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주암면의 구산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한가로웠다. 보성강 물줄기가 길을 따라 나란히 흐르며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그 옆으로는 이제 막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벼들이 황금빛으로 넘실거린다. 그렇게 고즈넉한 풍경 어디에선가 구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겨온다. 김순옥 찹쌀 조이당 조청 명인의 집이 가까워진 것이다.
Q. 대종손 종갓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종갓집 내림음식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친정이 김녕 김씨 대종손 종가입니다. 아버지가 3대 독자셨죠. 일년내내 제사가 끊이지 않았고, 손님도 많았어요. 어머니의 손은 정말이지 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저도 맏딸이어서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도와 제사 음식을 만들고, 손님이 오시면 다과상과 주안상을 차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준비를 해둬야 합니다. 제철 식자재로 음식들을 만들어둬야 언제든 집안의 대소사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죠. 가을이 깊어가는 이맘때쯤에는 조청과 엿을 만들고, 무와 도라지로 정과를 만들곤 했습니다.
Q. 순천 주암면의 구산마을로 시집을 왔을 때 첫인상이 궁금합니다.
순천과 가까운 곡성군 죽곡면에서 23살에 시집을 왔습니다. 부모님이 선을 보셨고, 전 얼굴도 모른 채 그날 바로 약혼했죠. 순천 근동에서는 옥천 조씨를 뼈대 있는 집안으로 알아주었거든요. 처음에는 울기도 하고 많이 서운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아끼시던 딸의 배필을 맺어주실 때는 확신이 있으셨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만 해도 보통 결혼식장을 따로 잡고 식을 올리곤 했는데, 내로라하는 양반댁이었기에 저는 전통 혼례를 올렸습니다. 쪽진머리를 하고 동네 입구에서 가마를 타고 입장했죠. 구산마을은 당시 집집마다 수도가 없어서 우물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어 먹곤 했습니다.
구산마을은 옥천 조씨 집성촌이었기에 ‘누구 엄마’라는 호칭도 쓰지 않고 양반답게 택호를 지어 부르곤 했죠.
Q. 친정이 대종손 종갓집이어서 옥천 조씨 종가음식을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듯합니다.
결혼 후에는 남편 직장이 있는 광양에서 살았습니다. 남편이 옥천 조씨 절민공파 23대손으로 종갓집은 아니었지만, 문중 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저도 종부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로 40분 거리여서 자주 구산마을에 와서 음식 만들기를 거들고 배웠습니다.
친정집에서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도와 종갓집 음식 만들기를 배우고 익혔기에 버겁다거나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죠
Q. 종가의 다른 내림음식들이 많았을 텐데 특히 조청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옥천 조씨 절민공파의 제사 상차림에는 반드시 조청이 있어야 합니다. 또 꿀이 귀하던 시절, 조청은 우리나라 전통 감미료로 엿, 정과, 조림 요리 등 다양한 음식에 사용되곤 했죠. 명절에 시어머니와 함께 조청을 만들어 가서 주변 이웃들에게 나눠주면 매우 반응이 좋았습니다.
때마침 양보다는 질을 우선시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고요.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다양한 요리에 활용하기에도 좋다 보니 나중에는 입소문이 나서 조청을 좀 팔 수 없겠느냐고 물어오기도 했습니다. 결국 시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팔다 보니 점차 그 규모가 늘어나게 되었어요.
남편이 퇴직한 이후 구산마을에 들어와 살던 어느 해에 전라남도에서 진행하는 ‘농어민의 날’ 행사에서 조청을 전시하게 됐어요.
그때 전남 도지사께서 조청을 맛보시더니 꼭 제품 개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죠. 그렇게 해서 2007년 정식으로 사업자등록까지 마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지정하는 대한민국 식품명인에도 도전하게 됐습니다.
