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가루나 밀가루를 반죽하여 소를 넣고 빚어서 삶거나 찐 음식. 중국에서 전래된 음식으로 보기도 하나 전래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사』 충혜 왕조에 내주(內廚)에 들어가서 만두를 훔쳐 먹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이미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이미 자생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는 음식이다.
만두는 원래 중국음식으로 송나라의 ‘사물의 기원’에 그 유래가 적혀 있다.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노수라는 강가에서 심한 파도와 바람으로 그 진군을 잠시 멈추게 되었다.
사람들은 노수에는 황신이라는 신이 사는데 그 신이 노한 것이라며, 49개의 사람의 목을 베어 노수강에 던지라고 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한낱 일시적인 자연현상으로 억울한 생명들이 죽어간다고 판단,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모양을 만들고 그 안을 소와 양의 고기로 채워 황신에게 제물로 바치면서 제문을 읽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사람들에게 앞으로도 사람의 머리대신에 이렇게 음식을 만들어 바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얼마 후, 노수는 잠잠해졌는데 남만인들은 제갈량이 바친 음식 때문에 잠잠해진 것으로 생각하여 ‘기만하기위한 머리’라는 만두(饅頭)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는 '남만의 머리'라는 의미로 만두라 했다고도 한다. 이때 빚은 사람 머리 모양의 만두가 남만에서부터 북방으로 전해져 오늘날 중국의 대표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신을 기만하는 음식이었던 만두는 그러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에 군소리 없이 이삭을 죽이려 하던 아브라함이나 아예 칼을 들고 바다의 못된 용을 죽이러 떠나는 서구의 신화와 그 차원이 다르다.
역시 제갈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는 세기의 천재답게 그 시절 벌써 제의의 상징성에 주목, 실재를 상징으로 대치할 줄 아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어쩌면 황신은 만두를 사람 머리로 알고 속아서 노여움을 풀었던 것이 아니라 만두가 맛있었기 때문에 더 제동을 걸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제갈공명에 관련된 만두의 어원을 생각하고 먹다 보면 사람의 머리를 먹고 있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고려사』에 기록된 만두는 어느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고려가요인 〈쌍화점 雙花店〉에 나오는 ‘쌍화’는 밀가루를 발효시켜 소를 넣고 찐 음식이다. 조리법이 중국의 만두와 비슷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만두가 그 명칭이 바뀌어 ‘쌍화’라는 이름으로 수입된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보이는 만두는 주로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소를 싸서 삶아낸 것으로 교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두는 껍질의 재료와 소의 재료, 조리법 및 빚는 모양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만두껍질의 재료에 따라서는 밀만두·어만두·메밀만두가 있고, 소의 재료에 따라서는 호박만두·고기만두·버섯만두·김치만두 등이 있다. 만두를 빚어서 더운 장국에 넣고 끓인 것은 만둣국, 쪄서 국물이 없이 먹는 것은 찐만두, 차게 식힌 장국에 넣은 것은 편수라 한다.
빚는 모양에 따라서는 세모모양으로 빚은 변씨만두, 해삼모양으로 빚은 규아상 등이 있다. 또한 작은 만두 여러 개를 싸서 만든 대만두가 있다.
만두는 잔치상이나 젯상의 음식으로 쓰이거나 겨울철의 시절 식으로 애용되었다. 중국의 산둥(山東)지방을 통하여 수입되었고, 메밀이나 밀이 북쪽지방에서 많이 재배되었으므로 평안도나 함경도지방에서 발달하였다. 궁중이나 양반층에서는 어만두나 규아상과 같이 고급의 재료가 쓰였으며, 만드는 법이 무척 까다로웠다. 개성지방의 편수는 지금도 향토음식으로 유명하다.
