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삼을 모르는 외국인이 있을까. 한국은 몰라도 진셍이라는 이름은 불로초, 만병통치, 진시황도 한반도에까지 사람을 보내 찾았던 것은 만인이 다 알고 있다. 산에서 자생한 산삼이든 재배한 인삼이든 인삼은 우리 땅에서만 나는 지극히 특별한 식물이다.
외국에서도 인삼을 재배하고 미국의 심마니도 미국의 험준한 산에서 삼을 캔다고 하지만 한국의 인삼과는 그 효능이 비교가 될 수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약 인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외국인에게 인삼차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배낭에 넣어 간 1회용 인삼차 한 봉지를 주고 식당에서 한 끼 식사를 거나하게 먹었다는 젊은이도 있을 정도로 인삼차는 외국인이 손에 꼽는 인기 식품이다.
인삼은 전한 시대부터 약효를 인정받아왔다. 인삼은 옛날부터 불로장수의 이름난 생약으로 만병통치약이라 해서 많이 쓰였다.
유효성분으로 사포닌 배당체, 정유, 비타민A. B. C 등을 함유하고 있으며 오래 묵은 인삼일수록 그 효과가 크다고 하여 소중히 여기고 있다. 효능으로는 정신적, 육체적 활동력 강화는 물론 빠른 피로회복, 혈압조절, 조형기능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삼은 8∼9월에 캐는데 4년근, 6년근이 된 것을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캐서 가공하여 말린 것을 건삼이라 하고 말리지 않은 것을 수삼이라 하는 것이다. 인삼에는 구부려서 말린 것은 곡삼이라 하고 곧게 인삼차 자체 그대로 말린 것은 직삼이라고 부른다.
고려인삼은 유사 이전부터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문헌에는 불과 1,500여년 전에야 나타나며 그나마도 중국문헌에 실려 있을 뿐이다.
양(梁)나라 때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의학서적인 『신농본초경집주 神農本草經集注』 및 『명의별록 名醫別錄』에 백제·고려·상당(上黨)의 인삼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이며, 고려인삼보다도 중국의 상당삼(上黨參)이 더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당삼은 오늘날의 고증에 의하면 초롱꽃과에 속하는 만삼(蔓參)이며 인삼이 아니라고 한다.
『양서 梁書』 에도 무제시대(武帝時代)에 고구려 및 백제가 자주 인삼을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수(隋)의 『한원 翰苑』 중의 〈고려기 高麗記〉에 마다산(馬多山:蓋馬大山인 것으로 추측된다)에 인삼이 많이 산출된다는 기록이 있고, 『국정백록 國定百錄』에도 고려에서 미역〔昆布〕과 인삼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올라 있다.
1123년(인종 1)에 중국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가서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 가운데도 고려인삼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당시에 이미 홍삼(紅蔘)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즉, 백삼(白蔘)이 좋기는 좋은데 여름을 지내면 좀이 먹기 때문에 솥에 쪄야 보존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성삼(開城蔘)은 대략 백삼·홍삼의 두 가지로 나뉘는데, 백삼은 흙에서 캔 삼을 그대로 말린 것이며, 홍삼은 그것을 가마에 넣고 쪄서 붉은 빛이 나게 한 것이다.
우리 나라 문헌으로는 『삼국사기』 또는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에 올라 있는 인삼기록이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성덕왕·소성왕·경문왕조에 보면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공헌(貢獻)한 기록이 나오는데, 특히 799년(소성왕 1) 7월에는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발견하여 하도 신기하여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상을 하였더니 덕종이 보고 인삼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조공한 인삼에 관해서는 당나라 숙종 때에 『해약본초 海藥本草』 가운데 인삼을 붉은 실로 묶어 포장하였다는 대목이 있어, 그때에도 외국에 보내는 인삼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한 가공기술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정확한 간행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 때에 『향약구급방』은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으로 현존하고 있다.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1417년(태종 17)에 중간된 것이 그나마도 일본 궁내성 도서료(宮內省圖書寮)에 1부가 소장되어 있을 뿐인데, 그 중 〈방중향약목 方中鄕藥目〉에 인삼이 170여 종의 향약(우리 나라에서 나는 약재를 중국 약재에 대하여 이르는 말)의 하나로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내용 중 인삼의 삼자가 ‘參’이 아니고 ‘蔘’으로 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인삼을 ‘人參’으로 쓴다.
우리는 조선왕조의 문헌에서 ‘參’자 대신 ‘蔘’자를 썼으며,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입참(入參)’·‘참치(參差)’ 등의 용어에서 ‘參’자를 사용하고 있어 인삼과 혼동될 우려가 있어, 아예 ‘人蔘’으로 표기하든가 ‘參’자의 속자인 ‘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인삼을 ‘人蔘’으로 표시한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며, 위(魏)나라의 장읍(張揖)이 쓴 『광아 廣雅』에 ‘葠地精人蔘也’라는 문구가 나온다.
