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하게 끓인 한 사발의 북엇국은 술 권하는 사회가 허락하는 면죄부였습니다. 회사 근처에는 자신의 능력 보다 무거운 업무가 주어져 고통 받고 혼란에 빠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낮에는 혹독한 스트레스로 일하다가 밤에는 술독에 빠져 그 긴장을 잊습니다. 술잔에 기대어 밤을 지새웁니다.
이런 날이 하루하루 지나면 어느새 인생은 끊임없이 쳇바퀴를 돌려야 하는 다람쥐라 느껴질까요. 인생은 지옥으로 변해가고요. 유일하게 허락된 탈출구는 회사 앞에 있는 북엇국 집입니다.
이 집은 일년 365일 새벽 7시부터 문을 열기에 밤을 달려 술을 마시더라도 아침에 해장을 하고 일터로 다시 갈 수 있었습니다.
아침의 국사발에서 구원의 빛을 봅니다. 빛을 따라 이끌리듯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 말고도 다른 구도자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뜨끈한 국 한 사발이 우리 앞으로 찾아옵니다. 목젖이 데일 듯 뜨끈한 국물을 들이키면 미움과 불안감이 순간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더군요.
그 자리에는 자애와 연민이 차오릅니다. 옆에 앉아 국물을 들이키는 어르신께 존경심을 느끼며 후배 뻘 청년들에게는 애틋함이 느껴져서 술 권하는 습성에 괜히 물이라도 한잔 따라 권해보고 싶습니다.
인심 좋은 북엇국 집은 두부와 계란이 듬뿍 든 육수를 양껏 리필해 줍니다. 기껏해야 한 두 그릇 먹겠습니까만 이런 호의를 받으면 세상이 생각보다 따뜻하다고 느껴집니다.
북어를 국물과 함께 먹은 기록은 1924년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북어찌개”로 처음 기재되어 있습니다. 북엇국의 역사를 말하기 이전에 “북어”라는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봐야겠네요.
북어는 명태의 다른 이름입니다. 명태란 (明太) 밝고 크게 해 주는 물고기라는 의미입니다. 명태는 그 밖에도 50여 가지의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동해안 북쪽에서 잡힌다 하여 북어(北魚)라 칭했는데 명태와 북어를 동시에 쓰다가 점차 말린 명태라는 의미로 정리되었습니다.
반면 얼리면 동태(凍太), 생으로 먹으면 생태(生太), 아가미에 코챙이를 꽂아 반건조 시킨 것을 코다리, 말리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을 짝태, 말리다가 거멓게 망친 것을 흑태(黑太), 새끼까지 잡아 건조시키니 노가리라 불렀습니다.
매 순간 순간에 그 존재감이 온전해 지기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기에도 아깝지 않은 것이지요. 국민 생선이라 부르는 고등어도 소금을 뿌려 반건조 하기도 하지만 간고등어, 고등어 자반 이라 부를 뿐 별다른 이름을 지어 붙이지는 않습니다. 명태야 말로 한 차원 높은 존재 가치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명태의 변신 가운데서도 화룡정점은 황태입니다. 겨울의 극강의 추위와 바람을 지새우며 마르고 얼고 해동되길 반복하여 노랗게 숙성된 것을 일컫습니다. 본래 껍질이 도톰하고 피하지방이 붙어 있는데 이 또한 얼었단 녹았다를 반복하다가 단백질과 찰싹 붙어 경계가 파괴됩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황태를 언제부터 만들어 먹었을까요. 여기에 남북한 분단의 슬픈 역사가 어리어 있습니다.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던 명태는 함경도에서 북어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6.25전쟁을 겪으며 함경도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고향이 그리운 만큼 고향의 음식이 그리웠습니다. 설원이 펼쳐진 대관령에서 무르팍을 칩니다.드디어 함경도와 비슷한 자연 조건을 찾은 것입니다. 대관령은 평균 해발고도 700m 이상으로 겨울의 절정이 오래가는 곳입니다.