Q. 조청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요?
찹쌀로 죽을 쑤어 식힌 다음, 엿기름을 넣어 숙성되면 맑은 물을 넣어 다시 호박색이 될 때까지 끓입니다. 그렇게 졸여지면 점차 조청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엿기름입니다. 질금가루, 즉 보리의 싹을 내어 말린 식품인 엿기름이 좋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식혜를 만들 때 작 삭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당화가 잘 이뤄지고 조청의 양이 많이 나옵니다. 쌀과 보리 두 재료 역시 중요하죠. 쌀은 순천 농협을 비롯해 구례, 곡성 등 인근 농협에서 구입하며, 쌀을 당화시키는 데 필요한 엿기름을 만드는 보리는 겉보리가 좋은데, 이 역시 관내에서 생산한 질 좋은 겉보리를 선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Q. 명인의 가장 대표적인 상품으로 ‘홍삼진과골드’가 있습니다. 먹는 방법을 소개해주신다면요.
인삼정과는 예로부터 명절 때나 폐백, 이바지 등의 행사에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특별한 날에 건강을 주고받았던 것이지요. 영양 간식으로 하루에 1뿌리 정도 먹는 것이 좋습니다.
대추차나 인삼차에 곁들여 먹으면 궁합이 좋고, 샐러드 등 각종 요리에 잘라서 고명으로 올리면 요리의 품격을 높여줄 것입니다. 얇게 저며서 쌀가루와 함께 쪄서 떡을 해 먹는 것도 추천합니다. 컵케이크, 쿠키 등을 만들 때 넣어도 색다른 맛을 선사합니다.
Q. 전통적인 제조법을 그대로 복원하면서도 현대화, 규격화를 이루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전통 방식 그대로 아궁이에 직접 불을 지피고 무쇠솥을 올려 주걱으로 저어가며 조청을 만들었습니다. 무쇠솥은 열 보존율이 뛰어나 아궁이의 화력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그런데 조청을 졸이는 과정 후반에는 타기도 해서 손실이 많다는 단점도 있었죠.
그래서 열을 조절하기 비교적 수월한 양은솥을 사용해 무쇠솥의 단점을 극복했습니다. 지금은 해썹(HACCP, 식품의 생산에서부터 소비자가 섭취하는 최종 단계까지 식품의 안전성과 건전성·품질을 관리하는 위생관리 시스템) 인증을 받기 위해 아궁이를 사용하지 않고, 솥도 스테인리스 3중 솥으로 바꾸었어요.
무쇠솥의 열전달 방식과 유사하지만, 기계화하여 편리하면서도 위생적인 방법을 도입한 것입니다. 또 재료의 양, 각 과정에서 걸리는 시간, 조청의 점도 등을 표준화·규격화하여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Q. 찹쌀 조청 외에도 토마토, 도라지, 생강 등을 첨가한 다양한 기능성 조청을 만들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조청 사용법을 권하신다면요.
<동의보감>에 조의당은 어혈과 염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나오는데요, 바로 이 조의당이 조청을 뜻합니다. 그냥 먹기만 해도 몸에 이로운 것이죠. 기본적으로 요리할 때 설탕이나 물엿 대신 조청을 사용하길 권합니다. 멸치볶음을 하면 너무 달지 않고 딱딱해지지 않아서 좋고, 정과를 만들거나 고추장을 담글 때도 조청을 넣으면 좋습니다.
제가 개발한 토마토 조청은 음식에 감칠맛을 더해줍니다. 이탈리아 요리에 토마토가 많이 쓰이는 것은 요리의 풍미를 높여주기 때문인데요, 이 토마토 조청도 같은 원리입니다. 특히 김치찌개에 한 숟가락만 넣어보길 권합니다. 감칠맛이 한껏 올라갈 거에요.
생강 조청은 생선을 조리거나 고기를 양념할 때 넣으면 좋습니다. 생선의 비린내나 고기의 누린내를 잘 잡아주거든요. 도라지 조청은 기관지가 좋지 않을 때 아침마다 한 스푼씩 먹으면 효과가 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도 궁금합니다.
우리네 전통 음식문화를 제대로 계승하고 또 전달하고 싶어요. 한국 고유의 장 문화를 이어가기 위해 바쁜 현대인들도 고추장, 된장, 간장을 간편하게 담그는 방법을 가르치거나, 다문화가정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전통음식 만들기 강의를 진행하는 이유입니다.
또 저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음식디미방>(17세기 중엽의 음식문화, 음식 조리 방법을 알 수 있는, 한글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조리서)과 같은 책을 쓰고 싶어요. 요즘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전통을 잇는 새로운 내용으로 현대인들에게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후대에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