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일, 또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만든 음식을 의미 한다.1) ‘음식’이라는 단어가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는데 반해, ‘요리’라는 단어에는 무슨 재료를 가지고, 어떠한 방법으로 만들며, 만들어 낸 결과물이 어떠한 맛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 전체적으로 반영되어있다.
여기서, 맛을 쓴맛 또는 짠맛 등으로 느끼고 분류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작용이지만, 맛을 인식 하는 것은 문화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들이라면 대부분 뱉어버리는 쓴 커피나 매운 고추틀 성인들이 즐기는 것온 맛의 문제가 문화적인 행위임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또한 요리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한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집단의 구성원들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공유하며, 그 요리를 통해 특정한 맛을 그 집단의 맛으로 공유한다. 한편, 문화 현상으로서의 요리는 정체된 것이 아니다.
감자와 토마토, 옥수수 등 수많은 요리재료들이 여러 경로틀 통헤 각기 다른 문화권으로 전파되었다. 새롭게 유입된 이러한 재료들은 그 지역의 요리를 변화시켰다. 아울러 기후나 생활 여건, 종교, 그리고 경제적 수준 등의 요인을 통헤서도 요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요컨대, 요리는 그것을 만들고 소비하는 사람들에 따라,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시대에 따라 이전의 전통과 새로운 양식이 융합하고 변화하여 각각의 사회에 맞게 재탄생하는 문화 양식의 하나인 것이다.
이렇듯 요리가 문화를 통해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틀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리는 최근까지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요리를 진지한 역사 연구의 소재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처나 외교, 사상, 또는 경제와 같온 분야에 관심을 집중하는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요리는 사소 하고도 색다른 소재에 불과했다. 요리에 관심을 갖는다고 헤도, 그것은 깊이 있는 학문 연구가 아니라 단순한 분류와 나열을 하는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구미를 중심으로 등장한 하기 자본주의 사회는 각 지역간 정치, 경제의 교류와 함께 문화 교류틀 활성화시켰고, 그 속에서 요리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비의 주체로 떠오른 대중들은 타국의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요리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뉴욕과 런던,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는 세계 각지의 요리틀 선보이는 레스토랑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타국의 요리에 대한 관심이 중가하면서 자국의 요리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화에 대한 관심이 타국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자국의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 근본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타국의 특이한 요리뿐만이 아니라 자국 요리의 옛 모습, 그리고 요리와 요리재료의 역사적 기원과 같은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와 관련하여 역사학에서도 요리를 소재로 한 연구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리이 탄나힐(Reay Tannahill)은 음식과 사회를 연관지어 해석한 연구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더 많은 음식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들이 서양의 역사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했다고 주장했다.2)
그것은 음식이 가진 사회적인 중요성에 대한 의미 있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현대의 음식이 나타나게 된 과정과 앞으로의 음식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음식이 사회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요리의 변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률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한 채, 단순히 음식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탄나힐 이후 학자들은 17-18세기의 프랑스 요리에 주목했다.
그 이유는 이들 학자들이 17-18세기의 프랑스 고전 요리를 현대 서양 요리의 근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17세기 중반 프랑수아 드 라 바렌(Francois de La Varenne)이 펴낸 『프랑스 요리책(Le Cuisinier Frangois)』 과 ‘왕의 시종’이라는 뜻의 L. S. R.(Le Serviteur du Roy)을 필명으로 사용한 익명의 저자가 쓴 훌륭한 접대슬 『L’Art de Bien Traiterh)』을 요리를 득럽적인 예슬로 만든 첫 번째의 요리책이라고 생각했다.3)
이러한 믿음 아래에서, 장-루이 폴랑드랭『Jean-Louis Flandrin)은 17-18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섬세한 맛의 요리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훌륭한 문학적, 예슬적 취향만큼이나 ‘훌륭한 미각’을 보유했는지의 여부가 개인의 내밀화와 새로운 사회적 구별짓기를 촉진시켰다고 주장했다.4)
바버라 휘튼 (Barbara K. Wheaton)역시 17-18세기에 이르면 요리법의 세련화를 통해 프랑스 요리가 단순한 중세요리를 대신해 요리의 전형으로 등장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일치한다고 언급했다.5)
사라 피터슨(T. Sarah Peterson)은 17-18세기 프랑스 요리의 등장을 그 이전 시대의 요리와의 단절이라고 강조한 대표적 학자이다.
그녀는 14세기의 유럽인들이 아랍의 영향을 받아 강한 풍미의 요리를 먹었으며, 이러한 중세의 요리가 마슬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면서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과학적 세계관과 충돌했고, 그로 인헤 중세의 요리는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어 부정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그녀는 중세 요리를 부정과 함께 ‘새로운’ 프랑스 요리의 발명과 그것의 빠른 확산이 당시에 일어난 근대로의 변화 가운 데 하나이며, 『프랑스 요리책』은 요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표현함과 동시에, 당시의 정치적, 철학적 사고를 반영하는 요리책이라고 주장했다.6)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피터슨은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중세라고 규정짓고 당시의 요리를 분석했다.
