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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5. 영국 차(茶) ∙ 음식문화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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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영국 차(茶)문화 확산∙정착

18세기에는 영국인들이 홍차에 눈을 뜨면서 그 수요가 급증했다. 당시의 중국은 청나라의 역대 왕조 가운데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던 건륭제 시대였다. 건륭제는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고, 1757년에 이르러 외국과의 무역 창구를 광둥성에만 한정시켰다.

하지만 차를 사들이는 항구인 아모이와 마카오가 광둥성(广东)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푸젠성(福建)의 차를 최고로 여기는 영국인들의 차 수입량은 전혀 지장 받지 않았고 더욱 증가했다.29) 18세기 초반에 차는 왕실에서 상류층 가정 속으로 들어왔다.

모든 계층에서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알코올은 상류층의 아침식탁에서 조금씩 밀려났다. 왕실과 상류층의 아침식사 메뉴였던 고기와 술은 빵이나 토스트와 함께 이국의 기호품인 차, 커피, 초콜릿 등을 담은 다관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하지만 서민층이나 런던에서 멀리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은 아직 차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상류층의 남자들은 저녁식사 후, 식탁에 남아 파이프담배를 피우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일방적이었다. 여자들은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대화를 즐겼다.

간혹 남자들도 여자들이 있는 휴게실로 찾아와 차를 함께 마셨다. 집 앞 정원에 있는 예배당이나 전원풍의 원두막, 텐트 등의 티하우스에서 여름날 저녁식사가 끝나면 차를 마시기도 했다.

상류층에서 음다습관이 정착되면서 음다예절이 생겨났으며, 차에 설탕과 우유나 크림도 첨가해서 마시는 새로운 음다법도 정착 되어갔다.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관행은 점차 확산되어갔다. 확산되다보니 차의 소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식품점, 잡화점, 커피 하우스에서도 차가 판매되었다.

상류층을 흉내 내고 싶어하는 서민들은 신분의 상징인 차를 마시면서 상류층의 기분을 느끼고자 했다.차에 대한 높은 세금 부과는 밀수차를 성행하게 만들었고, 가짜인 ‘영국산 차’가 성행하게 했다.

이러한 사회현상에 비판을 제기한 이들도 있었지만, 음다습관이 서서히 상류층에서 일반대중 속으로 스며들면서 생활전반에 많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영국인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18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일반가정, 여행지, 공중위락시설 등 어느 곳에서나 즐기는 음료로 확산되었다.

차문화가 상류층에서 중류층으로, 그리고 노동자층으로 확산되며 국민음료로 보급되려는 차에 대한 논쟁이 전국적으로 활발해졌다. 상류층이 즐기던 음료에서 대다수의 영국인들이 즐기는 음료로 차가 보급되면서 영국인의 생활이나 무역구조 등 많은 부분에 변화가 오며 반대론을 불러 일으켰다.

18세기 경, 몹시 비싼 차 세금은 조금씩 하락하였지만 서민층이나 노동자층이 음용하기에 여전히 고가였다. 하지만 당시 차의 수요층이 넓어짐에 따라 차에 다른 잎을 섞거나 착색하는 등의 방법으로 ‘위조차(僞造茶)’를 파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친 후, 18세기 말이 되면서 차는 영국 국민의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자리하게 된다.30) 점차 영국식 홍차 문화가 확산되지만 차가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한 독점 공급으로 매우 고가였는데도 불구하고 티파티와 티가든이 성행하게 된다.

티가든은 유독 자연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정원 문화와 차 문화가 결합한 일종의 사교 장소이다. 봄이 시작되는 4, 5월부터 가을이 찾아오는 8, 9월 무렵까지 문을 여는 티가든은 야외에서의 담론장소로서 오늘날 티파티의 전신이 된다.

정원 안에 중국식 다실을 마련하여 중국옷을 입은 웨이터로 하여금 서비스를 하게 하는 곳이었는데, 바로 이 티가든에서 오늘날 영국 사람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애프터눈 티 파티(Afternoon tea party)가 탄생하였다.

그러한 티가든 가운데 대표적인 가든은 복스홀 가든(Vauxhall Garden)과 란넬 가든(Ranelegh Garden)이었다.

