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램프쿡 로고
    • 검색검색창 도움말
  •   
  • 지역별 특산식품

  • SNS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Chapter 3. 녹차
  • 이동

h2mark 한국 차(茶)의 전래와 역사 따라잡기

1. 한국 차(茶), 언제부터 있었나

‘차’ 라는 말은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부터 쓰였던 우리말이며, 한자가 삼국시대에 도입되었으므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차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 한국 차의 시대별 발전과 차 문화

1) 약으로서의 차_ 약용

우리나라 차 전래에 관한 기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가락국기’에 보면 수로왕비 허황옥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이 불과 열여섯 나이에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올 때인 서기 48년경에 인도에서 가져온 물품 중에 차가 포함됐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차 전래에 관한 공식적인 최초의 문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근거해 보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茶樹가 전래된 것은 興德王 3년(828)이다. 『三國史記』「新羅本紀」第十, 興德王條에는 다음과 같은 나온 구절이 나타나 있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조공을 하니 당나라 문종이 인덕전에서 알현하고 연회를 베풀되 차등이 있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사신 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흥덕왕은 지리산에 심도록 했다. 차나무는 선덕여왕 때도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이 시기는 唐太宗이 통치하던 시기이므로, 왕실간의 교류에 의해 차가 전래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불교국가인 신라사회에서는 왕실·귀족과 더불어 특히 사원에서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행사를 많이 가졌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말기에 이르면 귀족사회와 불교사원을 중심으로 하여 음다풍속이 널리 성행하였고, 신라에는 차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바치던 마을인 ‘茶所村’이나 귀족들이 차를 마시며 즐겼던 강릉의 한송정, 원효(617- 686)의 다방이었던 ‘원효방’의 존재 등 차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三國史記』「新羅本紀」第十, 興德王條
▲ 『三國史記』「新羅本紀」第十, 興德王條

2)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이르면, 한문학의 성숙과 더불어 신라시대에 비해 다인과 다시의 수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차 문화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1123년 송나라 사신을 따라 고려에 왔던 서긍은『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차 풍속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토산다(土産茶)는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고, 오직 중국의 납다(臘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하게 여긴다.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들 역시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자못 좋아하여 더욱 차의 제구를 만든다. 금화오잔 (金花烏盞)ㆍ비색소구(翡色小甌)ㆍ은로탕정(銀爐湯鼎)은 다 중국 제도를 흉내낸 것들이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은하(銀荷 은으로 만든 연잎 형상을 한 작은 쟁반)로 덮어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런데 찬자(贊者)가 ‘차를 다 돌렸소’하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레 냉차(冷茶)부터 마시게 마련이다.

관사 안에는 홍조(紅俎)를 놓고 그 위에다 차의 제구를 두루 진열한 다음 홍사건(紅紗巾 붉은 색의 사포로 만든 상보)으로 덮는다. 매일 세 차례씩 내는 차를 맛보게 되는데, 뒤어어 또 탕(湯 끓인 물)을 낸다. 고려인은 탕을 약(藥)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셔내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져서 가버리기 때문에 늘 억지로 그것을 마셨다.

土產茶。味苦澁。不可入口。惟貴中國臘茶。幷龍鳳賜團。自錫賚之外。商賈 亦通販。故邇來。頗喜飮茶。益治茶具。金花烏盞,翡色小甌,銀爐湯鼎。皆竊效中國制度。凡宴則烹於廷中。覆以銀荷。徐步而進。候贊者云。 茶遍乃得飮。未嘗不飮冷茶矣。館中。以紅俎。布列茶具於其中。而以紅紗巾 羃之。日嘗三供茶。而繼之以湯。麗人。謂湯爲藥。每見使人飮盡。必喜。或 不能盡。以爲慢己。必怏怏而去。故常勉强。爲之啜也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따른 고려의 차 풍속
▲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따른 고려의 차 풍속

고려시대에는 차의 품질에 따른 수입과 소비가 이루어졌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다양한 차제구가 제작되었고 또한 차의 수입과 차제구의 제작 등 고려의 차 문화는 문화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송나라와 긴밀한 연관 하에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차 문화가 발달된 주변 국가들의 영향과 함께 왕건의 불교 숭상정책과 신라문화 계승으로 차 문화는 더욱 왕성하게 된다. 왕실에서는 차 문화를 전담하는 茶房이 설치되고, 다방에 소속되어 야외로 나가서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와 짐을 나르던 ‘다군사(茶軍士)’도 있었다.