인삼의 우리 나라 고유의 고명(古名)은 ‘심’이지만, 어원 및 시작된 연대는 알 수 없다.『동의보감』이나 『제중신편 濟衆新編』·『방약합편 方藥合編』에 인삼의 향명(鄕名)이 ‘심’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근세까지도 ‘심’을 사용하여 왔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겨우 산삼채취인의 은어인 심마니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함경남도지방의 산삼채취인들은 인삼을 ‘방추’ 또는 ‘방초’라고 하는데 어원은 방초(芳草)일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인삼을 ‘귀개(鬼蓋)’·‘인함(人銜)’·‘신초(神草)’·‘토정(土精)’·‘옥정(玉精)’·‘혈삼(血參)’·‘인미(人微)’·‘황삼(黃參)’·‘추면환단(雛面還丹)’·‘인신(人身)’·‘활인초(活人草)’·‘지정(地精)’·‘해유(海腴)’ 등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인삼속(人蔘屬)을 나타내는 Panax의 어원은 Pan(모든, 汎)+acos(醫藥, axos)이며, 따라서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이다. 또한 schinseng은 신삼(神蔘)의 중국음에서 유래한다. ‘schinseng’ 대신에 ‘ginseng’도 사용되는데, 이것은 인삼의 중국음이다. 인삼은 옛날 중국에서 ‘人蓡’ 또는 ‘人葠’ 등으로도 표시되었다.
일본은 원래 자생인삼(自生人蔘)이 전혀 없었으며, 백제의 나솔왕 유릉타(奈率王有㥄陀), 채약사인 시덕번량풍(施德潘量豊)·고덕정유타(固德丁有陀)가 일본왕의 초빙으로 554년에 藥師 우리의 인삼도 소개되지 않았나 추측되지만 단정할 수 없다.
현재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도 인삼이 재배되나 우리의 인삼을 따라올 수 없어, 이런 점에서도 우리나라가 인삼 생산의 최적지라고 인정되어 인삼 종주국으로서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 本草綱目』의 인삼 해설 가운데 상당삼에 관한 내용과 조선에서의 인삼재배 및 거래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본초강목』의 집필이 시작된 1552년 당시에는 이미 우리 나라에서 인삼재배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라든가 『중경지 中京志』 등에 인삼재배의 기원이 천수백 여년 전에 전라남도 야생인삼종자를 채취하여 재배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민간전승적 전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고려 고종시대(1214∼1260)에 인공적으로 산양삼(山養蔘)을 재배하였고, 경상북도 경주지방에서는 이미 1,200여년 전인 신라 소성왕 때에 재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모후산(母后山) 일대가 본격적인 재배인삼의 발상지이며, 이 동복삼(同福蔘)이 개성(開城) 상인들에 의하여 도입되어 개성이 드디어 인삼재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박유철(朴有哲)이 앞장을 서서 인삼의 일부재배(日覆栽培:햇빛을 가리고 재배함)를 기업적으로 실시하였다.
원래 인삼이라고 하면 야생인삼을 말하였으나, 점차 인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야생인 천연삼의 채취만으로는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된 것이 인삼재배기술의 개발을 촉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고려 말엽에 인삼이 부족하게 되었으며, 중국의 요구와 우리의 왕실용을 위한 주구(誅求:관청에서 강제로 빼앗음)가 혹심하게 되자 할당량의 조변(調辨:조달)이 어려운 지방민들이 도망쳐 고향을 떠나는 사태마저 생겼다.
이미 중국은 남획으로 야생인삼이 거의 전멸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리 나라 공물의 덕택으로 수요를 충족시켜 왔는데, 이와 같은 수량을 공급하여야 할 우리 나라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인삼을 확보하여야 할 필요성에 쫓기어 백성들에게 이른바 삼폐(蔘弊)를 주게 되었다.
삼폐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인삼의 재배기술을 개발하게 된 것이, 오히려 현재에 이르러서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약 2,000년 전부터 우리 나라가 인삼의 주산국으로 알려짐으로써 인접 국가들과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인삼을 둘러싼 관계가 성립되어 왔으며, 따라서 고려인삼을 매체로 하여 정치적 및 경제적 국제관계가 촉진되어 왔다.
국내에 있어서는 인삼의 공과부담(貢課負擔), 채굴 및 제조 또는 수출교역 등의 통제에 수반되는 각종 부정으로 말미암아 인삼 때문에 생긴 삼폐와 악정(惡政)의 역사가 많았다.
국제관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가 산삼향(産蔘鄕)으로 알려져 중국대륙의 여러 나라 또는 일본에 공헌품 및 예단물(禮單物)로 큰 구실을 해왔고, 근세에 와서는 만주와의 국경지대에서 상호 월범채삼(越犯採蔘)으로 외교적인 분쟁이 야기된 사실(史實)이 많다.
인삼은 예로부터 국가경제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홍삼의 판매제도는 국가 전매로 되어 있다.