이들 가든은 1660년 찰스 2세에 의해 왕정이 복고되고 평화가 회복되자 1732년에 문을 열었는데, 복스홀 가든(Vauxhall Garden)은 정원의 넓이가 무려 48,000m²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고, 울창한 수목 사이로 뚫린 산책로에는 1천 개도 넘는 가로등이 대낮처럼 주변을 밝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원 안에는 연못은 물론 운하가 만들어져 있어 보트 놀이를 할 정도로 넓었다. 또한 정원의 중앙에는 로툰다(Rotunda)라 불리는 원형음악당이 있어 하이든이나 젊은 시절의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들의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였다.31)

오랜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진 영국은 1767년 타운센트법 (Townshend Acts)32)을 제정해 차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징수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미국도 차에 부과되는 높은 세금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당시 광둥성에서는 차 무역이 확대됐지만 영국의 차 관세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는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국과 미국 사람들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가 광둥성에서 사들인 차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세기 차는 국가산업과 국민음료로써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빅토리아여왕(Queen Victoria, 1819.5.24~1901.1.22)의 64년 재임기간 중의 차산업을 보면 아편전쟁의 결과로 중국과의 차무역이 확대되었으며, 식민지인 인도와 실론에 차 플랜테이션을 개간하여 값싸고 입맛에 맞는 차를 직접 공급하였다.

또한 만국박람회를 통해 식민지인 인도와 실론의 차를 소개하면서 차는 영국인의 음료뿐 아니라 세계인의 음료로 거듭나게 된다.33) 영국의 왕실은 하노버왕국의 조지 3세(GeorgeⅢ, 재위1738.6.4~1820.1.29)부터 시작되어 빅토리아 여왕시대로 이어진다.

이 시기는 영국 역사상 격동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왕실부터 모든 영국민들이 좋아하는 음료였던 차는 영국의 역사와 함께 격동의 세월을 보낸다. 조지3세의 아내 샤롯데 왕비가 차를 마시기 위해 웨지우드사로부터 티세트를 구입했다.

크림색의 도기 티세트는 우아하고 아름다워 ‘여왕의 자기(pottery to her majesty)’라 부르도록 허가를 내리며, 웨지우드사에 자신감을 심어준다. 웨지우드사를 비롯하여 스포드, 민튼 등 영국의 도자기산업은 자유경쟁을 통해 한층 발전하게 된다.

아침식사를 담는 그릇으로는 영국산 아침식사용 도자기 세트뿐 만아니라 독일의 드레스덴, 프랑스의 세브르 등 당시 유럽의 자기세트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도자기 품질과 견줄 만큼 19세기 영국의 도자기 산업은 발전되었음을 말해 준다.

전사법(transfer printing), 본차이나(bone china)등을 발명하며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도자기 공장으로는 스테포드셔, 웨지우드, 스포드, 우스터, 민튼 등을 들 수 있다.34)

차문화가 완전히 정착된 19세기는 부르주아지들이 등장하며 사회전반에 그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들에 의해 모든 생활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며, ‘스위트 홈(sweet home)’을 낳았다.

19세기에 탄생한 오후의 티 타임은 이러한 변화에 의해 태어나 19세기를 영국의 모든 계층의 즐거운 생활 습관이 되었다.

점심과 저녁식사 사이에 즐기는 오후의 티타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7대 베드포드 공작부인 안나 마리아(Anna Maria 7th Duchess of Bedford, 1788~1861)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베드포드 공작부인은 점심과 저녁사이의 시간이 너무 길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차와 함께 다식(tea food)을 먹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활습관이 점차 상류층 부인들 사이로, 그리고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영국 전역에 유행하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하였다.

오후의 티타임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교의 시간으로 내실과 응접실에서 즐기기도 했지만 날씨가 좋은 날이면 정원 잔디밭에서 즐기기도 했다.35)

영국 홍차의 특징을 얘기할 때 잔에 넘칠 듯 가득한 밀크 티를 한두 잔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서너 잔, 그치지 않고 마셔대는 넉넉함과 ‘티 세팅(Tea Setting)’을 화려하게 차린다는 점을 꼽는다. 특히 애프터눈 티가 그렇다.

벽난로 앞에 차려진 티 테이블 위에는 항상 차와 다구, 그리고 각종 다식들로 풍성할 뿐 아니라 이야기 또한 풍성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생활의 아름다움, 마음의 여유야말로 영국 홍차의 진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역시 애프터눈 티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야 하는 서민들 보다는 경제발전의 혜택을 많이 입은 레저 클래스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존 키츠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애프터눈 티의 즐거움은 영국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36)

19세기 초 귀족들의 식생활은 호화로운 아침, 낮에는 하인들의 시중을 받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가벼운 피크닉 풍의 식사, 4시경에는 케이크를 곁들인 애프터눈 티, 8시엔 저녁(대체로 정찬,만찬)이라고 하는 훗날 빅토리아시대의 영국 상류층의 식사패턴이 거의 형성되어 있었다.

