던 만큼 제사가 많다 보니 유과, 강정, 식혜, 조청, 엿, 떡, 술 등 음식을 만드시는 모습을 매일같이 보면서 자랐죠.
외할머님이 떡이라도 만들라치면 저는 절구질을 하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떡 위에 고명을 올리기도 하며 도왔습니다.
술을 빚거나 식혜를 만들기 위해 찌어놓은 고두밥을 몰래 먹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어요. 항상 보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던 것이 지금의 저를 명인으로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Q. 어릴 때부터 기정떡 등 다양한 전통 떡을 많이 접해보셨겠네요.
기정떡은 주로 여름철에 많이 먹었어요. 더운 여름날, 다른 떡들은 아침에 만들어놓으면 저녁이면 쉬어버리기 일쑤였는데, 기정떡은 발효음식이어서 3일 정도 실온에 두고 먹어도 상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술 냄새 때문에 기정떡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릴 적에는 달콤하고 쫀득쫀득한 찹쌀떡을 좋아했죠. 외할머님은 찹쌀떡을 숨겨두셨다가 저에게 몰래 챙겨주시곤 했어요.
부잣집 소리를 들었던 외가가 어떤 일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는데, 그때 외할머님이 여러 가지 전통 떡을 만들어 시장에 파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경험이 없다 보니 떡 맛은 좋았지만, 장사 수완은 그리 좋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주막 비슷한 걸 운영하시던 동네 이웃이 보다 못해 대신 팔아주시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Q. 친정어머니가 방앗간을 운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82년이었습니다. 부산에 거주하시던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농사보다는 장사를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셨고, 때마침 방앗간을 내놓는 이가 있어 덜컥 사들이게 됐습니다.
그렇게 방앗간에서 고달픈 떡 장사가 시작된 것이죠. 사실 어머니는 떡을 많이 만들어보지 않으셨지만, 금세 손이 익고 맛으로 소문이 나면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아마 어머니도 저와 마찬가지로 외할머니를 통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하신 바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장등떡방앗간’에서는 가래떡부터 시작해 꿀떡, 시루떡, 절편, 설기떡, 인절미 등 어지간한 떡을 모두 만들어 팔았고, 참기름·들기름을 짜고 고춧가루도 빻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화순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서도 알음알음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방앗간이 되어 있었죠.
광주, 나주, 보성, 순천 등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줄을 서서 떡을 받아 가곤 했습니다. 외할머니로부터 이어져 온 손맛에 어머니의 정직하고 후한 인심이 더해진 결과였죠.
Q. 1990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장등떡방앗간’을 운영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사업을 물려받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부모님이 사평면에서 방앗간을 여셨을 때 저는 결혼을 하고 외지에서 살고 있어서 자주 찾아뵙고 도움을 드리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연세가 예순이 넘어가시니 힘에 부치셨던 모양이에요. 제게 함께 방앗간을 운영해보자고 권유하셨죠.
당시 이 지역에는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펌프질을 해서 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떡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선뜻 내키지 않아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어머님이 제가 살고 있던 경기도 양평까지 버스를 타고 찾아오셔서 저를 설득하셨죠. 그렇게 끌려오다시피 방앗간을 물려받게 된 겁니다.
Q. 방앗간을 운영하시면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을 듯합니다.
잠시 옆에서 도와드리는 것과 직접 방앗간을 운영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어요. 7월 여름철에 내려와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기정떡을 많이 만들었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에야 아침 10시에 떡을 내보내야 하면 아침 7시에 시작하면 되는데, 옛날에는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니 새벽 4~5시부터 일을 해야 했어요. 잠이 부족한 채로 일을 하는 날들이 많았죠. 떡 위에 고명을 올릴 때면 남편과 마주 앉아서 꾸벅꾸벅 졸면서 맞절하기가 일쑤였죠.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나와서 도와주시면 세 식구가 둘러앉아 절을 해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추석 때면 3~4일은 잠도 못 자고 일을 해야 했어요. 떡을 찌다가 잠이 들어서 떡을 황토색으로 구워버린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물이 떨어져서 타버린 것이죠. 힘들어도 장사는 잘됐어요. 특히 기정떡으로 전남 지역에서 알아주는 방앗간이 되었죠
Q. 2005년 ‘사평기정떡집’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기정떡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러 떡 가운데 기정떡을 전문으로 삼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쉼 없이 열 몇 가지 떡을 만들고, 뻥튀기도 만들고, 기름을 짜고, 고춧가루도 빻다 보니 힘에 부치더군요. 그러다가 어느 날 오른쪽 손가락을 고추 방아 기계에 다치고 말았어요. 선택과 집중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입니다.