만일 그녀가 이 시기를 중세라고 규정하고서 이 시기의 요리와 그녀 자신이 근대라고 주장하는 17세기의 요리룰 비교하려 했다면,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별다른 이의 없이 중세라고 인식하는 로마제국의 멸망이 후 부터 14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요리와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요리가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지만, 그녀의 연구에서는 14세기 이전의 요리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폴랑드랭과 휘튼, 그리고 피터슨은 17-18세기를 거쳐 완성된 프랑스 요리를 이전까지의 요리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이자, 요리의 질적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것이었으며,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근대적인 질서를 수립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문화 현상이라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17-18세기의 프랑스 요리 대신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요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르네상스에 주목하게 된 데에는 1553년 카테리나 디 메디처(Caterina di Medici)와 앙리 2세의 걸흔으로 이탈리아 요리가 프랑스 요리에 유업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요리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는 인식도 작용했지만, 그 보다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상 등 여러 분야에서 르네상스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면서 르네상스틀 유럽외 역사에 있어서 변화의 시기로 바라보는 견해가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르네상스관은 요리의 역사틀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맛시모 몬타나리(Massimo Montanari)는 르네상스를 요리의 차원에 있어서 장기적인 변화가 시작하는 시기라고 규정했으며,7) 델리타 아담슨 (Melitta W. Adamson)온 “아랍의 영향이 있은 이후, 교회의 통제틀 받아왔던 중세의 음식들이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중교적, 그리고 사회적 요인들로 인해 유럽 각지의 요리들 로 분화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8)
이러한 요리의 다양화와 지역화는 근대국가의 발전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정체성 획득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사실로 여겨진다. 르네상스와 요리와의 관계는 르네상스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9)과도 관계가 있다.
테렌스 스컬리(Terrence Scully)는 중세 초기부터 르네상스까지 사람들이 섭취 한 음식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르네상스틀 중세의 일부로 포함시킨 것과 다틈이 없었다.10)
오딜 르동(Odile Redon)은 중세 말기에 이르러 창의적인 요리들이 일부 나타났옴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르네상스기의 요리를 중세요리의 마지막 단계라고 구분함으로써, 르네상스틀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로 인식하지는 않았다.11)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은 자신들이 저슬한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르네상스기에 있었던 요리의 변화를 중세요리가 지속되는 과정 중에서 약간의 수정이 일어난 것으로만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그것을 가리켜 ‘근대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돌이 상당수 있을 정도로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 두드러진 시기였다. 이것온 르네상스가 이전과는 다른 시기였옴을 의미한다.
르네상스틀 지나면서 정치적으로는 근대적인 국가들이 틀을 갖추었고, 경제적으로는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사회적으로는 경제적 발전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옴악과 미슬 등의 분야에서 중세와는 다른 미적 감각이 발현되기 시작했고, 고대의 영향으로 인간 중심적인 사상이 다시금 나타났다. 그렇다면, 스컬러나 르동의 주장과는 다르게 요리도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요리의 변화를 근거로 르네상스기의 유럽 사회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기의 요리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기의 요리를 다룬 최근의 연구들은 요리와 사회와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들을 보여주고 있다.
조반니 레보라(Giovanni Rebora)는 14세기에서 16세기를 거치는 동안 무역의 발전과 의사소통의 확대를 통해 요리에 었어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역설했으며,12) 켄 알발라(Ken Albala)는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이전까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요리와 영양학이 분열되었다고 주장했다.13)
그러나 레보라의 연구는 요리의 변화를 역설하는 데에서 끝나 그러한 변화가 갖는 사회적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으며, 알발라의 연구는 영양학에 지나치게 치우친 나머지 실제 요리를 통한 분석을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한계틀 극복하기 위헤 실제 요리책을 중심으로 르네상스기의 요리를 분석하여 르네상스기외 요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살피보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그리고 사회적인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봄으로서 르네상스가 새로운 사회로의 출발점이었옴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요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다음 장에서는 르네상스의 성격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헤를 짚어볼 것이다. 르네상스기 요리의 변화를 통헤 르네상스가 새로운 사회로의 출발점이었옴을 입중하려는 본 논문의 목적이 르네상스의 성격에 관한 논쟁에 기여하고자 하는 데에도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에 대한 기존 연구의 검토를 통헤 학자들의 시각이 시간의 흐툼에 따라 변화했으며, 아직까지도 르네상스의 성격이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았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장에서는 르네상스기의 요리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피보도록 하겠다.
르네상스기의 요리는 초기에는 아랍의 영향을 통해 형성되었다. 아랍 요리는 유럽인들에게 단맛과 신맛, 그리고 향신료의 풍부한 맛을 전해주었다. 15세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고대 그리스 로마 요리의 요소들이 르네상스기 유럽의 요리에 등장했다.
해산물과 각종 부위의 고기들, 그리고 채소와 버섯 등이 요리법에 빈번 하게 등장했으며, 짠맛이 새롭게 각광 받았다. 4장에서는 요리에 나타나는 르네상스기 사상의 변화를 추론하기로 하겠다.
당시 사상의 변화를 고찰함으로서, 르네상스기의 요리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당시 사람돌의 사고를 반영하고 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의학적 사고의 변화가 요리 변화외 중요한 부분을 차지 했지만, 그 이후에는 맛을 통한 즐거움의 추구가 요리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원동력에는 고대 그러스 로마의 선례들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상은 사람들에게 르네상스기의 요리가 육체와 관련된 것이자 맛과 관련되어 있음을 일깨우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5장에서는 르네상스 사회의 변화와 요리와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당시의 사회를 살펴봄으로서, 요리가 사회 질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수공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발전을 롱해 르네상스기에 등장한 신홍 계층들은 자신둘외 계층적 정체성을 확립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요리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문제룰 해결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르네상스기의 요리는 생계유지의 한 부분으로서의 단순한 음식물 가공에서 벗어나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것온 단순히 먹고사는 차원의 번화가 아니라 내적으로는 사상의 변화틀, 외적으로는 사회의 변화룹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기의 요리는 르네상스가 가지고 있는 시대 변화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도구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의 범위는 실제로 이러한 요리법을 사용 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국한되며, 이것이 사회 전반에 걸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어 본 논문의 한계이며, 그것에 대한 극복은 추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두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