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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9. 르네상스와 미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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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르네상스 연구의 흐름

수많은 역사가들이 르네상스에 대헤 연구했지만, 그들 모두가 르네상스를 동일한 역사적 개넘으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14세기에는 ‘르네상스’를 단순히 ‘복고’ 라는 의미로만 이해했다. 사람들은 르네상스를 중세와 비교하지 않았으며, 르네상스를 새로운 시대로 파악하지도 않았다.

르네상스를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시대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고전을 공부한 페트라르카는 중세를 ‘암흑기’로 간주했다.

그는 고대 로마를 ‘훌륭한’ 라틴어, 즉 고전기 라틴어를 사용한 수준 높온 문화의 시대라고 바라보았던 반면에, 기득교가 지배했던 앞선 시대는 ‘엉터리’ 라틴어를 사용한 저급한 문화의 시대라고 역설했다.

페트라르카는 로마시대룹 가러켜 ‘고대’라고 지청했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시기를 ‘근대’라고 일컬었던 최초의 사람이 었으며, 그 영향온 이후에도 지속되었다.14) 15세기의 휴머니스트로서 역사가인 플 라비오 비온도(Flavio Biondo)역시 자신의 시대와 앞선 시대를 구분했다.

그는 고트족의 로마 약탈이 일어났던 410년부터 1412년까지를 하나의 시기로 구분했다. 그는 이 시기를 중세라고 이롬 붙이지는 않았지만, 시간의 범위를 확정지음으로서 그가 살고 있는 시기가 이전과는 다른 시대였옴을 역설했다.

중세외 암흑기 이후에 학문과 예슬이 부활했다는 인식이 15-16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당시 사람돌은 자신들의 시대를 부활의 시대로 인식했던 것이다.15)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르네상스는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득창적인 시대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

르네상스를 득창적인 시대로 인식했던 최초의 학자는 쥘 미술레(Jules Michelet)였다. 그는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중세의 구속에서 해방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쇄슬의 확산과 고전의 부활,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과 같은 요인들을 통해 15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호기심과 통찰력, 그리고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이 바로 세계와 인간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들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르네상스기에는 중세와는 다른 형태의 예슬어 이룩되었다고 역설했다.16)

한편 게오르그 포이히트(Georg Voigt)는 휴머니즘에 관심을 가겼다. 그는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즘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그것이 점차 전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기존의 권위콜 유지했던 교회세력이 측소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고대의 철학은 중세의 억압적인 체제보다 사람들에게 메흑적인 것 이었다. 그는 이러한 견해를 토대로 휴머니즘이 근간인 르네상스는 중세와는 다른, 근대의 시작이라고 역설했다.17) 그러나 르네상스를 유럽 역사에 있어 가장 찬란하고 돋보이는 시대로 만든 것은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공적이었다.

르네상스에 관한 모든 개념이 그의 득창적인 산물은 아니었지만, 그는 1860년 출간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ZWe KidUir der Renaissance in Itcdien)』18)를 통헤 이전까지 미슬과 문학에만 주로 국한되었던 르네상스의 개념을 인간의 삶과 관련된 전반적인 영역으로 확대시켰다.19)

이 책에서 그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근대 유럽 국가의 기원으로 볼 수 있으며, 고전의 부활을 통해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자연의 탐구와, 지리상의 탐험을 통한 세계의 발견을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이 이룬 업적이라고 관단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도덕적 타락과 종교에 대한 무시로 인해 16세기에 이르러 쇠퇴했지만, 신분보다는 개인의 재능과 문화, 그리고 부가 사회적 지위틀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기희를 부여함으로서 근대라는 새토운 사회가 등장하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라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에게 있어서 르네상스는 근대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중세의 긴 암흑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정신을 통해 전 유럽에 걸친 하나의 정치적, 문화적 모범을 창출한 득창적인 시대였다. 그는 그러한 변화의 원동력을 새롭게 등장한 개인에서 찾았다.

개인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구분하는 핵심 요소이자, 르네상스의 발전과 쇠퇴를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었으며 동시에 모든 르네상스인들의 삶에 내재된 근본 원리였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에게서도 단점이 드러난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에서 권력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국가와 문화, 그리고 중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그것돌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인 경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특히 르네상스가 발현되는 데 기반이 되었던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의 경제 발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20) 부르크하르트 이후 르네상스틀 연구하는 학자들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그것은 부르크하르트에 대한 보완과 저항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경향이었다.