♣ 開城의 편수 『秦學圃』
먹어본 일이 업는 사람에게 紙面으로 그 음식맛을 소개한다는 것은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 엇던 景致를 소개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고 漠然한 일일 것이다. 편수도 편수나름이지 그 맛이 다갓다고야 할 수 업슬 것이다. 그 맛의 好否를 作定하는 것은 말할 것 더 업시 그 속(편수 속)의 재료에 잇는 것이다. 開城편수 중에도 貧寒한 집에서 아모리케나 만드러서 편수 먹는다는 기분만 맛보는 것갓흔 그런 편수는 서울 鍾路通 음식점에서 一金二十錢에 큰 대졉으로〈66〉 하나식 주는 만두맛만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기라고는 거이업고, 숙주와 두부의 混合物에 지나지 안키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남들이 일커러주는 開城편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편수속)의 主成物은 牛肉 豚肉 鷄肉 생굴 잣 버섯 숙주나물 두부 그외의 약념 등 이러케 여러가지 종류이다.
이것들을 적당한 분량식 배합하야 늣퇴 맛잇는 것을 만들랴면 적어도 숙주와 두부의 합친 분량이 전체분량의 3分1을 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으로 정말 맛잇다는 開城편수는 그리 廉價로 어더지는 것이 아니다. 上記의 여러가지 물건이 開城婦人네의 특수한 調味法으로 잘 조미되여 똑 알맛게 익어서 그것이 우리들 입속으로 드러갈 때 그 맛이 과연 엇더할가. 세가지 고기맛 굴과 잣맛 숙주와 두부맛들이 따로따로 나는 것이 아니요 그 여러가지가 잘 조화되여서 그 여러가지 맛 중에서 조흔 부분만이 한데 합처저서 새로운 맛을 일우어서 우리 목구멍으로 녹아 넘어가는 것이니 그 새로운 조화된 맛 그것이 開城편수 맛이다. 開城의 유명한 松筍酒 한잔을 마시고 일홈잇는 보쌈김치와 함게 이러케 잘 조화된 편수의 한개를 뀌뜨릴 때 나갓흔 食道樂의 味覺은 不知境에 이몸을 恍惚境으로 잇끄러가는 것이다.
보통 우리나라 만두의 기원을 이야기하면서 유명한 고려 속요 ‘쌍화점’을 들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위구르인이 고려에 들어와 상화가게를 열고 있었고 이를 고려 사람들이 즐겨 먹었던 것이다.
찐빵과 만두 사이를 넘나들며 논쟁을 불러일으킨 쌍화점의 가사를 풀이하자면, “어떤 여인이 만두가게에 만두를 사러 갔는데, 만두가게 주인인 몽골 인이 자기 손목을 잡더라. 이 소문이 밖에 나돌면 가게의 꼬마 심부름꾼 네가 퍼뜨린 것으로 알겠다.
소문이 나면 다른 여인들도 자러 그 자리에 가겠다 할 게 아니냐. 거기 잔 곳은 참으로 아늑하고 무성한 곳이다”라는 뜻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직접투자는 1279년 고려 충렬왕 때 개성에서 만두가게를 열었던 몽골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재미있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아무튼 『고려사』 충혜왕조 편에 왕궁의 주방에 들어가서 만두를 훔쳐 먹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위 쌍화점의 가사처럼 개경에 만두가게가 존재하였던 사실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이미 만두가 전래되어 왕이나 서민 모두 즐겨 먹은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 만두란 말이 나온 것은 ‘영접도감의궤’(1643년)인데,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고, 그 후에는 궁중의 잔치에도 종종 차렸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고기나 채소로 만든 소를 넣고 찐 것을 만두라 하고, 밀가루로 만든 얇은 껍질에 소를 싸서 끓이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찐 것은 교자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만두는 터키·몽골의 만두와 함께 교자에 가깝다.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에 있는 우랄알타이계의 터키·몽골·한국의 만두가 모두 비슷하고 중국만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만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중엽까지도 만두는 상화(霜花, 床花)로, 교자는 만두로 명칭이 바뀌어 전해져 오다가 지금은 상화라는 음식은 사라지고 교자만이 만두라는 명칭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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