영국 상류사회의 식사시간을 보면, 호화로운 아침식사, 11시의 일레븐지즈(Elevenses), 점심때는 피크닉풍의 가벼운 식사, 5시의 케이크가 곁들여진 애프터눈 티, 8시의 저녁식사, 저녁 후에는 거실에서 다시 차를 마셨는데, 이러한 식사 패턴은 훗날 중류사회로 확산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었는데, 이 때부터 애프터눈 티는 4시로 당겨졌다.

저녁식사가 늦어진 것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직장과 주택이 분리되어 통근거리가 멀어진 점도 있지만 가스등이 발명 되어 설거지하는데 큰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의 시대, 즉 19세기 초반에 살았던 도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상세히 기록한 헨리 메이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나중에 인기소설가가 된 찰스 디킨스와 같은 신문사에서 일했던 신문기자였다. 메이휴에 따르면 런던 거리에서는 온갖 종류의 노점상들이 음식을 팔았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노동자는 집에서 아침을 먹었겠지만, 이런 노점상들이 성업했다는 것은 자택에서 아침 식사를 만들어 먹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음을 시사한다. 설탕을 넣은 홍차를 기본으로 하는 ‘영국식 아침식사’는 제대로 된 주방이 없더라도 뜨거운 물만 끓일 수 있으면 준비가 가능한 음식이었다.

특히 설탕을 넣은 홍차는 카페인이 다량 함유된 즉효성 있는 칼로리 보급원이었다. 성 월요일의 습관을 상징으로 하던 산업혁명 이전의 엄격하지 못한 노동시간 관리가 맥주에 가까운 에일(ale)이나 위스키를 주성분으로 하는 진의 음주습관과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효성이라는 의미에서는 아침식사뿐 아니라 일하는 도중에 차를 마시는 티 브레이크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충분한 칼로리를 보급하여 정신이 번쩍 든 상태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야말로 공장 경영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이렇게 해서 카페인이 듬뿍 든 홍차와 고칼로리의 설탕, 설탕으로 만든 잼과 당밀 등은 영국인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초식품으로 자리잡았다. 영국인 노동자들은 때로 식사를 더운 요리와 찬 요리로 구분한다.

더운 요리는 따뜻하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 차가운 빵을 한순간에 더운 요리로 바꿔주는 한 잔의 ‘설탕을 넣은 홍차’가 없었다면 19세기 영국 공업도시 노동자들의 생활은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홍차 자체는 칼로리가 없는데다 가격도 비싸 영양학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빴다.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1페니로 몇 칼로리의 식품을 살 수 있는지 살펴보면 값싼 감자는 1천 칼로리, 포리지도 880칼로리를 살 수 있었지만, 설탕은 비싸서 2백 칼로리도 사기 어려웠고 홍차의 칼로리는 제로였다.

영국 북부지방의 식사는 저렴하면서도 영양가가 높았던 감자와 포리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데 반해 홍차와 설탕이 들어가는 식사는 주로 런던 등 남부도시에서 먼저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비싸면서도 칼로리가 부족한 식사에는 스테이터스 심벌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었으므로 비판은 많았지만 사람들은 결코 그만두지 않았다. 결국 북부에서 시작된 ‘빈민의 식사(오트밀과 감자)’와 ‘값비싼 식품(차와 설탕)’이 결합하면서 근대 영국 서민의 아침식사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37)

노동자들이 점심과 저녁 사이에 애프터눈 티를 즐기게 된 것은 19세기의 말 쯤으로 추측된다.

B.S.로운트리와 J.버네트가 조사한 노동자들의 《가계비지출보고서》를 보면, 1900년 및 1901년의 노동자들의 1주일분의 식사 메뉴가 상세히 열거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점심과 저녁 사이에 ‘티타임(Tea time)’이 설정되어 있고, ‘티타임’때는 홍차와 함께 빵, 버터, 케이크, 스콘 등을 먹는다고 전하고 있다.

그 《가계비지출보고서》를 보면서 한 가지 눈에 띠는 사실은 애프터눈 티가 정착되면서 노동자들이 저녁을 아주 가볍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월요일은 홍차만, 화요일은 빵․베이컨․버터․홍차, 수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저녁을 전혀 먹고 있지 않으며, 토요일은 홍차와 훈제청어, 일요일은 빵과 고기를 먹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1주일에 저녁을 먹지 않는 날이 사흘, 홍차만 마시는 날이 하루이다. 주말에나 겨우 육류와 물고기를 먹을 정도이니, 그들이 점심과 저녁 사이에 마시는 티는 엄밀한 의미의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라기 보다는 하이 티(High tea)라 말하는 게 적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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