먼저, ‘근대의 시작’이라는 부보크하로트의 견해를 받아들인 연구자들이 등장했다. 이 들의 연구는 부르크하르트의 개넘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세분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그것은 부보크하르트의 업적이 위대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르네상스틀 단순히 미슬상의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시대 개념으로 규정하게 되면서 르네상스가 유럽 사회의 세부적인 모습들을 연구하려는 인식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철학 분야에서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는 르네상스 철학 속에서 수학과 철학, 그리고 휴머니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근대적 세계관을 발견했으며, 그것을 통해 르네상스틀 변화의 시대로 인식했다.21)

예슬 분야에서 월터 페이터(Walter Pater)는 개인주의와 고전의 부활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에 보편성을 지닌 문화가 탄생했다고 주장했으며, 버너드 베른슨(Bernard Berenson)은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슬가둘에 대한 연구를 통헤 이들이 종교에 대한 물질세계의 우월성을 구현하고, 육체에 대해 과학적인 관념을 보유하기 시작했다고 역설했다.22)

한편, 알프레드 폰 마르틴(Alfred von Martin)은 르네상스 사회의 발전 과정을 연구 소재로 선택했다. 그는 부로크하르트가 간과했던 경제 문제틀 중점적으로 연구한 걸과,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중세와 근대사이의 사회적인 괴리 현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토지를 경제 기반으로, 그리고 기득교가 승인한 정적인 계급 질서틀 사회 원리로 삼았던 중세 사회는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도시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회로 변모했다.

그는 르네상스 사회의 발전이 경제적인 변화틀 따라잡기 위해 중세적인 구속들을 타파하는 방향으로 진행 되었다고 주장했다.23)

한편 르네상스기의 과학과 사회와의 관계에 초점을 두었던 에드가 질셀(Edgar Zilsel)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 발전이 기슬분야의 발전이었으며, 이것은 경제적 함리화를 추구하면서부터 가능헤진 것이라고 역설했다.24) 세분화된 연구경향은 휴머니즘에 대한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한스 바론(Hans Baron)은 피렌체외 휴머니즘이 번화하는 과정을 고찰했다. 그에 따르면 페트라르카 이후 14세기 내내 지속된 고전 중심외 문학적 휴머니즘은 15세기에 이르러 레오나보도 브부니(Leonardo Bruni)를 통해 정치적인 색채틀 띠게 되어 시민이 중심인 정치적 휴머니즘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25)

한편,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Paul Oscar Kristeller)는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문화와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휴머니즘은 휴머니스트들만이 학습했던 현실과 유러된 사상어 아니라 문화와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생활의 원리였다는 것이다.26)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 학자들의 연구는 부르크하르트의 인식을 받아들여 르네상스틀 ‘근대의 시작’으로서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로 관단하고 있으며, 그러한 거대 체제를 상정한 다옴, 부르크하르트가 미처 짚고 넘어가지 못했던 여러 분야률 보완해서 거대 체제 안의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 넣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시대로서의 의미 규정만을 중요하게 여겼던 르네상스 연구를 설질적인 역사로 만든 연구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보크하보트에 대한 보완적인 시각과는 반대로, 다른 한편에는 부보크하르트에 대한 저항이 존재했다.

특히 중세사喜 연구한 학자들은 ‘근대의 시작’이라는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르네상스가 시대의 변화를 가져온 유일한 현상온 아니며, 르네상스기에 들어와서야 등장했다는 근대의 요소들을 중세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대의 요소들이 이미 중세에 나타났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연구자는 찰스 헤이스킨스(Charles H. Haskins)였다. 그의 목적은 중세에 대한 편견을 없에는 데 있었다.

