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쥐똥고추 (프릭 키 누 수안)
저는 몇 해 전 태국을 여행하며 이 무섭도록 매운 고추를 처음 접했습니다. 방콕의 왕궁을 구경하고, 짜오프라야강 바로 건너편의 로컬 시장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때 맛본 똠얌꿍의 맛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매콤한 쥐똥고추가 들어가 생동감이 느껴졌어요.
그 똠얌꿍은 풍미로 가득 차 있고, 맵고, 신선하고, 새콤했으며, 저를 순식간에 매료시켰습니다. 저는 완전히 태국 음식에 빠져들었고, 이 고추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태국 요리의 맛을 다양한 방법으로 끌어올리는 식재료를 꼽는다면, 바로 이 쥐똥고추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쥐똥고추는 무궁무진한 방식으로 요리에 사용할 수 있죠. 태국식 파파야 샐러드인 솜땀의 맛을 끌어올리거나, 오리를 넣은 태국식 레드커리에 깊이와 구조감을 더하는 재료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 강렬하고 인상적인 고추는 달콤한 맛을 더한 각종 향신료와 어우러져 국수 한 그릇의 풍미를 천상의 맛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습니다. 일단 여러분도 이 고추의 매력에 중독되면, 이 훌륭한 재료가 요리를 얼마나 뛰어나게 만들 수 있는지 놀랄 것입니다
♣ 게
누군가는 보석 가게의 쇼윈도 앞에 서서 디자이너의 값비싼 시계를 바라보겠지만, 저는 생선 가게 앞에서 몇 시간이고 구경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것은 새우나 랍스터, 도버 해협의 서대기와 같은 생선도 아닌, 바로 ‘게’입니다.
저는 바다 근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자랐습니다. 이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하게 생긴 생물이 식탁의 도마 위에 자랑스레 놓여 곧 뜨거운 냄비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흔한 일이었죠.
저의 아버지가 게 마니아라고 할 정도로 게를 너무 좋아하셨기에 저도 소프트 셸 크랩, 머드 크랩, 스노우 크랩, 블루 크랩, 킹크랩, 브라운 크랩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게 종류를 먹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제가 열두 살 무렵, 생선가게에서 게 껍데기를 벗겨 살을 발라내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주인은 업무가 끝날 무렵 와서 테이블이 깨진 게 껍데기로 쌓인 것을 보고, 제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대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다가, 결국 게살의 양이 너무 적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굴을 찡그리곤 했습니다. 저는 이 달콤한 게살을 집어먹는 것을 멈출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했으니, 더 이상 일을 받을 수 없었죠.
그리고 제가 어떻게 게를 좋아하게 되었냐고요? 갓 쪄내 따뜻한 게살을 감자와 마요네즈를 섞어 구워낸 미국 동부의 요리, 크랩 케이크는 기쁨 그 자체죠. (전 아직도 몇 년 전 메릴랜드의 체서피크 만에서 맛본 크랩 케이크를 기억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잘 익은 아보카도와 신선한 자몽, 그리고 흰 게살은 “삼위일체”라는 거창한 표현이 어울릴 만큼 환상적인 조합이라, 이 음식을 이길 요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습니다.
♣ 파스닙
로마인들은 파스닙이 원기를 북돋운다고 믿었고, 중국인들은 이것을 약재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동안에는 파스닙이 케이크에 들어가는 설탕을 대체하기도 하고, 목사가 마실 술을 빚는 재료로도 사용되었죠.
하지만 이 식재료에 대한 사랑은 제가 어린 시절 직접 정원에서 농작물을 길러 보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파스닙은 땅에서 꽤 잘 자랐습니다. 저는 이것이 마마이트(*빵에 발라 먹는 효모 잼으로,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음식의 대명사)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아주 좋아하거나 정말 싫어하거나 둘 중 하나죠. 하지만 설탕 당근으로도 불리는 파스닙의 달콤함은 저를 늘 매료시켰습니다. 셀러리악 같은 다른 뿌리채소는 파스닙보다 대체로 좀 더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파스닙이야말로 무궁무진하게 활용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식재료입니다.
