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국장의 역사
청국장이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중기의 《산림경제(山林經濟)》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기록된 ‘전국장(戰國醬)’이다. 청국장을 일컫는 말은 책마다 조금씩 다른데,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에 는 ‘전국장’ 으로,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청육장(淸肉醬)’으로 기록되어 있다.
♣ 청국장의 유래
청국장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두장(豆醬)류의 가장 초기적인 형태인 시(豉, 메주)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7세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식량으로 쓰이던 장이 유입되어 이때부터 청국장(또는 전국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전쟁 중에 장이 익을 때가지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어 바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속성장의 형태로 청국장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병자호란보다 100여년 앞서 발간된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년)》에서 시(豉)를 ‘쳔국’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1807년에 나온 《재물보(才物譜)》에는 향시(香豉)가 있는데 이를 ’약국‘이라고 하였음.
1827년에 나온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두시(豆豉)를 ‘국장’ 이라고 하였고, 1830년의 《물명고(物名攷년)》에는 시(豉)를 ‘며조’ 라고 하였음. 1855년의 《사류박해(事類博解):고종 22년》에는 시(豉)를 청국장(靑麴醬), 전국장(戰國醬), 국쟝이라고 하였다.
1856년에 나온 《자류주석(字類註釋)》에는 ‘며주’라고 하였다. 1922년 일본인이 펴낸 것으로 보이는 《조선 식료품 동업발달지》에는 국쟝이라고 되어 있다.
♣ 청국장 제조의 역사
1760년(영조 36년) 유중임(柳重臨)에 의하여 보강된 ≪증보산림경제≫에 청국장을 만드는 법이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햇콩 한 말을 가려서 삶은 뒤에 가마니 등에 쟁이고, 온돌에서 3일간 띄워 실(絲 사)이 생기면 따로 콩 다섯 되를 볶아 껍질을 벗겨 가루내고 이를 소금물에 혼합하여 절구에 찧는다. 맛을 보며 소금을 가감한다. 너무 짜면 다시 꺼내어 오이.동아.무 등을 사이사이에 넣고 입구를 봉하여 독을 묻어 일주일이 지나면 먹어도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24년에 지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청국장을 말려서 두고 먹는 법이 나오는데, “청국장 띄운 것을 온돌이나 볕에 말려서 종이 주머니에 넣어 두고 때때로 꺼내어 끓여 먹되 냉수에 삶을 때는 소금을 타서 끓여 먹는다”고 하였다. 짜개청국장을 끓일 때는 콩을 맷돌에 타서 껍질을 버린 다음 삶아서 찧지 않고 띄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9년에 발행된 ≪조선요리법 朝鮮料理法≫의 청국장은 콩과 함께 건대구.전복.해삼.양지머리.사태.곱창.도가니.무 등의 부재료를 넣어 끓이고, 통고추 등을 넣는 등 전대(前代)의 청국장과 비교할 때에 매우 화려하고 내용이 풍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