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 강진 유적지
강진은 차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져온 곳으로 차 문화의 유적지가 곳곳에 있다.
1) 월출산 월남사지
월남사지(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는 월남사가 있던 곳이다.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위치한 절이다. 연혁에 대한 자세한 문헌이 없어 창건과 폐사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다.
고려의 중 진각(眞覺)이 처음 세웠으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비문이 있다(月南寺在月出山南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라는 내용이 있다. 현재 절터에는 월남사지삼층석탑(月南寺址三層石塔, 보물 제298호)과 월남사지진각국사비(月南寺址眞覺國師碑, 보물 제313호)가 있다.
이 비의 비문은 심하게 마멸돼 판독이 불가능하나 말미에 고려 때 무신정권의 중심인물이었던 최항(崔沆, 1209-1257)등 권신의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서 2012년~2014년 까지 3차에 걸친 발굴 조사로 월남사는 고려시대 창건 이전의 백제시대 때부터 사찰이 비롯되었고, 고려시대에는 4차에 걸친 중수 또는 보수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제1차 발굴조사에서 돌로 만든 차맷돌(茶磨)이 출토되어 당시 사찰에서 차를 직접 만들어 마셨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차맷돌이 절터에서 직접 출토된 사례는 강화도 선원사지(禪源寺址)와 이 월남사지 밖에 없어 우리나라 고려 차문화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평가되고 있다.
진각국사비문을 지은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다음과 같은 「차(茶) 가는 맷돌을 준 사람에게 사례하다(謝人贈茶磨)」라는 시에 나오는 차 맷돌이 고려시대 차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돌 쪼아 바퀴 하나 이뤘으니 琢石作孤輪
돌리는 덴 한 팔을 쓰누나 廻旋煩一臂
자네도 차를 마시면서 子豈不茗飮
왜 나에게 보내주었나 投向草堂裏
특히 내가 잠 즐기는 걸 알아 知我偏嗜眠
이것을 나에게 부친 거야 所以見寄耳
갈수록 푸른 향기 나오니 硏出綠香塵
그대 뜻 더욱 고맙네 그려 益感吾子意
2) 만덕산 백련사
백련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에 있으며 만덕사(萬德寺,萬德社) 또는 만불사(萬佛寺)라 부르기도 하였다. 백련사는 839년(문성왕)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1211년(희종) 원묘국사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하였다.
원묘국사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보조국사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울창한 동백림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정약용이 신유사옥으로 강진에 귀양 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온 골짜기가 모두 소나무ㆍ잣나무이고, 가는 대ㆍ왕대와 동백나무가 어울려 사시를 한결같이 푸른빛이니 참으로 절경이다” 라고 하였다. 백련사는 백련결사를 통해 강진 차문화의 역사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백련사의 차문화에 대한 기록은 백련결사 제2대 사주인 정명국사(靜明國師, 1205-1248) 천인에게서 찾아지고, 조선후기 백련사 주지 아암 혜장(兒庵惠藏,1772-1811) 선사에 이르러 다시 한국 차문화의 중심에 서기 시작하였다.
아암은 백련사 마지막 종사로 강진의 차역사를 넘어 우리나라의 차역사의 중흥기를 만든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의 가교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혜장선사는 다산 정약용에게 우리의 차(東茶)를 깊이 알게 해 준 인물이다.