구워 먹거나, 겉면을 토스트 하거나, 찌거나, 퓌레로 만들거나, 볶거나, 으깨 먹는 모든 방법이 어울리죠. 신선한 잎채소들과 함께 어우러지면 채소 요리의 구조감을 만들어내고, 주스의 재료로도 쓰임이 좋습니다.
수프에 넣으면 편안하고 따뜻한 맛이 좋고, 질감을 부드럽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식전주 한 잔과 함께 곁들이는 파스닙 칩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 뿐 아니라 파스닙은 구운 사슴고기와 궁합이 좋고, 캐서롤(*냄비에 오랜 시간 익혀 만드는 찜 요리)이나 파이와도 멋진 어울림을 보여줍니다. 또 파스닙이 없는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는 상상할 수 없죠!
♣ 고등어
고등어에 대한 저의 첫 기억은 어렸을 때 스코틀랜드 서해안에서 가족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낚시를 하던 장면이에요. 그물을 걷어 올리면 배의 갑판이 반짝반짝 빛나며 펄떡거리는 물고기로 뒤덮였고, 모두가 미소를 지었죠. 고등어는 여전히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입니다.
요리하기 쉽고 건강에 좋으니까요. 석탄불에 구운 고등어를 따뜻한 감자 샐러드와 곁들여 내면 간단하지만 맛있는 식사가 됩니다. 고등어는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재료입니다. 훈제하거나 절이고, 향신료에 숙성하거나 당연히 구워 먹을 수도 있죠.
훈제 고등어로 만든 파테(*간이나 자투리 고기, 생선 살 등을 갈아 ‘파테(Pâté)’라는 밀가루 반죽을 입혀 오븐에 구워낸 정통 프랑스 요리)를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특히 영국 출신의 네이선 아웃로(Nathan Outlaw) 셰프나 톰 케리지(Tom Kerridge) 셰프의 고등어 파테 레시피를 따르면 아주 맛있습니다. 톰 케리지 셰프의 레시피는 비트 소스가 들어간 것이 특징이고요.
한편 고등어 초밥도 훌륭합니다. 세계 어느 지역의 스시 레스토랑을 가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스시는 고등어를 올린 것입니다. 고등어의 기름진 풍미가 식초를 넣어 새콤한 쌀과 멋지게 어울리죠.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고등어와 상반되는 맛의 식재료를 함께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데, 호스래디쉬와 엘더베리꽃을 넣거나 루바브 또는 구즈베리의 산미를 첨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고등어 피클의 형태로 절인 뒤 스뫼레브뢰드(*덴마크식 오픈 샌드위치 호밀빵에 버터를 바르고 절인 생선을 얹은 요리)로 먹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고등어는 인도와 아시아 각지의 향신료와도 훌륭하게 어우러집니다. 저는 휴일에 스페인을 가로지르며 운전을 할 때도, 차 트렁크에는 언제든지 신선한 빵 위에 올려 먹을 수 있는 고등어 통조림을 갖춰 둘 정도죠.
♣ 돼지고기
이른 아침 할아버지의 정원에서 따온 채소로 담근 아삭하고 신선한 피클부터 겉면을 바삭하고 노릇노릇하게 익힌 커다란 돼지고기구이와 달콤한 사과 소스까지 – 어린 시절, 가족이 둘러앉아 먹었던 돼지 바비큐 요리는 늘 훌륭했죠. 이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자란 제가 이제는 아이들을 위해 직접 요리합니다.
저는 무궁무진한 요리로 변신하는 돼지고기를 특히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소시지와 베이컨은 물론, 이탈리아의 프로슈토와 스페인의 하몽, 살라미와 각종 햄을 비롯한 다양한 염장 요리와 지역 특산물까지… 돼지고기에서 끌어낼 수 있는 풍미는 무궁무진합니다.
한편 돼지는 품종도 다양하고, 잘 알려져 있죠. 세계에서 식용으로 사육되는 돼지 품종은 1,000여 가지에 달하는데 모두 개성이 있습니다.
