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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1. 르네상스기의 요리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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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고대 맛의 재발견

♣ 고대 맛의 재발견 - 육체적 쾌락의 부활

고대에 대한 탐구는 예슬과 사상 같은 고상한 분야만이 아니라 요리 같은 일상적인 분야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높은 수준에서부터 낮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고대인들을 추종하고 있다는 사설을 잘 알고 있었다.

르네상스 사희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세속적 경향과 이상화된 도덕적 경향이 혼재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209) 그 중에서 요리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르네상스기에는 고대인들의 탐욕적인 식사가 부활 했고, 동시에 탐욕스런 식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고대의 요리 재료들이 부활했다. 고대 인들의 탐욕스러움은 폴루타르크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같은 저술가 들을 통헤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플루타르크는 로마의 장군인 투키우스 루쿨루스(Lucius L. Lucullus)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루쿨루스는 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자신의 저택에 모든 사람돌이 이용할 수 있도록 도서관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흐화로운 식사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진홍색 융단을 깐 식탁에 보석이 박힌 그릇을 사용했고, 섬세하게 요리한 진귀한 음식들과 향기로운 음식들을 먹었다. 루쿨루스가 폼페이우스와 키케로틀 위해 베푼 식사는 무려 5만 드라크마의 비용을 사용한 것이었다.210)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르네상스가 절정에 이르렀을 당시의 사람들은 루쿨루스가 누렸던 삶을 희망 했던 것이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도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에게 요리틀 통한 쾌락을 일깨워 주었다. 그 중에서도 수에토니우스가 묘사한 버텔리우스(Vitellius)의 사치스런 식생활이 유명했다.

그는 구토를 하면서까지 하루 4번의 식사틀 챙겼으며, 한 번의 식사에 최소 40만 세스테르스를 지출했다. 비텔리우스는 사치스런 식사와 함께 끊임없는 식탐으로도 유명했다.

제전이 거행되고 있는 중간에도 제단 위의 음식들을 먹어치우기가 일쑤였으며, 여행을 가는 도중에도 도로에 있는 음식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것이다.211)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책을 통헤 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의 이러한 식습관을 고스란히 본받았다.

쾌락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유지했던 풀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도 르네상스기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지만, 르네상스기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철학자들이 공격했던 삶의 방식을 추중하는 데에도 열중했다.

사치가 미덕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보석들을 수집하고, 미슬가와 학자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디치 가문의 수장들은 르네상스인의 전형이 되어있었다.

이돌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다른 르네상스인들도 그러했듯이 미슬이나 학문 같은 고상한 영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요리와 같온 분야에서도 사치를 부리는데 인색하지 않았다.212) 고대인들의 음식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는 점은 휴머니스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은 원예와 농업을 비롯한 고대의 각중 저슬들을 통해 고대인들의 음식에 관한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

아피키우스의 요리책을 비롯헤서 풀리니우스(Plinius)와 유베날리스(Juvenalis), 마르티알리스(MartiaUs), 콜루델라(Columella) 등 고대 로마 저슬가들의 음식 관련 서적들이 다시금 출판되어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213)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은 고대의 요리를 되살려 현대에 전달한 사람들이었다. 로마의 교황청 도서관에서 근무했던 풀라티나는 휴머니스트들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저슬한 『건전한 즐거움과 건강의 유지에 관하여』 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음식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작품이다. 풀라티나 이후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자연철학자인 잠바티스타 델라 포르타 (Giambattista della Porta)가 원예에 대한 고대인들의 지식을 모온 책을 발표했다.

포르타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외 명문가 가운데 하나인 에스테 가문의 후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대공에게 건강과 연금슬, 그리고 각중 관심사들을 조언하는 위치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앙리 2세의 내과의사였던 장 바티스트 브뤼에랭(Jean Baptiste Bruyerin)은 프랑스 요리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록 중 하나인 『음식에 관하여(De re Cibaria)』 를 저술했다.

또한 그는 신풀라톤주의 철학자인 생포러앵 상피에(Symphorien Champier)의 조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건강관련 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득일에서는 브튀에랭과 동시대인인 콘라트 게스너(Konrad Gesner)가 고대 요리에 대한 묘사를 남겼다. 그는 식물학과 고생물학, 그리고 동물학을 전공한 자연철학자이자 동시에 그리스어를 가르친 사람이기도 했다.

영국의 휴머니스트인 토마스 모겟(Thomas Moffet)은 자신의 책인 『건강 증진 {Healths /mprouement)』에서 다른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의 식생활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의 영국인돌 가운데 매우 뛰어난 지식인 중 하나로 캠브리지와 바젤(Basel)에서 공부한 의사였다.214) 17세기 초에도 고대의 요리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노니위스(Louis Nonnius)가 요리에 관한 책을 펴냈다.