다산이 차 생활(茶事)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강진으로 유배 온 지 4년 뒤인 백련사의 혜장과 교류를 하면서였다. 다산이 혜장선사에게 보냈던 걸명시「혜장 상인에게 보내 차를 빌다(寄贈惠藏上人乞茗)」를 보면 다산의 차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즉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 온 지 4년 후인 1805년에 혜장선사와 교류를 갖게 되고 같은 해 백련사 서쪽 봉우리 인근에 있는 차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차의 용도는 약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해 듣기에 석름 밑에서 傳聞石廩底
예로부터 좋은 차가 난다던데 由來産佳茗
때가 보리 말릴 계절이라 時當晒麥天
기도 피고 창도 돋았겠지 旗展亦槍挺
궁하게 지내면서 장재가 습관이라 窮居習長齋
누린내 나는 건 이미 싫어졌다네 羶臊志已冷
돼지고기와 닭죽은 花猪與粥鷄
너무 호화스러워 함께 먹기 어렵고 豪侈邈難竝
다만 근육이 땡기는 병 때문에 秪因痃癖苦
간혹 술에 맞아 깨지 못한다네 時中酒未醒
산에 사는 기공의 힘을 빌려 庶藉己公林
육우의 솥에다 그를 좀 앉혀보았으면 少充陸羽鼎
그를 보내주어 병만 낫게 만들면야 檀施苟去疾
물에 빠진 자 건져줌과 뭐가 다르겠는가 奚殊津筏拯
불에 쪄 말리기를 법대로 해야지만 焙晒須如法
물에 담갔을 때 빛이 해맑다네 浸漬色方瀅
3) 귤동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 귤동에 있다. 정약용이 1801년(순조)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외척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그 해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다산초당을 대표하는 차 관련 유물 로는 차를 달이는 샘물인 약천(藥泉)과 차를 달이는 부뚜막 역할을 하였을 다조(茶竈)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다산과 관련된 차 문화 중 제자 들과 계(契)의 형식을 빌어 만든 차공동생산체계인 ‘다신계(茶信契)’가 매우 중요하다.
다산은 강진군 유배시 절 처음 에는 혜장과 색성스님 등에게 걸명시(乞茗詩)를 지어 보내며 차를 얻어 마셨다. 하지만 다산초당 정착이 후 스스로 차를 자급자족하는 방법을 모색 했으며 혜장선사가 죽은 뒤에는 제자들을 시키거나 직접 차를 따서 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다신계가 만들어졌다.
「다신계절목」은 다산이 유배가 풀려서 떠나면서 제자들과 차로 맺은 계의 절목을 적은 글이다. 그 가운데 차와 관련된 보면 내용을 보면, ‘곡우날 어린 차를 따서 잎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은 찻잎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든다’는 등 다산은 차를 따는 절기, 차 만드는 제다 방법, 차의 모양을 잘 알 수 있게 했다.
4) 월남리 이한영 생가
이한영(李漢永, 1868-1956)은 일제강점기 때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와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만들어 다산의 차문화 영향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금릉(金陵)은 강진의 옛 이름이고, 월산(月山)은 월출산을 줄여 말한 것이다.
백운옥판차라는 이름은 백운동 뒤 옥판봉 아래에서 나는 차라는 뜻이다. 이곳 대숲에서 자라는 야생차를 따서 만드는 차는 지금도 이한영의 증손자인 이효명(李孝明)부부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
2007년부터 월남사지 발굴조사 때문에 월남사석탑 앞에 자리한 이한영 생가가 철거됨에 따라 2011년 강진군이 장소를 옮겨 다시 세웠다. 강진군은 이한영 생가 복원과 함께 전통찻집(월출산 다향산방)을 열어서 이한영 증손자인 이효명씨가 경영하게 하고 있다.
이한영은 당시 주류를 이루던 고형차를 만들지 않고 일본식 차와 경쟁하기 위해 잎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백운옥판차라는 상표를 고안하여 자신이 만든 차를 앞면에는 백운옥판차, 뒷면에는 꽃문양을 목판으로 찍은 포장지로 포장하여 규격화된 상품으로 판매하였다.
백운옥판차는 우리나라 최초의 녹차 상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그 시기가 일제강점기였다는 점에서도 또 하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백운옥판차가 만들어진 강진 백운동 일대는 야생차 자생지로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춘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유명한 차 생산지였으며, 조선시대에 편찬된 많은 지리지에도 차산지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강진은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차산지이며, 조선시대 후기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생활동안 제자들에게 이어지면서 백운옥판차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추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이한영의 2대 선조인 이시헌은 다산의 강진 유배시절 막내 제자로서 다산의 차맥을 이어받았고, 이는 그의 아들 이면흠에게 이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차를 만들어 오던 이한영은 이시헌과 이면흠으로부터 다산의 차맥을 이어받아 일제강점기에 백운옥판차를 탄생시키게 된다.
5) 백운동 별서정원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聃老, 1627~1701 )가 들어 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영(造塋)한 별서정원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별서정원이다.
백운동 별서는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운마을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 라는 뜻으로 과거 백운암과 약사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곳 백운동은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의 차 인연을 담아낸 차 문화의 백미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다산의 차 관련 편지와 최초의 전문 서적인 ‘동다기’가 발견된 곳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시판차 ‘백운옥판차’의 배경이 된 곳으로 우리나라 차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