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국물에 쫄깃한 가래떡을 썰어 넣은 떡국 한 그릇. 몸과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줄 새해의 첫 끼니다. 정월 초하루에 우리는 왜 떡국을 먹는 것일까?
♣ 동전처럼 송송 썬 가래떡을 듬뿍
설날, 명망 높은 양반가일수록 그 집안은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집안의 어르신에게 세배를 드리러 온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아들을 낳는다지”, “새해에는 부자가 되었다지”라는 등의 덕담을 주고받은 후에는 정성을 담은 세찬상을 손님에게 대접했다. 세찬상의 주인공은 바로 나, 떡국이다.
왜 새해의 첫 끼니는 떡국으로 시작할까? 1946년 역사학자인 최남선이 조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문답 형식으로 쓴 책인 「조선상식문답」에는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속은 매우 오래됐다’면서 ‘상고시대 이래 신년 제사 때 먹던 음복 음식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음복(饮福)은 ‘복을 먹는다’는 뜻으로, 제사를 마치고 가족들이 제사상에 오른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나는 복에 비견될 정도로 특별했다. 쌀이 귀하던 시절, 환갑잔치나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만 떡을 만들어 먹었고 이런 풍속으로 인해 설날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넣은 국을 만들어 먹게 된 것이다. 가래떡에는 여러 가지 길한 의미들이 담겨있다.
떡국의 흰 떡은 묵은 때를 씻고 흰색과 같이 깨끗해진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긴 가래떡은 재산이 늘어남과 동시에 무병장수하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가래떡을 동그랗게 써는 것을 ‘엽전’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새해에 돈이 잘 들어와 풍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잘 드러났다.
조선후기의 문신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는 ‘멥쌀로 떡을 만들어 치고 비벼 한 가닥으로 만든 다음 굳기를 기다려 가로 자르는데 모양이 돈과 같다’면서 그것을 끓이다가 꿩고기, 후춧가루 등을 넣어 만든다’고 소개했다.
조선 후기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떡국을 ‘백탕(白湯)’ 혹은 ‘병탕(餠湯)’이라 적고 있다.
백탕이라 적은 이유는 겉모양이 희기 때문이고, 병탕의 ‘병’은 떡을 뜻한다. 또 나이를 물을 때 “병탕 몇 사발 먹었느냐”고 묻는 데서 유래하여 ‘첨세병(添歲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 묘사한 시도 있다. ‘천만 번 방아에 쳐 눈처럼 둥그니 / 저 신선 부엌의 금단과도 비슷하네 / 해마다 나이를 더하는 게 미우니 / 서글퍼라, 나는 이제 먹고 싶지 않은걸.’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가 지은 ‘첨세병’의 시구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이 먹는 게 서러운 건 마찬가지인가보다.
나로 인해 생겨난 속담도 있다. 바로 ‘꿩 대신 닭’. 수를 끓일 때 제대로 맛이 나는 꿩고기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신 닭고기를 넣어 떡국을 끓였다는 데서 비롯된 속담이다. 꿩은 잡기 힘들 뿐더러 가격이 높아 닭고기로 국물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떡국
나의 깊은 맛은 국물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로 끓이려면 소의 사골이나 양지머리, 사태 등을 오래 고아서 국물로 사용해야 한다.
양지머리는 건져서 얇게 썰거나 가늘게 뜯어서 양념한 다음 건더기로 얹는다. 떡국의 고명은 집안이나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은 떡이 익을 무렵 달걀을 풀고 구운 김을 뿌린다.
경우에 따라 달걀지단은 채 썰고, 다진 쇠고기는 양념하여 볶아서 한 수저씩 얹은 후 후춧가루를 약간씩 뿌려 내거나, 쇠고기 산적을 지져서 얹기도 한다. 끓여 놓고 오래 놔두면 불어서 맛이 없으므로 먹기 바로 전에 끓여내야 한다.
육수 속에는 긴 가래떡을 썰어 넣는데, 갓 빼온 떡은 척척 들러붙어 썰기에 마땅치 않고, 지나치게 굳으면 썰기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하룻밤 정도 굳힌 다음에 납작납작하게 돈짝처럼 썬다. 가래떡이 많으면 물에 담가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건져 쓰기도 하였다.
지역 별로 만드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다.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은 뜨거운 물로 반죽한 쌀가루를 둥글게 빚어 만든 생떡국을 즐겨 먹었고, 영남이나 전남 해안가에서는 굴이나 매생이를 넣어 만든 떡국을 먹기도 했다. 전라도에서는 닭으로 육수를 내 만든 떡국을 주로 먹었다.
북한 개성의 떡국은 조랭이떡을 넣어 특이하다. 누에고치처럼 생긴 조랭이떡은 가운데 부분이 잘록하다. 누에가 길함을 뜻하기 때문에 누에고치 모양으로 빚었다고도 전해진다. 조랭이 떡국이 고려 후기 때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1940년에 발간된 조리서인 「조선요리학」에서는 ‘가래떡을 어슷어슷 길게 써는 것이 전국적이지만 개성만은 조선개국 초에 고려의 신심(臣心)으로 조선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뜻에서 떡을 비벼서 끝을 틀어 경단 모양으로 잘라내어 생떡국처럼 끓여 먹었다’라고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어떤 재료를 넣었든, 떡 모양이 어떠하든, 내가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음식인 것은 틀림없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진한 육수 맛이 잔뜩 밴 떡을 꼭꼭 씹으며 올 한해도 무탈하길 기원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