그는 의사였지만 자연철학과 문학에 관심을 갖고 라틴어로 시집을 펴냈으며, 에스파냐의 사희지리에 관한 책을 출간한 사람이기도 했다. 영국의 존 이볼린(John Evelyn)은 원예에 관한 저작을 통해 셀러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와 자연철학에 대헤 책을 썼으며, 왕립 아카데미의 설립에도 깊이 관여한 사람이었다.215) 이러한 휴머니스트들은 15세기 중반 이후 르네상스 요리가 나륨의 공통점을 갖고, 유지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미 그돌은 고대인들의 저작에 대헤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아랍 요리의 영향력을 배제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요리를 되살리기 위헤 노력했다. 휴머니스트들과 고대인돌의 저작을 통헤 르네상스기 사람들은 짠맛의 진정한 의미롤 발견했다.

풀루타르크는 맛을 돋우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요하며, 소금을 넣지 않은 음식은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먹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역질을 나게 한다고 주장했다.216)

한편 폴리니우스는 신들에게 소금이 아니라 향을 바쳤 던 당시의 로마인돌을 비판하면서 소금을 바치는 사람이야말로 신의 온혜를 입을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217) 이러한 고대인들의 인식이 르네상스기의 사람돌에게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기에는 소금 자체와 함께 소금에 절인 요리 재료들에 대한 평관이 높아졌다. 16세기 중반에 브뤼에랭은 소금에 절인 생선이 고대인돌에게 최고의 요리로 환영받았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언급했다. 햄과 소금에 절인 고기에 대헤서도 당시의 사람들은 고대인들을 언급하면서 높은 평가를 내렸다.

발다사레 피사넬리Baldassare Pisanelli)는 모든 고대의 작가들도 돼지고기틀 소금에 절여 저장한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는 데 동의했다고 주장했으며, 노니위스는 지금은 어디서나 햄이 대접받는다고 기록했다.218)

짠맛을 지닌 요리들은 프랑수아 라블레(Francois Rabelais)의 작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et Pantagruel)』 에서 가르강튀아는 한번에 수십 통의 햄과 훈제한 소의 혀, 그리고 숭어알 절임과 소시지롤 먹고 있다.

또한 그는 양상추를 절인 다옴, 기름과 식초, 그리고 소금으로 양념한 셀러드를 먹는다. 그리고 단식 기간에는 저장된 참치, 소금에 절인 장어, 연어, 그리고 대구와 수백 가지의 셀러드를 먹어댄다.219)

이렇게 짠 음식들은 르네상스기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해산물을 통헤서도 르네상스기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누렸던 쾌락을 되살렸다. 세네카는 해산물과 쾌락이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보낼 때 좋아할 것 같은,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소문난 요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그것은 두 종류의 조개와 쉽게 먹을 수 있도록 가장자리를 도려내고 성게 알로 장식한 굴 요리였다. 그리고 접시의 가장자리는 뼈를 발라내고 살만 도려낸 승어로 가득 채워져 있다.”220)

16세기에 모펫은 최고의 맛을 내는 것은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키는 고기도 아니고, 플라톤과 아르케실라우스(Arcesilaus)를 떠올리게 하는 과일도 아닌, 다양한 종류의 생선이라고 주장했다.221)

몽테뉴는 고대인들이 생선을 요리함에 있어서 매우 엄격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생선이 고기보다 언제나 뛰어난 맛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들이 직접 요리사들에게 생선의 요리법을 지시했다고 기록했다.222)

생선이 고대의 쾌락으로서 르네상스기에 그 위치가 되살아난 것이 분명했지만,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이 생선보다도 최고의 해산물로 집착했던 고대의 쾌락은 바로 굴이었다. 세네카는 굴을 버섯과 함께 사치스러운 요리 재료 중에서도 최고로 꼽았다.

나는 나의 모든 삶을 굳은 결의로 계획했다. 시민의 덕목을 따르기로 했을 때, 나는 몇 가지 결심들을 세웠다. 그것이 내가 굴과 버섯을 영원히 내던지게된 이유이다. 굴과 버섯은 진정한 음식이 아니라, 사치스런 식사를 추중하는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는 범위틀 넘어가면서까지 허겁지겁 먹어대는 것들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들이다.223)

헤산물이 고대인들의 평가를 통헤 새롭게 주목을 받았지만, 르네상스기에도 가장 중요한 요리 재료는 여전히 고기였다. 그러나 고대의 영향은 고기에도 에외가 아니었다.

요리에 사용되는 고기의 종류가 차츰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고대인들의 미각을 되살리려는 휴머니스트들의 노력을 통해, 살코기 이외에 새로운 부위와 새로운 고기 손질법이 르네상스기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에 신대륙으로부터 칠면조가 새로운 고기의 재료로 유입된 것을 제외한다면, 이 시기에 이용된 고기의 종류는 점차 감소했다.

가마우지, 황새, 백조, 두루미, 해오라기, 저어새, 왜가리 등이 요리책과 시장에서 사라겼으며, 바다에서 서식하는 포유류, 즉 고래와 돌고래, 그리고 바다표범들도 식탁에서 사라졌다.224) 대신 소와 돼지, 닭 등 사육이 가능한 동물돌이 요리책에서 차지하는 버중이 점차 놀어갔다.

