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초반, 바다길을 통해서 유럽인이 처음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 중국인 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어느 누구도 문화적이나 경제적인 업적에서 경쟁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신 이외의 외국 민족을 야만족이라고 생각하며 중국을 모방하길 원했던 ‘외국의 악마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멸시하였다. 그때까지 중국에 알려지지 않은 유럽의 기술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중국은 유럽보다 발전했었다.
서양의 배에 실은 자기 나침반, 화약, 그리고 인쇄된 책자 등은 모두 중국에서 발명한 것들이었다. 중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으며 부족한 것이 없는 나라였다.23)
그에 비해 유럽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생활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비단에 이어 향신료, 도자기, 면제품, 그리고 차 등 중국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물품은 많았다. 이렇게 중국은 풍요한 땅으로 유럽인에게는 낙원이었다.
중국을 동경하는 유럽인의 마음이 아시아 항로를 개척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유럽의 근대 자본주의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양의 차문화에 대한 유럽인의 경외심과 동경은 바로 유럽의 근대사를 열어준 한 계기가 된 것이다.
16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지리학자 바티스타 라무지오(Giovanni Battista Ramusio, 1485~1557)가 저술한 『향해와 여행(Delle navigationi et viaggi: Voyages and Travels)』에 유럽인의 문헌에서는 차를 약으로 쓰이기도 하는 대중음료라 소개했다.
또한 포르투갈 선교사 가스파 다 크루즈(Gaspar da Cruz,1520~1570)의 『중국지』에서는 차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료라 소개했다. 이처럼 중국에서 유럽인들이 보고 느낀 차는 약 또는 손님을 대접하는 음료였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 다회로 차를 처음 접한 유럽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신비한 문화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네덜란드의 지리학자인 린스호텐(Jan Huyghen Van Linschoten, 1563~1611)은 『동방안내기』에서 동경의 눈으로 본 신비로운 일본의 생활문화에 대해 기술했다.
일본의 다회를 본 그는 차는 단순한 음료나 약이 아닌 문화라고 이해했다.24) 막상 차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유럽에 전해졌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차를 유럽에 처음 전한 것은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이며, 그들은 일본의 나가사끼 현 히라도(長崎縣平戶)25)에서 구입한 일본차와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인을 통해 사 모은 중국차를 자바섬의 ‘반탐(Bantam)’26)에서 배에 옮겨 실어 본국으로 보낸 것이 차의 첫 유럽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대체로 1610년경이라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이 무렵 차는 대단한 귀중품이어서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의 살롱 가운데서도 가장 호화로웠던 암스테르담의 살롱에서만 제공될 정도였다고 하니, 차를 얼마나 진귀하게 생각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차는 먼저 왕후와 귀족들이 마시기 시작한 후에 차츰 상류층으로 번져가게 된다. 유럽에 건너간 차는 1630년대의 중엽부터 프랑스, 독일, 미국 그리고 영국으로 확산되어간다.27)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차를 접할 수 있던 곳은 커피하우스였다.
런던을 비롯 한 영국의 각 도시에서 17세기 후반부터 약 1백 년간 크게 유행한 사교의 장 이었다. 초기에는 상류층 시민들이나 지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상류층이 주로 커피하우스를 하는데 홍차도 여기서 영국 전역으로 보급되어갔다.
당시 차를 팔던 대표적인 커피하우스로는 1657년 런던에서 담배상점과 커피 하우스를 함께 운영한 토마스 개러웨이(Thomas Garraway)의 개러웨이스(Garraways)가 있다. 토마스 개러웨이는 차보다 먼저 유입된 이국의 음료인 커피를 판매하면서 차와 함께 찻잎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이 특유의 홍차 문화를 형성하게 된 계기는 1662년 찰스 2세 (King Chakes Ⅱ.재위 1160~85)와 포르투갈의 공주 캐더린(Catherine of Braganza, 1638~1705)의 결혼이었다. 결혼 선물로 인도 봄베이의 풍습과 함께 동양의 음차 풍습을 궁정에 들여왔다.
궁정에서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에일(Ale), 와인(Wine)과 스프리츠(Spirits)를 마셔 술에 절어 지낼 정도였는데 차 애호가였던 캐서린의 영향으로 동양의 차가 종래의 알코올을 대신하여 유행하게 되었다.28)
영국에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곧 왕실에서 이루어지는 ‘고품격의 취미’를 즐긴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특히 상류층계급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 되었다.
당시 귀족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를 열었다. 이 파티의 뒤풀이는 보통 남녀가 각각 따로 했는데, 이 자리에서 남자들이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는 동안 여자들은 차를 마시면서 가십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고 한다.
티파티는 ‘고품격의 습관’으로 인식되어 있었으므로 동인도회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마다 새로 생산된 차를 왕실에 진상함으로써 왕실에 납품되는 차, 왕비와 귀부인들도 마시는 차라고 널리 홍보했다.
찰스 2세가 죽은 후 제임스 2세가 즉위했고 1689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계승하였다. 메리여왕은 이전에 캐서린이 포르투갈에서 음차 풍습을 들여 온 것처럼 네덜란드로부터 차․자기․칠기 등의 동양적 취미를 들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