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서 처음 과메기를 먹게 된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어촌 이라는 특성상 왜적의 침입이 빈번했기 때문에 고깃배를 왜적에게 빼앗겨 할 수없이 청어를 지붕에 던져 놓았던 것인데, 그러는 사이 청어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저절로 과메기가 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설은 어촌에 살던 한 선비가 한양으로 가던 중, 바닷가 근처에 청어를 말린 것을 보고 너무 배가 고파 그것을 먹었는데 맛이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선비가 겨울마다 청어를 말려 먹은 것에서 과메기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것은 과메기가 관목청어라는 것이다. 즉 과메기란 청어를 반 건조시킨 관목청어(貫目靑魚)에서 나온 말로 영일만에서는 ‘목(目)’이라는 말을 ‘메기’로 불러 ‘관목’을 부르기 쉽게 ‘과메기’로 불러왔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만물편>에 청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연기로 훈증하여 햇볕이 드는 창에서 건조한 것을 연관목(煙貫目)이라 이름 한다. 관목(貫目)은 건청어(乾靑魚)의 속명(俗名)이다.”
이를 보면 청어를 연기에 훈증시켜 햇볕에 말린 반 건조 청어를 일반적으로 관목 또는 과메기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과메기는 왕실의 진상품으로『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정유(1417년, 영락 15) 4월 24일 기록에 등장한다. 태종 이방원이 홍주에 귀양가 있는 이복동생 이방간에게 사람을 시켜 술과 음식을 내려주는 이야기에서 바로 건청어, 즉 과메기가 등장한다.
그때 태종 이방원은 “지금 도내(道內) 홍주(洪州)에 안치(安置)된 이방간(李芳幹) 처소(處所)에 월봉미(月捧米)는 이미 주었으나, 감장(甘醬)·건청어(乾靑魚) 등의 물건을 연속하여 주게 하라.” 라고 하였다.
이행, 홍언필이 지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영일현조와 심상규(沈象奎)의『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흥해(興海), 칠포(漆浦), 영일(迎日), 포항포(浦項浦), 주진(注津)에는 해마다 겨울에 여기에서 청어가 맨 먼저 나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에 먼저 바친 뒤라야 여러 읍에서 잡기 시작한다. 또 이 청어의 산출이 많고 적음으로써 다음 해가 풍년일까, 흉년일 까를 점쳤다”
이것을 보면 포항지역의 청어는 임금께서 맛보고 난 다음 백성들이 먹었을 만큼 왕실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귀한 물고기로 백성 들이 짓는 한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의 기준이 될 만큼 인기 있는 물고기였으며 그 맛에 대하여 옛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