고대인돌의 미각이 부활되면서 각광을 받게된 고기 부위는 살코기를 제외한 내장과 각종 신체기관이었다. 수에토니우스는 르네상스기 사람들에게 로마의 황제인 비텔리우스의 요리를 통해 각중 부위들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알려주었다.

비텔리우스는 꿩과 공작새의 뇌, 놀래기의 간, 홍학의 혀, 그리고 장어의 이리를 함께 담아 내는 요리를 즐겨 먹었던 것이다.225) 이러한 내장과 기타 부위에 대한 애착은 그대로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풀라티나는 그의 책에서 새의 발과 벗으로 놀라운 요리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226)

비뤼에랭은 고대인들이 위와 췌장, 고환, 자궁, 그리고 간을 높이 평가했으며, 허벅지, 귀, 발, 같비, 코, 등뼈, 그리고 피 등은 대중적인 부위였기 때문에 상류층은 즐겨먹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아울러 그는 당시 요리에 자주 사용 된 고기를 짐승과 새로 나누어 짐승은 17부위로, 새는 11개 부위로 구분했다.227) 각종 고기 부위와 함께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고기를 손질할 때 주로 사용했던 다지는 방법을 물려받았다.

사람돌은 다지기를 고대의 고기 손질법으로 여겼으며, 다진 고기를 활용한 요리돌은 고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요리가 되었다. 풀라티나는 아피키우스의 요리책에 수록된 루카니아식 소시지 요리법을 자신의 책에도 수록하여 고대 요리와의 연계를 강화시켰다.228)

채소 역시 휴머니스트들이 고대의 미각으로 되살린 것들 중 하나였다. 르네상스기에 휴머니스트들이 중점적으로 읽었던 고대 서적의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농업과 원예였다. 고대의 농업 서적들은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에게 고대인들이 즐겨 먹온 여러 채소들을 알려주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르네상스인돌이 섭취하게 된 고대의 채소 중 대표적인 것이 아티초크와 아스파라거스였다. 폴리니우스는 아티초크에 대해 값이 비싼 재료이며 메우 특이하게 생겼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아티초크가 없는 식사를 차리지 않도록 미리 저장을 하기도 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아스파라거스에 대헤서도 기록을 남겼는데, 재배에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며, 야생의 것이 가장 맛있지만, 재배한 것으로는 라벤나(Ravenna)산이 최고의 것이라고 강조했다.229)

르네상스기의 학자들이 아티초크와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다른 채소들을 강조 하면서 고대의 지위는 한층 더 올라갔다. 16세기 말에 모벳은 아티초크에 대헤 매우 맛있는 요리 재료이며, 1크라운 정도에 거래가 된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아스파라거스에 대헤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카이사르와 같은 황제들이 먹는 요리 재료였다고 기록했다. 노니위스는 아티초크가 메우 고급의 음식이며, 이탈리아와 에스파냐틀 비롯헤 프랑스, 득일, 그리고 영국에서도 중요 작물이 되었다고 기록했다.230)

풀라티나는 폴리니우스를 따라 아스파라거스는 야생의 것이 가장 맛있다고 주장했다.231) 버섯 역시 르네상스인들이 고대인돌과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섭취한 요리 재료였다.

버섯과 솔개, 그리고 굴조개와 개똥지빠귀가 저마다 맛있다고 입씨름을 벌인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시대의 이야기틀 통헤, 버섯이 고대부터 이머 맛있는 요리 재료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232)

한편, 폴리니우스는 당시 로마에서 유행한 돼지버섯을 평가했는데, 그는 같리아산 돼지버섯에 대헤서는 향과 맛이 강하다고 평가한 반면, 소아시아 복서부 지역인 비티니아(Bithynia)산 돼지버섯에 대해서는 설사틀 유발한다는 냉소적인 평가룰 내렸다.233)

버섯에 대한 고대인들의 평가는 르네상스기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포르타는 버섯에 대해 호박으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예리한 칼과 은으로 된 식기를 이용해서 준비하는 가장 섬세한 음식이라고 기록했다.234)

이러한 휴머니스트들의 책에 수록된 버섯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헤 사람듈온 버섯 요리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은 고대의 서적을 통해 고대의 요리틀 재발견했다. 이들이 되살린 고대의 요리는 맛과 즐거움, 즉 쾌락의 요소가 강했다.

아랍의 사상이 건강과 관련되어 르네상스 초기의 요리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제 고대의 서적들과 그 안에 담긴 고대 그리스 로마 요리를 재발견한 휴머니스트들을 통해 건강이라는 요소는 미각의 즐거움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건강에 대한 여러 이론돌이 사라진 것온 아니었지만, 건강과 요리의 관계는 점차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건강을 대체하여 맛과 쾌락이 새롭게 연계되는 과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랍의 요소들이 고대의 요소들을 통해 대체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르네상스기의 유럽인 들은 고대를 통해 미각을 재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은 ‘미각의 재발견’ 이라는 새로운 취향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찾으려 하지 않았다.

요리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사희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경제적 여건이 바뀌면서 그에 따라 사희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변화했다. 요리는 이러한 사회의 위계를 드러내는 기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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