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들어서 한국인의 술이라 하면 사람들은 초록색 병에 담긴 ‘희석식 소주’를 떠올린다. 저렴하면서도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희석식 소주는 한동안 서민의 술이라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다른 분위기가 읽힌다. 가격은 좀 더 비싸지만 맛과 향이 다채로운 증류식 소주가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소주의 고급화를 넘어 세계화를 꿈꾸는 한국의 증류식 소주를 만나본다.
♣ 가볍고 깔끔함 VS 풍미와 강한 개성
퇴근 후 직장인들의 발길을 무겁게 만드는 풍경이 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음식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풍경이 그것. 그 자리에 술이 빠지면 아쉽고, 대표적으로 올라오는 술은 투명한 소주다.
우리가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주(참이슬, 처음처럼 등)는 희석식 소주의 일종이다. 희석식 소주는 연속 증류로 원주의 맛과 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무색무미의 주정(알코올)을 만든 뒤, 이걸 물로 희석하고 감미료를 추가해 만든다.
원재료의 맛과 향이 보존되지 않기에 값싼 재료를 쓰고, 그래서 연속 증류를 해야 사람들이 마실 수 있다. 연속 증류란 원하는 알코올 농도로 희석될 때까지 계속 순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연속 증류를 하면 원재료 고유의 맛은 사라지는 대신, 정제된 원액을 얻을 수 있으며 맛이 가볍고 깨끗하다.
반면 쌀 또는 여러 곡물을 발효해 만들어지는 증류식 소주는 단식 증류로 만들어진다. 단식 증류는 위스키나 브랜디, 고량주 등 고급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연속 증류에 비해 환류가 덜한 대신 누룩, 바나나, 곡물 등 원재료의 다양한 맛과 향을 잘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연속 증류로 만든 술에 비해 덜 정제돼 있으나, 개성이 강한 술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증류식 소주로 알려진 우리의 전통주(화요, 문배술, 안동소주, 일품진로 등)가 단식 증류로 만들어진 술이다.
♣ 역사 속에서 휩쓸려 다닌 증류식 소주의 운명
증류식 소주는 보통 멥쌀 등으로 밑술을 담근 후 이를 증류해 만드는데 밑술은 청주와 탁주가 흔히 쓰인다. 막걸리도 가능하지만, 건더기가 솥에 눌어붙어 탄내가 많아지고 청주보다 수분 함량이 많아 알코올 도수가 떨어지기 때문에 소주의 맛이 떨어진다.
한국인의 주식인 쌀로 빚어 만드는 데다, 쌀로 빚은 밑술을 다시 증류해 만들기에 최종적으로 나오는 양이 아주 적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증류식 소주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 시대에는 식량난을 우려해 소주 빚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자주 시행됐다 한다.
양반들도 작은 잔에 조금씩 따라서 약처럼 조심스럽게 마셨다. ‘약주’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됐다.
근현대에 들어서 증류식 소주는 역사에 휩쓸려 다녔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주세령 도입으로 전통의 증류식 소주는 ‘밀주’로 밀려났다. 이후 증류식 소주는 근대식 주조법을 받아들이며 근대화, 산업화의 길을 걸었으나 원료인 쌀값이 오르고 쌀이 전략물자로 통제되는 게 문제였다.
이 시기 희석식 소주가 떠오르면서 증류식 소주는 경쟁력을 잃었다. 해방 이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쌀의 수급 사정이 나아지지 않고 생산량도 줄어들며 증류식 소주는 몰락의 길을 걸은 반면 희석식 소주가 큰 사랑을 받는 등 희비가 엇갈렸다.
특히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수출용을 제외한 쌀을 사용한 술 제조가 제한되며 희석식 소주는 확고한 대세를 굳혔다.
더 많은 쌀이 사용되는 증류식 소주는 엄격한 규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주류 제조의 규제가 완화됐고, 1990년대 이후 전통주의 발굴과 복원이 본격화되면서 증류식 소주는 다시 주목을 받는 자리에 섰다.
♣ 증류식 소주의 변화 그리고 성장
그렇다고 희석식 소주가 그 자리를 쉽게 내준 것은 아니다. 증류식 소주보다 저렴한 데다 쉽게 구할 수 있어 희석식 소주는 ‘서민의 술’이라 불리며 여전히 많은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다. 증류식 소주는 소수에게 사랑받는 특별한 술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다른 분위기가 읽힌다. MZ세대를 비롯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증류식 소주의 인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다. 본래 증류식 소주가 50대 이상이 주 소비자층이었던 반면, 최근에는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MZ세대는 왜 증류식 소주를 선택하고 있을까. 왜 ‘힙하다’고 생각할까?