최근 인삼의 과학화 연구가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어 인삼의 탁월한 약효가 과학적으로 인정됨에 따라 인삼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런 때에 있어서 고려인삼의 종주국으로서의 전통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학자에 의한 연구는 물론이고, 생산 및 교역을 진흥시키는 여러 가지 방도가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朝鮮常識問答』의 인삼 해설에 의하면 옛날 우리 나라는 어디에나 자연생의 삼이 많아서 1년에 수만 근을 채취하여 그것을 주고 일본에서 은(銀)과 동(銅)을 사다가 그대로 중국에 팔아 이익을 얻었다.
또 인삼을 주고 중국에서 생사와 주단을 사다가 그대로 일본에 팔아 또 이익을 얻는 국제무역을 행하여 수백 년 동안의 국제수지는 거의 인삼이 지탱하여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채(濫採)·남용(濫用)의 결과 영조 때에는 자연삼이 부족해져서 전라도와 경상도지방에서부터 씨를 뿌려 인공으로 기르는 법이 행하여지고, 나중에 개성에서 이를 시험하여 가장 좋은 성적을 내었으므로 그때부터 개성이 인삼의 대표적 산지로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와 중국에서는 수천 년 동안 인삼이 영약(靈藥)으로 숭상되어 왔으나 서양에 소개된 것은 불과 수세기에 지나지 않는다. 원나라 때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오도리크(Odoric,P.da)의 견문기에는 아직 인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차세(Chasse,E.U.)에 의하면 1610년에 최초로 인삼이 네덜란드 사람에 의하여 유럽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1653년 난선(難船)으로 제주도에 표류하여 1666년까지 우리 나라에 체재한 네덜란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하멜(Hamel,H.)이 저술한 『하멜표류기』 가운데 조선특산품으로서 인삼이 기록되어 있다.
또 그들이 우리 나라를 떠나 1667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들렀을 때, 그곳 관헌과 회견하며 인삼에 관한 문답을 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일본 관헌이 “인삼을 어떻게 발견하며 무엇에 사용하며, 또 어디에 수출하는가?”라는 질문에 네덜란드 사람은 “인삼은 북부지방에서 발견되며, 그들에 의하여 약으로 사용되고, 또 매일 타타르(韃靼:지금의 중국 동북지구, 즉 만주이며 고구려시대에는 우리의 판도였다)에 공물로 보내며 상인에 의하여 중국과 일본에 수출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인삼의 생태 및 약효를 스스로 관찰하여 상세하게 보관한 기록은 예수회의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중국 황제의 명으로 타타르지방의 지도 작성에 종사하던 프랑스인 자르투(Jartoux,P.)가 1711년 4월 12일자로 본국에 보낸 서신에 적혀 있다.
이 보고가 계기가 되어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북미 동부지역에 인삼 호경기를 불러일으켜, 채취한 인삼을 중국에 수출하여 막대한 수입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피스(Griffis,W.E.)의 『Corea, The Hermit Nation』(1907)에 의하면, 1750년대에는 벌써 북경(北京)이나 광둥(廣東)에서 미국이 인삼을 둘러싸고 조선과 무역상의 경쟁국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미국이 조선과의 통상을 서두르게 되었고, 드디어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전문 14관(款)인 이 조약의 제8관에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홍삼을 해외로 가지고 나갈 경우 처벌한다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더라도 한미간에 인삼이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듬해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11명의 특사단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피스가 뉴욕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특제 인삼의 커다란 보따리를 내어 놓았다.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사람들로서, 인삼을 가지지 않고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미 두 나라의 국교 개시에 있어서 인삼이 중요한 매체 구실을 한 것이다.
인삼에는 당원질, 지방산, 휘발성유, 칼슘, 마그네슘, 인, 사포니, 점액질, 비타민 A, B, C 등의 다량에 성분이 들어 있다. 인삼의 효능은 너무나도 많고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아 21세기에도 꾸준히 연구되고 있는 가히 신비에 싸인 식물이다.
아무튼 현재까지 발표되어 있는 것을 몇 가지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삼은 신경계통에 특이한 작용을 하며 내분비에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효능을 가지고 있으며 심장 계통과 혈액 계통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효능이 들어 있다.
과로로 인하여 탈진이 될 때 ,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 권태감이 자주 생기는 사람, 구역질·구토·설사·땀이 많이 나는데, 건망증, 심장이 약한데 안심 작용이 있으며, 빈혈과 갈증이 생기는데, 당뇨, 여자의 하혈 등 아무튼 가히 만병통치라할 만하다.
인삼을 차로 마시는 경우는 생삼이라고도 불리는 수삼이나 홍삼을 모두 쓸 수 있는데, 통째로 물에 넣어 오랫동안 은근히 달여 마시거나 가루를 만들어 끓는 물에 타서 마시기도 한다.
삼을 달일 때는 대추를 몇 개 넣는 것이 향미가 좋으며, 인삼 10g에 물 500mℓ의 비율로 달인다.
식성에 맞추어 꿀이나 설탕을 넣어 마셔도 좋고, 가루인 경우에는 끓는 물 1잔에 1∼2스푼을 타는 것이 적당하다. 그러나 지금은 간편하게 물에 타서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 인삼차를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 [한국사 探] 신이 내린 신비의 영약, 인삼 / YTN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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