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램프쿡 로고
    • 검색검색창 도움말
  •   
  • 서양의 음식문화

  • SNS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Chapter 12. 르네상스기의 요리와 사회
  • 이동

h2mark 세로운 귀족의 형성

로마의 멸망은 음식의 역사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의 붕괴로 도시가 쇠퇴하고 경작지가 감소했으며, 버려진 땅에는 숲이 들어섰다. 아울러 게르만인들의 이동으로 서유럽에는 게르만인들의 생활 문화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결과 목축과 사냥 등의 활동이 식량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중가했다. 이제 고기와 동물의 젖,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유제품으로 대표되는 게르만인들의 식생활이 로마의 영역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65)

그렇지만 빵과 포도주, 그리고 을리브 기름을 주로 섭취 했던 로마인들의 식생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배층으로 등장한 게르만인들은 점차 로마의 문화에 매흑되었고, 로마인들의 생활 양식을 받아돌였다. 로마의 음식들이 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기득교였다.

기득교가 유럽인들의 삶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빵과 포도주, 그리고 기름은 기득교의 상징으로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66) 이렇게 게르만과 로마의 음식문화는 아랍의 영향이 미치기 이전까지 중세 음식의 앙 축을 이루었다.

‘진정한’ 로마인 황제인 율리아누스(Julianus)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는 올리브를 비롯한 채소와 과일, 그리고 포도주를 먹는 것을 즐겼으며,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묘사되었던 반면, 야만족출신의 부모를 둔 트라키아의 막시무스(Maximus the Thracian) 황제는 매일 40-60파운드의 고기를 먹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중세가 진행되고 사희가 계층화되면서 부터 게르만과 로마의 음식들은 민족적, 지역적인 구분보다 계층적인 형태로 구별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보리, 기장, 호밀과 귀리 등 잡곡을 위주로 한 식생활을 유지했으며, 귀족들은 밀과 고기를 중심으로 한 음식들을 섭취했다.

그렇지만, 요리의 측면에 있어서 중세의 요리는 단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경제적 원인과 종교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서로마의 멸망 이후 상업이 위축되면서 로마인들이 즐긴 요리 재료들의 이동이 거의 불가눙해졌으며, 기득교의 보급으로 빵과 포도주 이외에 로마인들이 즐겼던 사치스런 요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일반 민중들은 각종 곡물의 가루로 만든 빵68)과 죽을 주식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잡곡으로 만든 빵은 질감이 거칠었으며, 금방 딱딱해졌다. 그러므로 빵을 먹기 위헤서는 빵을 적셔 먹을 수프나 고기 국물 요리가 필요했고, 이러한 요리가 중세 요리의 전형이 되었다.

양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념을 했다고 하더라도 소금 이외의 양념은 벌로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국물이 보편적인 요리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 것에는 요리 기구의 영향도 있었다. 대다수의 가정에는 커다란 솥만을 가지고 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모든 재료틀 솥에 쓸어 담아 끓이는 국물 요리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69) 중세 귀족들의 음식은 농민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밀로 만든 빵과 고기를 먹었는데, 특히 전사 출신으로서 이들 귀족들은 숲의 사냥감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사냥을 통해 식량을 조달하는 행위이기도 했지만, 전쟁에 대비하는 실전 연습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고기틀 통해 자연과 직접적으로 접촉했으며, 고기 자체를 먹옴으로써 고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자신에게 옮겨 온다고 믿었다.

특히 고기 중에서도 사냥한 고기가 전사의 호전성을 강화시켜준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평민들이 고기 국물을 먹은 것과는 반대로 사냥한 고기, 또는 사냥하지 않았더라도 고기를 직접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발전시켰다. 이들이 고기를 직접 먹는 방법으로 선호했던 것은 구이였다.

샤를마뉴(Charlemagne)는 의사들이 끓여먹을 것을 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냥한 고기를 꼬치에 꿰어서 구워 먹을 정도였다.70) 고기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당시의 학자들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6세기의 의사인 안티무스(Anthimus)는 『음식의 규칙에 대하여 (De Observatione Ciborum)』 에서 고기가 가진 명양학적 가치들을 강조했던 것이다.71) 그러나 이들 귀족들의 구이요리 또한 양념과 맛의 측면에 있어서는 농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에 이미 유럽에 알려졌던 후추가 이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대안이었지만, 무역이 위축됐던 중세의 특성상 유럽으로의 후추외 유입은 그 수가 매우 적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후추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적었을 것이다.

정복왕 월리엄의 연회가 남아있는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에서 중세 요리의 형태를 일부 살펴볼 수 있다.

태피스트리에는 영국 정복 이후 새롭게 구성된 귀족들에게 베푼 연회에서 제공된 스튜와 그릴에 구운 고기, 그러고 꼬치에 꿰어 구운 새와 고기 등 고기가 중심인 요리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고기 이외에 부풀지 않은 빵과 죽 등이 표현되어 있다.72) 이렇게 중세의 요리법은 비교적 단순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의 곡물로 만든 죽 과 빵, 그리고 수프와 구이 요리로 나눌 수 있는 중세의 요리법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점차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밑바탕에는 아랍 요리의 영향과 고대 그리스 로마 요리의 재발견이 있었다. 아랍의 요리는 여러 가지의 맛을 유럽에 전달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의 요리는 다채로운 재료돌을 유럽인들에게 전해주었다.73)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자료출처 •중앙대학교 대학원 •홍익대학교
  • 자료출처 바로가기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