차를 공물로 받치던 ‘다소(茶所)’가 있었으며, ‘다원(茶院)’은 임금이나 관료, 귀족들이 먼 길을 가다가 쉬는 집으로 일종의 국영여관을 말하며, 차가 유명하고, 마시기 좋은 곳으로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의 다원으로 경북에 다방원(茶房院), 경남에 다견원(茶見院), 충남과 경북에 다정원(茶亭院)등이 있었다. ‘다점(茶店)’과 ‘다방(茶房) ’ 이 있었는데 일반 백성들이 차 값을 치르고 , 차를 사거나 마시는 곳이었다.

고려시대의 차 문화는 일반 백성들도 차를 즐겼던 시대로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가 되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차 문화는 고려시대 차 문화보다 위축되었다. 집권세력은 배타적인 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고 고려 왕조의 불교에 대해 탄압하였다. 점차 사원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차밭을 관리하는 것 역시 힘들어졌으며, 차의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또한 차의 생산량 감소는 차를 사신에게 하사하거나 중국에 공물로 보내지는 수량이 늘어남에 따라 악순환이 되었고, 조선 말엽에는 문인들도 차를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백성들도 차 농사를 기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등을 중심으로 승려와 문인들의 활발한 차 문화 교류가 이루어진 중흥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중흥기도 대중화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조선 말에는 1883년부터 ‘농상사’라는 관청이 생겨 차의 재배를 관장하고 차 재배를 위한 조사를 지시하였으며, 청나라로부터 모종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까지 차를 팔러 다니는 차 장사꾼이나 찻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민가에서도 차를 사 마실 수 있었다.

의례와 제례를 통해 명맥을 유지하던 차는 18세기 경 몇몇 차인의 등장과 함께 동시대 지식인 사회에 유행했으나 조선의 멸망과 함께 쇠퇴해 갔다. 조선의 사원은 소박한 차 생활을 통한 다선일미를 얻고자 하였고,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의 저술로 우리나라 차 문화의 한 맥을 이었다.

4) 1950년대 이후

조선시대에 급속히 퇴보된 차 문화는 일본의 침략으로 더욱 피폐해졌고 중인들도 차를 즐기기 힘들었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1950년 한국전쟁 후, 차 문화가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커피와 홍차가 유입되면서 전통차는 더욱 외면당하였다.

우리나라의 현대적 차 문화는 1970년대 후반부터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불교계와 여성계에서 적극적으로 차 문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80년대 88올림픽과 국제적인 행사를 치르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성장, 핵가족화, 식품소비구조의 변화 등 사회적 요소의 변화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5) 1990년대 이후

1990년대의 전통 문화 정책은 차 문화 정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차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기존 차생활의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차 생활과 관련된 용어를 통일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역 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들은 침체되어 있던 하동이나 보성지방의 녹차 산업을 활성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부는 녹차 재배 농가에 대하여 지원과 함께 보성 등지의 다원을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 차 문화는 문화체험 프로그램으로 활용되어졌다.

차 문화는 외국인을 비롯한 내국민에게 한국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는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열망으로 이어져 우리 문화를 살리자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우리 차 문화와 녹차에 대한 관심 역시 증가하게 되었다.

차가 건강에 유익하다는 연구와 정보가 많아지면서, 차를 마시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생필품, 화장품, 음식 등에 접목시켜 상품화되고 있으며, 환자의 치료 시에 차 명상, 한방에서의 약재로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자료출처 •한국정보화진흥원(NIA) •한국식품연구원(KFRI)
  • 자료출처 바로가기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