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문화의 전성기, 고려시대
○ 고려시대에는 불교문화의 융성과 함께 차 문화도 정점에 달함
- 고려에서는 사찰에서 차밭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차와 불교는 깊은 연관을 맺게 됨
- 국가의 의례용으로 차를 사용하며 왕이 차를 하사품으로 내릴 정도로 귀한 물품으로 인정받음
○ 조상들에 올리는 제례를 ‘차례(茶禮)’라고 한 것도 고려시대에 차를 올리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함
-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이 생긴 것도 고려시대 무렵으로 밥처럼 매일 차를 마시던 데서 기인함
< 10세기에서 12세기 무렵의 고려청자 다기 >
* 출처: 문화재청, 인천도시공사
○ 귀족층에 차 문화가 폭넓게 퍼지며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 졌고 이후 점차 대중화되면서 다구(茶具)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
- 당시에 찻집도 있었고 차를 담아 다니면서 마시는 휴대용 용기도 발달할 정도였으며 차 문화와 함께 고려청자가 발전함
지금과 같은 형태의 차를 마시기 시작한 고려시대
▷ 현재와 같은 모양의 잎차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
- 고려 초기만 해도 일본처럼 말차(가루녹차)를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나, 보관이 까다롭고 변질이 잘되어 점차 말차가 사라지면서 잎차가 대중화됨
□ 차 문화의 명맥을 유지한 조선시대
○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차밭을 관리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를 억압하면서 차밭의 관리가 부실해짐
- 조선시대 초·중기 무렵에 전국적으로 기온이 떨어지는 일이 잦아지면서 아열대 작물인 차 생산량에 타격을 입음
○ 임진왜란 이후에는 차에 대해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하여 양반들도 차를 마시기 힘들어짐
- 조선의 차 문화는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정약용과 초의선사 등 걸출한 인물의 등장으로 다례문화가 명맥을 유지함
차를 사랑해 호를 ‘다산’이라 한 선비
▷ 정약용이 머무는 집의 뒷산 이름이 다산
- 정약용에 관한 기록에는 차 욕심을 내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며,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차를 마쳤다는 정약용의 경험담이 시로 남아 전해짐
○ 조선시대에 이르러 차 문화가 잠시 쇠퇴했으나, 19세기 이후에 차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남
- 조선시대 이목선생의 다부(茶賦), 초의선사의 다신전(茶神傳), 동다송(東茶頌) 등 차 전문 서적에서 차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음
조선의 차 문화의 거두 이목선생과 초의선사
▷ 한국다도의 중흥을 가져온 한재 이목선생과 다성(茶聖)이라 불린 초의선사는 지금까지도 차 문화를 이끌어온 인물로 추앙 받음
- 이목선생은 1,300여 자로 구성된 <다부(茶賦)>를 저술했는데, 이 책에는 차에 대한 예찬, 명차의 종류와 주요 생산지 등을 기록하여 당시의 차 생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게 함
-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에게 차 문화를 보급했던 초의선사는, 1828년 지리산에 은거하며 차 전문 서적인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했는데, ‘차 우리는 법, 차 마시는 법’ 등당시의 다도법을 세세하게 기록해 놓아, 현재까지도 조선시대의 우수한 차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