극강의 추위덕택에 이 일대 특히 대관령 아래 횡계리와 진부령 아래 용대리에 거대한 황태 덕장이 만들어 졌습니다. 기온차가 심해서 거는 즉시 얼고 풀리자 마자 다시 어는 이른바 급속냉동 에이징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동해에서 잡아온 명태를 인근 강가에서 깨끗이 씻고 덕장에 횡과 열을 맞추어 걸어둡니다. 혹한의 12월 매달려서 이듬해 4월까지 얼고 녹기를 반복합니다.
두 달 동안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야 하며 얼었다 녹았다를 20회 이상 반복해야 황금빛이 찬란한 황태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추위가 혹독할수록 속살은 더욱 노랗게 되고 감칠맛은 농후해 집니다. 실로 황태는 사람과 자연이 합심을 해야 만들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황태는 구워 먹어도 찜으로 해도 탕으로 끓여도 압도적인 맛입니다. 덕장 인근에서 소비되다가 서울에 중부시장에 함경도 사람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황태는 전국으로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덕장을 운영하는 함경도 사람들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덕장 주인들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황태요리점 내었는데 황태국 하나로 전국의 식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대관령 인근의 황태전문점 에는 예나 지금이나 뜨끈한 국사발을 들이키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럼 “북엇국”이 맞을 까요 “황탯국”이 맞을 까요. 북어는 노랗게 말린 명태 대부분을 칭하며 그 중에 황태는 혹한 속에 얼렸다 풀렸다 반복하여 제대로 숙성된 황금색 북어를 말합니다. 그러니 모든 황태국은 북엇국이라 할 수 있지만 모든 북엇국은 황탯국이라 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북엇국이라 부르는 습관이 붙었습니다. 간혹 “황태북엇국”이라고 하는 식당이 있는데 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곰탕을 한우로 끓였을 때 그 재료의 특별함을 강조해서 “한우곰탕”이라고 부르듯 말입니다.
북어를 지금의 해장국 방식으로 끓여먹는 것은 아주 오랜 일 같지만 따지고 보면 1960년대 후반부터 입니다. 1968년 1월 22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보면 ‘마른 북어를 참기름에 볶아 소금으로 간을 하고 먹는 북어장국에 움파를 넣어 먹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북엇국으로 유명한 노포 (옛이름은 터줏골) 이 1968년에 문을 연 것을 보면 이 집의 역사가 우리가 북어 해장국을 만들어 먹는 역사를 대표한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황태에 참기름으로 육수를 내었는데 살림이 펴고 소고기를 먹게 되면서 사골을 함께 넣어 육수를 만드는 곳들이 생겼습니다.
슬프게도 한동안 명태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는 15만톤까지 잡혀 국민생선이라 불렸으나 1997년에 동해바다에서 어획량이 4500톤으로 감소했습니다. 점점 모습을 감추더니 급기야는 2008년에 어획량 0으로 보고된 바 있습니다.
연안 자망에 한두 마리 포착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요. 2014년에는 정부가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4년간 31만 6천여마리의 치어를 동해안에 방류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2018년 12월에 드디어 고성군에서는 자망 어선 5척이 1,300마리를 낚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제 명태가 돌아온 것입니다. 아직 자연적으로 회귀하는 것인지 아니면 치어가 성장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 유전자 검사에 들어갔으며 어부들에게는 어획량을 조절하고 어린 명태는 다시 방류하는 등의 당부를 보낸 상태입니다. 1년간은 어획을 금지한다는 법령을 올려 승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잡히는 명태는 몸집이 30센티미터 안팎으로 다 자란 명태의 절반 크기 정도이고 치어를 방류한 지역에서만 잡히니 명태가 자연적으로 회귀한 가능성은 희박하니까요. 성장하고 번식하는 속도보다 잡아먹는 속도가 빠르면 다시 명태는 우리 곁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겁니다.
예로부터 ‘맛 좋기는 청어 많이 먹기는 명태’ 라는 말이 전해옵니다. 명태는 어느 순간 우리나라 근해에서 사라지기도 했으나 북엇국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 기억에서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명태가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토록 누구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힘은 떠난 명태 조차 되돌아 오게 합니다. 그러니 누가 나를 떠났다고 하여 인연의 끝이라 여기지 말고 그리워 하고 보고파 할 이유가 이 국 한 사발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