돼지고기 살코기로 만든 스테이크도 훌륭하지만 뼈와 함께 투박하게 구운 스타일도 매력이 있고, 삼겹살 부위나 오랜 시간 서서히 익혀 결대로 찢은 풀드포크(Pulled Pork)도 환상적입니다.
북유럽 국가에서는 집이나 농장에서 직접 기른 돼지로 훌륭한 요리를 만들고, 아시아 국가를 여행할 때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광둥식 차슈 요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이컨 샌드위치를 생각하니, 이 소탈하지만 믿을 수 없이 맛있는 음식을 이길 요리는 없을 것 같네요.
♣ 사과
어렸을 때, 부모님 정원에 오래된 사과나무가 있었어요. 제 키보다 훌쩍 커서 항상 올려다보아야 했던 그 사과나무에는 매년 가을이면 사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열리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사과가 들어간 온갖 요리를 만드시곤 했어요.
‘브라운 베티’라는 전통적인 미국 가정식 디저트, 시나몬을 듬뿍 넣은 사과 파이, 사과 건포도 빵은 물론이고 내키시면 달콤하고 바삭한 사과 파이에 크림을 듬뿍 올린 독일식 디저트 ‘사과 슈트루델’까지 만들어 주셨죠.
디저트뿐 아니라 사과로 식사가 될 만한 요리도 해 주셨어요. 양파와 사과 소스를 곁들인 돼지고기도 해 주셨고, 사과와 소시지를 다져 넣은 고기 파이까지요. (사실 이 고기 파이만큼은 그렇게 맛있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사과가 들어간 요리가 별로라고 느꼈으니까요.)
이렇게 많은 사과 요리를 먹다 보면 질릴 만도 하지만 저는 신기하게도 오히려 사과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이웃집 사과 맛은 어떨지 궁금해 담을 넘어갈 정도였다고 할까요? 사과 서리를 하던 꼬마는 이제 사과로 빚은 술까지 좋아하게 되었으니, 제게 사과가 펼치는 맛의 세계는 훨씬 더 흥미로워진 셈입니다.
요즘에는 타탱(Tatin), 소베, 수플레와 같은 프랑스식 사과 요리가 저를 흥분시킵니다. 그리고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사과주인 칼바도스나 제 고향인 캘리포니아 포노마의 사과 브랜디도 마시는데, 이렇게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사과로 만든 무언가를 즐기고 있죠. 하지만 어떤 것도 저희 엄마의 사과 파이를 이길 수 없을 거예요.
♣ 장어
뱀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면 물속에서 장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장어를 먹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는 항상 훈제 장어를 주문해요. 심지어 런던의 레스토랑에서는 젤리 형태로 요리한 장어를 좋아하죠. (메뉴에 있다면, 늘 시키는 편입니다.) 하지만 일본이야말로 장어 요리를 떠올릴 때 언제나 제가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지역입니다.
민물장어야말로 제가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기 전부터 제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식재료입니다. 일본식으로 민물장어를 굽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과정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많은 일본 요리 기술과 마찬가지로 보통 수년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일본식 장어덮밥은 반을 갈라 펼친 장어를 달콤한 타레 양념으로 붓질한 뒤 구워 요리됩니다. 이 양념의 레시피는 보통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철저한 비밀에 가깝죠.
그 장어 자체로도 정말 맛있지만, 옻칠한 일본식 상자에 고슬고슬한 밥을 담고 그 위에 잘 구운 장어를 올려 한 그릇의 요리로 완성해 내면 천상의 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 지구가 멸망하는 날, 제가 마지막으로 꼭 먹고 싶은 음식을 묻는다면 바로 이 음식을 이야기할 겁니다.
물론 양념구이뿐 아니라 소금구이도 훌륭합니다. 일본에서 ‘우나기’라고 불리는 민물장어와 ‘아나고’라고 불리는 바닷장어 모두 초밥 형태로 먹으면 아주 맛있고요. 장어의 뼈도 빼놓을 수 없는데, 기름에 튀긴 장어 뼈 또한 맛있는 스낵으로 즐길 수 있어 그 매력이 무궁무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