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는 단순하다. 여러 가지 채소다.
여러 가지 채소를 한 그릇에 담아내는 음식이 잡채다.
❞잡채는 ‘여러 가지 채소 모둠’이다. 흔히, ‘잡 雜’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잡스럽다’는 여러 가지를 뒤섞어 혼란스럽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정통적이지 않다는, 묘한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잡채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지만, 혼란스럽거나 비정통(?)은 아니다. 잡채는 단순하다. 여러 가지 채소다. 여러 가지 채소를 한 그릇에 담아내는 음식이 잡채다. 흔히 볼 수 있는 삼색나물, 오색나물 등이 잡채다. 혼란스럽거나 비정통이지 않다. ‘여러 가지’는 오히려 긍정적인 뜻이다.
♣ 원형과는 거리가 먼 당면 잡채
요즘 우리가 만나는 잡채는 당면 잡채다. 원형과는 거리가 멀다. 왜곡되었다. 원형 잡채에는 당면 唐麪 이 없었다. 당면은 채소가 아니다. 국수의 일종이다. 잡채와 관련이 없었던 식재료다.
당면은 중국에서 시작된 식재료다. 당면의 ‘당 唐’은 중국 당나라다. 당면은 ‘호면 胡麪 이라고도 부른다. ‘호 胡’ 역시 마찬가지다. ‘호’는 오랑캐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중국은 만주족의 청나라다. 당면, 호면으로 부른 이유다.
‘궁중 잡채’는 코미디다. 당면은 19세기 말, 중국인들과 더불어 한반도에 들어왔다. 중국과의 교류는 늘 있었으나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많이 들어온 것은 임오군란(1882년) 무렵이다. 이 무렵에는 당면이 들어간 음식은 여전히 중식이었다.
1920, 30년대를 넘기면서 평안도, 황해도 일대 등 중국인들 왕래가 잦은 곳에 당면 공장이 생긴다. 가내수공업 수준에서 제법 규모가 큰 당면 대량 생산 공장으로 발전한다. 중식당에서 자가 제조하던 당면을 공장에서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 만주사변 등을 거치며 중국 대륙이 전쟁터가 된다. 중국인들이 상당수 본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의 당면 공장들을 인수, 운영한다. 당면은 널리 유행한다. 평양을 중심으로 많은 양의 당면을 생산한다. 상당수는 일본으로 수출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당면은 한반도에 정착한다.
♣ 채소에 대한 홀대로 발달한 당면 잡채
채소에 대한 홀대도 당면 잡채의 발달을 부추긴다. 이른바 ‘초근목피 草根木皮 를 먹고’라는 표현이다. 초근목피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다.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조선 왕조를 낮춰 부른다. 이왕가 李王家 다. 자신들은 천왕, 천황이고, 조선은 이 씨 왕가다. 탐학한 이왕가의 왕이나 탐관오리 고관대작은 고기를 먹고,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궁중요리’ ‘왕의 밥상’이다. 나물은 먹지 못할 것으로 홀대한다. 우리는 잡채를 귀히 여겼지만, 일본인들은 먹지 못할 풀뿌리, 나무껍질로 낮췄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나물’을 모른다. 채소는 먹지만, 대부분 야채 野菜, 들나물이다. 산채도 먹긴 하지만 한정적이다.
나물 문화는 우리처럼 폭넓고 깊지 않다. 일본은 ‘산채 山菜’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산채 대신 ‘나무루 ナムル’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야채+나무루’다. 나무루는 외래어 ‘나물’을 부르는 일본 가타카나 식 표기다.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인들은 조선 여자아이들의 이른 봄 산나물 채취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너희들은 초근목피로 목숨을 잇고”라는 표현은 일본인들로서는 정확한 설명이었다. 먹을 것도 없는 산에 가서 뭔가 풀을 캐와서 먹는다. 일본인들의 나물에 대한 무지가 한반도에서 나물을 낮춰보는 계기가 되었다.
♣ 잡채의 정확한 모습은 “음식디미방”에 남아 있다.
나물 모둠, 잡채의 정확한 모습은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에 남아 있다.
“오이채, 무, 댓무, 참버섯, 석이, 표고, 송이버섯, 숙주나물 등은 생으로, 도라지, 거여목,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승검초, 동아, 가지와 꿩고기는 삶아서 찢는다.”
몇몇 나물을 더해서 나물만 스무 가지를 넘긴다. 가히 나물 천국이다. 잡채는 나물 천국이다. 안동 장씨 할머니 장계향은, “이런 나물들을 사용하되 반드시 이 나물을 쓰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나물 종류를 열어두었다. 한식의 특질이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쓰고 식성에 따라, 형편에 따라,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라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더 하고 빼는 것은 음식 만지는 이의 몫이다.
제사 음식은 최고의 밥상이다. 제사에는 생채 生菜, 숙채 熟菜, 초채 醋菜 를 모두 사용했다. 제사에서는 흔히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무나물, 시금치 등을 내놓는다.
따로 그릇에 챙기기도 하지만 하나의 그릇에 이 모든 나물을 모으기도 한다. 한 쟁반에 여러 나물을 두니 결국 여러 가지 채소 모둠, 즉, 잡채다. 잡채를 넣고, 간장을 조금 더해서 비비면 나물비빔밥, 간장나물비빔밥이 된다. 나물과 잡채, 나물비빔밥은 동전의 앞, 뒷면이다.
♣ 잡채는 단순히 한식의 한 종류가 아니다.
이 귀한 음식이 당면 잡채로 일그러진 것은 안타깝다. 잡채는 단순히 한식의 한 종류가 아니다. 나물을 넓고 깊게 사용하는 한식의 특질과 닿아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송당 조준(1346~1405년)의 시가 남아 있다. ‘송당집 제1권’ “장단 유 선생이 시와 산채를 보내와 운을 빌려 감사하다”의 일부다.
고운 봄빛 광주리에 가득 차 있고
모락모락 아지랑이 아른거리네
지난밤 장단(長湍)에 비 내렸는지
멀리서도 녹음 덮인 그대 집을 알겠구나
❞한양도성과 개성 사이에 장단이 있다. 장단 사는 유 선생 長湍 兪先生 이 송당 조준에게 봄나물과 더불어 시를 선물로 보냈다. 유 선생이라고 불렀음은 그가 벼슬아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당은 당대의 실권자다. 삼봉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 경제의 기틀을 짠 고위 관료다. 벼슬도 좌정승 左政丞, 영의정부사 領議政府事 로 높았다. 가서 만나고 싶지만 가지 못한다. “멀리서도 녹음 덮인 그대 집을 알겠구나”라고 읊었다. 그리움과 아쉬움이다.
우리는 나물을 귀하게 여겼다. 조선 시대 반가에서는 봄철이면 오신반 五辛盤, 오신채 五辛菜 선물로 주고받았다. 이른 봄 겨울을 헤치고 나온 햇나물을 옆집과 나눠 먹는 풍속이다.
오신채는 ‘매운맛의 다섯 가지 나물’이다. 향이 강하고 맵다고 오훈채 五葷菜 라고도 불렀다. 움파, 산갓, 당귀싹, 미나리싹, 무싹 등이다.
다섯 가지 나물을 쟁반에 얹으면 곧 ‘잡채’다. 잡채는 보기 드문 우리 고유의 음식이고, 한식의 특질이다. 잡채의 주인공은 산나물, 들나물이다. 당면이 아니다. 잡채는, 초근목피가 아니다. 고위 관료들이 선물로 주고받을 정도의, 품위를 지닌 식재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