상호를 ‘사평기정떡집’으로 바꾼 것은 2005년이지만, 기정떡 한 가지로 전문점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입니다. 여러 떡 중에서 기정떡을 선택한 것은 자신감 때문이었어요.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시던 바로 그 맛이라며 기정떡을 찾는 고객들이 많았거든요.
Q. 외할머님으로부터 이어져 온 사평기정떡의 노하우 그리고 일반적인 기정떡과 사평기정떡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발효의 정도를 맞추고 찌는 타이밍을 잡는 것이 사평기정떡의 오랜 노하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효가 지나치면 신맛이 많이 나는 등 뒷맛이 안 좋고, 발효가 덜 되면 맛이 밋밋해지거든요. 또 떡을 찔 때 눈으로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정도를 확인하면서 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반죽이 너무 올라오면 떡 안의 구멍이 성글어지고, 반대로 덜 부풀면 개떡처럼 납작해지기 때문이죠. 이렇게 발효의 정도를 맞추고 찌는 타이밍을 잡는 것은 계절, 온도, 습도 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또 사평기정떡의 가장 큰 차이점은 쌀죽을 쑤어 발효를 시킨다는 것입니다. 쌀죽을 쑤어서 밑밥을 하고 이것을 쌀가루와 함께 반죽하여 발효 과정을 거칩니다.
이렇게 만들면 떡이 부드럽고 쫄깃한 맛이 나죠. 그리고 다른 음식들이 모두 그러하듯 간이 잘 맞아야 합니다. 설탕과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하는데 요즘은 계량화하여 일정한 맛을 내고 있습니다.
Q. 우리 농산물을 활용해 색깔을 내고, 강한 막걸리 향을 줄이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재료가 중요합니다. 100% 국산 쌀과 생막걸리를 사용하고 색소나 방부제 등 화학첨가제를 일절 넣지 않습니다. 전통음식인 데다가 저와 제 식구들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건강에 좋으면서도 색깔을 내기 위해서 다양한 농산물을 활용해 시험을 했어요.
색도 곱게 잘 나오고 갈변이 일어나지 않는 재료를 백방으로 찾았죠. 그 결과 현재 울금, 뽕잎, 자색고구마로 각각의 색을 내고 있습니다.
막걸리 향이 강해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술 냄새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해왔습니다. 막걸리의 양을 줄이는 대신 발효 시간을 조절해서 발효의 정도를 맞춘 것이죠. 우리의 전통 기정떡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Q. 편리하고 위생적인 개별포장을 도입하기도 했죠? 또 앞으로 어떤 변화를 구상하고 있나요?
최근 추세에 맞춰 개별포장을 하고 싶었는데, 2008년 여수에서 열렸던 전국체전이 계기가 됐습니다. 지자체에서 개막식과 폐막식 입장객들에게 기정떡을 하나씩 나눠주고 싶다며 개별 포장을 원했던 것이죠. 부랴부랴 인터넷을 뒤져서 포장 기계를 구입했고, 어렵사리 납품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개별 포장과 일반 포장 제품을 병행해서 판매했어요. 초창기에는 개별 포장 제품의 가격이 비싸서 판매가 저조했는데, 소비 패턴의 변화로 점차 개별 포장 제품 수요가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더군다나 해썹(HACCP, 식품의 생산에서부터 소비자가 섭취하는 최종 단계까지 식품의 안전성과 건전성·품질을 관리하는 위생관리 시스템) 인증을 받으면서 일반 포장 제품은 사라지게 됐죠. 제품 종이에 절단선을 넣은 것도 고객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위생적인 데다가 가지고 다니며 먹기에도 편리하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최근 식문화 트렌드에 맞춰 보다 다양한 기정떡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초콜릿이 들어간 초코 기정떡, 귀리가 들어간 건강 기정떡 등이 그것이죠. 앞으로도 기정떡을 베이스로 여러 시도들을 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기정떡은 빵과 제조법이 가장 유사한 떡입니다. 빵과 기정떡을 접목해 새로운 유형의 제품도 선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기정떡은 빵과 유사하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을 듯합니다. 기정떡을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요?
기정떡은 발효 음식이기 때문에 소화가 잘됩니다. 때문에 환자들의 회복기 식사로 좋고, 우유와 곁들이면 바쁜 직장인들의 아침 식사 대용으로도 좋습니다. 빵처럼 버터에 구워 먹거나, 노릇노릇 구워서 샐러드에 넣어도 별미입니다.
차의 떫은맛을 잡아주기 때문에 먹기 좋게 잘라 전통차의 다식으로 내놓기 좋으며, 의외로 커피와도 잘 어울립니다. 빵이나 도우처럼 활용해 샌드위치나 피자를 만들어 먹는 것도 추천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