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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젓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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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2. 젓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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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젓갈의 기원

젓갈은 어패류에 소금을 가(加)하여 염장(염장)하므로서 부패균의 번식을 억제하고 자가소화효소(自家消化薛素)또는 미생물의 효소작용(효소작用)에 의해 육질을 분해시킨 우리나라 전통의 발효식품(발효食品)으로 제조공정이 단순하고 숙성후의 제품은 독특한 감칠맛을 가지고 있어 옛부터오늘에 이르기까지 밥반찬이나 김치의 조미소재로 많이 이용하여 왔다.

대부분의 발효식품이 그러하듯 젓갈류의 기원(기源)도 정확히 밝힐수는 없으나 각종 고문헌(古文獻)및 사료(史科)에 의한 간접적인 기원의 추정노력은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 들어 부분적 결실이 맺어지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젓갈류의 기원 및 발달사에 관한 각종 선행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젓갈의 의미로 추정 되는 최초의 문헌적 언급은 고대 중국의 사료(史料)에서 찾을 수 있다고한다.

즉, B.C 3-5세기경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된 이아(이雅)라는 중국의 고사전에 지(지)자가 출현하는데 이는 “생선으로 만든 젓갈”의 의미로 해석되며, 또한 기원전 3세기경에 쓰여진 주례(周禮)에도 오늘날 젓갈의 의미로 해석되는 해(해), 자(자), 지(지) 등의 문자가 발견 되어 동시대에 이미 젓갈을 식용하였음을 알수 있고, 이외에도 A.D 530-550년 사이에 중국의 산동성 太守 賈思鞠가 지은 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농업종합서에 몇몇 젓갈의 제법 및 계절에 따른 숙성기간까지 명시되어 있어 동시대에 젓갈이 널리 식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우리나라에서의 젓갈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인 “三國史記”중에 신라의 궁중의례 음식으로서 해(해, 오늘날의 젓갈)를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 시대에 젓갈이 주요 식품으로서 식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그 이전에도 우리나라 민족이 젓갈류를 식용하고 있었음은 “齊民要術”의 기록에 의해서도 알수 있는데 그 내용은 漢나라의 武帝가 東제를 쫓아서 산동반도에 이르니 생선의 내장으로 만든 어장(魚腸)젓갈을 발견하였다고 하는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케 한다.

또한 고려시대의 문헌에는 젓갈류의 식용배경이 정사(正史), 의서류(醫書類) 및 문집 등에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젓갈의 종류도 담수어, 해수어 뿐만 아니라 홍합, 전복 등의 패류와 새우류, 게류등의 갑각류까지 그 이용범위가 넓어졌으며, 젓갈의 제법도 다양해져 이때부터는물고기에 소금과 곡류를 혼합하여 유산발효(乳산발효)시킨 식해류를 식용하고 있었음을 향약구급방(향약구급방, 1236-1251)을 통해서 알수 있다.

조선시대에 접어 들면서 젓갈과 관련된 자료들은 관선문헌(관선문헌) 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인에 의해 쓰여진 각종 일기류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이때에 젓갈류가 언급된 주요 자료들로는 오례찬실도(오례찬실도, 연대미상),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 등의 관선문헌이 있고, 민선문헌으로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居巖日記, 1567-1577)와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鎖尾錄, 1591-1601) 등을 들수 있는데, 조선시대의 수산발효식품의 식용배경을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라 할수 있겠다.

조선시대의 젓갈 제조기술은 식염만을 침장원(沈藏源)으로 하는 지염해(지염해)를 주종으로 하였으나 동시에 일부 식해류(食해類)도 있었으며, 또한 젓갈의 액체만을 분리한 액젓을 조미소재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쇄미록(鎖尾錄), 중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齊, 1766)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들 기록중에는 굴젓의 액즙만을 달여 굴젓국을 제조하고, 이를 청장(淸醬)으로 대용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간장의 식용이 조선시대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음올 알수 있다.

이와 같은 우리나라 젓갈류의 시대적 발전 역사에 대하여 장지현(張智鉉) 박사는 “韓國傅來酸薛食品史硏究”에서 우리나라 해류식품(해類食品)의 식용 기원은 문헌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이나 실질적인 식용 기원은 이보다 앞설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서는고려사(高麗史), 고려도경(高麗圖經), 향약구급방(향약구급방) 등의 자료를 통해서 해류식품(해類食品)의 구체적인 식용사례가 문헌적으로 들어나기 시작하고, 이들 해류식품(해類食品)은 국가 의례음식(國家豊飮食), 왕선음식(王膳飮食), 또한 공사간(公私間)의 연회음식으로 상용되는 등 식용범위가 비교적 보편화 되고,그 종류 또한 매우 다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실록(世宗實錄, 1419-1449), 오례찬실도(오례찬설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미암일기(居巖日記) 등의 문헌들을 예를 들면서 이들 속에 수록된 자료들은 식용 배경뿐만 아니라 종류와 침장법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하고 어류해, 갑각류해, 패류해 외에도 어란해(魚卵해), 복장해(腹藏해) 나아가 이들을 혼합한 혼장해(混藏해) 등의 새로운 해류식품(해類食品)이 등장한다고 하였다.

조선조 중기에는 도문대작(層門대작, 1611), 사시찬요초(사시찬요초, 연대미상), 산림경제(山材經齊, 1715) 등의 자료를 정리한 바 해류식품(해類食品)의 종류는 물론 그 침장법(침장법)에 있어서도 보다 구체적인 배경이 나타나게 되고,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術文長襄散稿, 1850년경), 규합총서(聞閱療書, 1815), 임원십육지(林園十穴志, 1827)등을 토대로 보다 구체적인 종류와 특히 조선조 중기까지 식해류(食해類)의 대상으로 오르지 않았던 연체동물의 식해류가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식해류에 관하여서는 이성우(李盛雨)박사는“아시아속의 한국 어장 문화에 관한 연구”에서 식해는 물고기와 소금과 밥을 더하여 유산발효시킨 것으로 동북타이, 라오스가 주 원산지이고,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임원십육지(임원십육지)에서 “鮮”자는 米鹽으로 어육을 발효시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재물보(才物譜, 1807)에서는 “자는 식해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나 실제로 “식해”란말은 미암일기(居巖日記)에 비로소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주방문(酒方文, 1600대말), 요록(要錄, 1680년경), 역주방문(層酒方文, 1700년대), 음식보(1700년 대), 증보산림경제(증보산림경제) 등에 각종 식해류가 자세히 소개 되고 있는데, 이러한 식해류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동해안지역에서 다양한 어종을 원료로 하여 제조 식용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일부 어종의 식해류가 제조 식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젓갈류는 대부분 가정규모로 제조되어 요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조선말기에 접어들면서는 해류식품(해類食品)의 공급체제에 많은 변화가 뒤따르기 시작하여 점차 대량생산 체제로 전환되었고, 해(해)의 종류도 대량공급이 가능한 품목이 주류를 이루어 해류(해類, 젓갈류)의 식용구조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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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진흥청 •aT농수산식품유통공사 •더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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