헤이스킨스가 바라본 12세기는 지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예슬과 문학, 그리고 사회제도외 발전에 있어서 르네상스에 못지 않은 시대였다. 그는 이 시기에 이르러 상업 발전에 힘입어 도시가 발전했으며, 초기적인 관료제가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에슬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이 절정에 달했고, 라틴어 시와 로마법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으며, 고대 그리스의 과학이 부활했다고 역설했다. 헤이스킨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전’이라는 원동력이 있었다면, 12세기의 르네상스에는 ‘아랍’이라는 원동력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중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둡거나 정적인 시대가 아니었으며, 그와 반대로 르네상스는 무조건 밝은 것도, 놀라운 일들만 일어났던 시대도 아니었던 것이다.27) 헤이스킨스가 근대작 요소들을 12세기에서 찾는 동안, 일부 연구자돌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중세적인 요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요한 후이징아(Johan Huizinga)는 중세 사상의 기본적인 특정인 형식주의와 의인법이 르네상스기에도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르네상스기를 휴머니스트들만이 존재했던 시기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장 칼뱅(Jean Calvin), 그리고 이그나티우스 로올라(Ignatius de Loyola) 같은 엄숙한 사람도 함께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에게 있어 르네상스는 중세의 관넘을 물려받아 고전이라는 색채로 장식을 새롭게 한 시대였던 것이다.28) 헤이스킨스와 후이징아 같은 학자들은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목적온 르네상스 자체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중세의 위치를 격상시키려는 것이었다. 르네상스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공격은 린 손다이크(Lynn Thorndike)와 조지 사턴(George Sarton)같은 과학사가들에 의해 이후어졌다.

과학사가들은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이라고 가정한다면, 근대는 자연과학에 기반한 시대이므로 르네상스기에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이 자연 과학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틀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했다.29) 특히 사턴은 르네상스기외 휴머니스트들이 비록 스콜라철학이라는 제약을 제거했지만, 고대의 권위라는 새로운 족쇄를 도입했다고 보았다.

결국 그로 인헤 르네상스기에 정신적인 무정부상태가 초래되었으며, 이것은 17세기 이후 등장한 경험과학에 의해 국복되었다는 것이 사턴의 생각이었다. 과학사가돌에게 르네상스는 과학의 부활이 아니라 붕괴와 변형외 시대였던 것이다.30)

헤이스킨스로부터 사턴에 이르기까지 많온 연구자들은 ‘근대의 시작’이라는 르네상스의 개넘에 도전하여 상대적으로 소외된 중세의 위치를 격상시켰고, 르네상스를 유일무이한 시대로만 관단하는 것을 막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 들의 연구가 ‘르네상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르네상스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처럼 이들도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어떠한 형태로든 변화가 일어났다는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의 시각은 르네상스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이 될 수는 없었다.

‘르네상스’라는 거대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은 1970년대에 들어서 등장했다. 첫 번째는 사회사 영역에서 일어난 도전이었다. 사회사는 엘리트보다 민중에 주목했던 연구방법론이었다.

그러므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이후어진 지적, 문화적, 정치적 활동을 연구함으로서 사회를 설명했던 르네상스는 사회사의 대두로 존립 기반을 잃게 되었다.31) 르네상스에 대한 또 다른 근본적인 비관은 여성사의 영역에서 등장했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여성의 사회적, 정처적 자유가 무너지게 되었다는 여성사가들의 연구 결과는 부르크하르트의 ‘개인의 발견’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여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개인의 발견’이 아닌 ‘남성의 발견’에 자나지 않으며, 결국 르네상스를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 포괄적인 운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었다.32)

마지막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은 철학의 영역에서 나온 것이었다. 포스트모던주의의 영향으로 근대가 가지고 있는 우월성이 부정되었다. 그것은 르네상스와 현재가 맺은 어떠한 파생 관게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근대의 시작’으로 강조되어온 르네상스는 이제 근대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19세기에 이르러 선택된 소재로 강등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르네상스는 더 이상 근대 세계의 신흐탄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33) 르네상스에 대헤 수많은 연구들이 나왔옴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는 여전히 시간의 범위와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시기로 역사가들에게 남아있다.

르네상스의 시작과 끝은 언제이며, 그리고 르네상스의 성격은 무엇이었는가. 본 논문은 르네상스가 처헤 있는 이러한 ‘시대’로서의 어려음을 요리라는 소재를 통헤 극복하려고 한다. 요리에 대한 연구는 생활에 대한 연구이다. 르네상스 연구에 었어서도 생활에 대한 연구는 가장 부족한 실정이다.

비록 요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고려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요리에 대한 연구는 요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일부 사람돌의 삶을 살펴볼 수 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기의 요리에 대한 연구는 중세의 요리와 르네상스 시기의 요리를 구분함으로서 르네상스 개넘이 등장한 이래 지속적으로 언급되어 왔던 시대구분의 문제에 공헌할 수 있다.

이것온 ‘시대’를 중심으로 연구했던 초기 연구자들과 그 궤를 나란히 하는 것이며 동시에 르네상스를 역사상의 한 시대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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