물론 대중적인 희석식 소주와 비교하면 시장 규모는 매우 작다. 2020년 기준 한국 소주의 시장 규모는 약 2조 5,000억 원 수준인데 그중 증류식 소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년 성장하며 비중을 높이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2012년경 90억 원 규모에 불과했던 증류식 소주 시장은 2019년에는 380억 원으로 크게 성장했다. 희석식 소주의 출고량이 매년 감소하는 반면 증류식 소주의 출고량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증류식 소주 시장 점유율 1위로 손꼽히는 화요(광주요그룹)는 2015년에 매출 100억 원대를 달성했고, 2021년에는 26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집계됐다. 일품진로(하이트진로) 역시 전년 대비 판매량이 78%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부터 상승세를 탄 증류식 소주는 2016년 열풍이 불면서 판매량이 급증했다. 미식을 즐기는 사람이 늘면서 좋은 음식과 그에 걸맞은 술을 찾는 젊은 소비층이 늘었다는 게 업계의 평이다.
전통주인 증류식 소주는 기존과 다른 재료를 첨가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더불어 타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젊은 세대가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점도 인기의 요인으로 손꼽힌다.
증류식 소주의 온라인 판매가 가능한 점 역시 시장의 성장 요인이다. 원칙적으로 주류는 온라인 판매가 금지했으나, 2017년 7월부터 당시 정부는 전통주 시장 활성화를 위해 온라인 통신판매를 허용했다.
화요, 일품소주 등 대기업이 제조한 증류식 소주가 아닌 지역 특산주 면허, 소규모 주류 제조면허를 가진 양조장의 증류식 소주는 온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다.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증류식 소주 시장에 뛰어드는 업체들도 늘어나고 있다.
막걸리는 발효 과정에서 필요한 인력이 많고 관리가 어려운 반면, 증류식 소주는 저장성이 높고 관리가 수월하다. 이런 조건과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증류식 소주는 이제 ‘대세 중 대세’로 통하고 있다.
♣ 술에도 남다른 콘텐츠가 필요한 시대
특히 가수 박재범이 이끄는 원스피리츠 주식회사에서 내놓은 ‘원소주(Won Soju)’는 이런 증류식 소주의 성장에 불을 붙였다. 원소주는 100% 국내산 쌀을 사용하되 첨가물은 전혀 첨가하지 않았고 강원도 원주 모월과 충북 충주 고헌정 등 국내 양조장과 협업해 만들어진 증류식 소주다.
팝업스토어 예약 방문 신청 서비스에 3,000여 명이 몰렸고, 지난 2월 25일부터 일주일간 운영한 팝업스토어에는 총 3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팝업스토어를 찾은 상당수가 젊은 층으로 생산 물량 2만 병이 일주일 만에 완판됐다.
증류식 소주는 이제 ‘나이 든 분들이 마시는 술’, ‘올드하다’는 감성을 벗어던지고 젊은 옷으로 갈아입고 주류 시장에서 비상 중이다. 공장 지대였던 을지로가 ‘힙지로’가 되고, 소수만 즐기던 국악을 이날치가 <범 내려온다>로 재해석해 인기를 끌었듯, 이제는 우리의 전통주도 새로운 감각으로 받아들여진다.
‘증류식 소주의 대중화’가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셈이다. 이러한 인기는 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덕분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과거 희석식 소주가 시장을 점령했을 무렵, 우리는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시는 시대에 살았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게 자랑이던 때, 사람들과 만나면 술을 마시는 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반면 최근 MZ세대에게 술은 다른 의미로 느껴진다. 이제 젊은 층에게 술은 대화를 이어주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일 뿐이다. 넘치게 마시며 취하기보다,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윤활유 역할로 술을 이용하고 있다.
그렇듯 MZ세대의 술 마시는 문화가 변하면서 단순한 맛을 지닌 희석식 소주보다는 입체적인 맛을 지닌 데다 원료와 양조장에 대한 풍부한 스토리텔링까지 결합한 증류식 소주가 주목받는다. 한 잔을 마시더라도 제대로 된 술, 남다른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담긴 술을 선택하는 시대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