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은 ‘김치의 날’이다. 김장철인 동시에, 하나(1) 하나(1)의 소재가 모여 다양한(22) 효능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김치의 품질 향상과 김치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해 제정됐다. 그런데 이날은 우연찮게도 유정임 포기김치 명인의 생일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김장철을 맞이해 김치와 유정임 명인과의 깊고도 깊은 인연이 궁금해졌다. 경기도 수원에 자리한 풍미식품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이유다.
Q.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김치에 대한 추억이 있을까요?
외할머님은 음식 잘하기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잔치가 벌어지는 등 음식 솜씨 좋은 사람이 필요한 곳이면 곧잘 불려 다니시곤 했어요.
외할머니께서 김장김치를 항아리에 담고 그 위에 우거지를 얹어놓으셨는데요. 봄 즈음에 골마지가 하얗게 핀 우거지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잘 씻고 멸치 몇 마리와 된장을 넣고 끓여주시던 된장국의 오묘한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 국물이 어찌나 깊고도 구수했는지 모릅니다.
Q. 어머니가 시장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했고, 어릴 때부터 일을 도와 김치 등 음식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손맛이 대물림된 것이겠죠?
안타깝게도 제가 열한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고, 외할머님의 손맛을 물려받으셔서 음식 솜씨가 좋았던 덕분에 시장에서 반찬가게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네 자매 중 맏이로 열심히 일을 거들었습니다.
당시 반찬가게는 요즘처럼 다양한 메뉴가 있지는 않았어요. 콩자반, 멸치볶음, 나물류 그리고 김치가 전부였죠. 그렇게 어머님이 김치 등 반찬을 만드실 때면 옆에서 도왔고, 집에 남아 있을 때면 동생들 밥상을 차려주는 것도 제 몫이었죠.
그런데 일이 지겹거나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웠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돈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습니다. 일을 할 수 있고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죠.
Q. 어머니에게서 김치 담그기를 비롯해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함께 배웠을 듯합니다.
어머님을 도와드리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고무장갑이나 일회용 비닐장갑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김치를 다룰 때는 항상 마른 손으로 해야 한다는 것, 김치를 꺼내고 남은 자리는 다시 평평하게 꾹꾹 눌러주어 공기와의 접촉을 막아야 한다는 것, 새우젓은 육젓(음력 유월에 잡은 새우를 삭힌 것)을 사용해야 김치가 맛있다는 것, 배추김치에는 찹쌀풀을 쑤고 열무김치에는 밀가루로 풀을 쑨다는 것 등 호되게 야단을 맞아가면서 배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 음식은 담음새가 정갈하고, 재료가 좋아야 하며, 정성이 담겨야 비로소 맛있다고 항상 강조하셨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조상의 지혜를 어머님과 함께 반찬가게를 운영하면서 체득한 것입니다.
Q. 종갓집으로 시집을 가셔서 시어머님에게도 음식을 배우셨죠?
충남 아산이 시댁입니다. 어릴 때부터 음식 하는 손이 야무져서 맏며느리감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정말로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었죠. 분가해서 살았기 때문에 명절 때 찾아뵙고 한과, 유과, 다식, 편육 등의 기본적인 한식을 배웠습니다.
특히 시어머님이 커다란 항아리에 담그셨던 동치미의 맛을 잊지 못합니다. 겨울철 살얼음을 깨어 국물을 들이켜면 속이 뻥 뚫리는 듯 어찌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무의 아삭한 식감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죠. 시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더 많은 내림음식을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큽니다.
Q. 1986년 김치 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말씀드렸듯이 일을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고 계란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제부가 된 사람을 방 한 칸에 세입자로 들였다가 음식 솜씨가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제부의 회사 사람들, 학교 선생님들 밥을 해주기 시작했는데 특히 김치 맛이 좋다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김치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남편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잘 키우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어머님의 반찬가게 일을 도왔던 경험도 있었고, 김치 담그기에도 자신이 있었기에 수원의 세류시장에서 김치 공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운전면허를 따고 3일 만에 트럭을 몰고 강원도 대관령으로 가서 배추를 사오기도 했죠. 가락시장에서 재료를 잘못 사서 울기도 하고요. 하지만 김치 담그기는 제 천직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15평짜리 공간에서 시작해 30평, 45평, 60평으로 늘려가며 사업을 키웠습니다.
Q. 포기김치 명인만의 비법이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재료가 좋아야 합니다. 풍미식품에서는 100% 우리 농산물로만 김치를 만들고 있습니다. 고춧가루, 마늘, 생강 모두 국산입니다. 특히 배추와 무는 지역의 생산자 단체나 산지 농민과 계약재배를 통해서 한약재 등을 넣은 퇴비로 건강하게 키워내고 있어요.
새우젓은 목포수협 경매로 구입하고 광천토굴에서 숙성해 사용합니다. 그리고 포기김치에서 가장 중요한 레시피는 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멸치, 홍합, 다시마, 대파, 양파, 무말랭이 등을 넣고 끓여서 육수를 내고, 거기에 찹쌀풀을 쑤어서 깊고도 건강한 맛을 내는 것이죠.
Q. 풍미식품에서는 전통 김치의 명맥을 잇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김치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는 기업부설 연구소를 세우고 산학연을 통해 본격적으로 김치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복분자 함유 배추포기김치 제조방법, 숙성전복 및 이를 이용한 전복보쌈, 배추 절임 시스템 등 2005년부터 현재까지 등록한 특허만 30여 개나 됩니다.
다시마를 이용해 맛은 유지하면서도 염도를 낮춘 칼륨김치, 지방과 단백질이 부족한 김치의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한 사골김치나 소고기김치 등 전통적인 방식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변화와 그에 따른 요구에 발맞추는 김치를 개발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도 김치의 염도를 낮추면서도 감칠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Q. 김치공장뿐 아니라 전통식품문화관과 연수관도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치 제조와 유통, 수출을 넘어서 김치의 역사를 알리고 김장 문화 확산에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바쁜 현대인들이 매번 김치를 담가 먹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김치의 역사와 담그는 방법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전통식품문화관에서는 김치를 비롯해 전통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가득 담았고, 연수관에서는 일반인, 학생, 외국인 등을 대상으로 김치 담그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1월에는 김장 재료를 모두 제공하는 김장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참가자들은 담아갈 통만 가지고 오면 되는 것이죠. 현대인의 생활방식과 김장 문화가 공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Q. 현재 세계 무대에서 김치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그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을까요?
현재 풍미식품에서는 호주, 미국을 중심으로 수출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샐러드에 가까운 레시피로 김치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매운맛과 짠맛을 줄이거나, 젓갈을 적게 사용하는 등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추려는 변화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우리나라 전통 방식으로 만든 김치만이 진짜 김치이고 이것으로 세계 무대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본질을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 꿈 중의 하나가 서울시청 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에서 각 국가의 대사님들을 모시고 김치 담그기 행사를 실시하고, 담근 김치를 본국으로 보내서 세계인들이 맛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질을 지키는 동시에 발전시키고 홍보를 지속하면 김치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