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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의 음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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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프랑스 음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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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누벨퀴진의 가능성

프랑스의 요리는 파리를 중심으로 발달했고 “프랑스의 정통요리가 근대화와 세계화하는 동안에 프랑스 요리의 지역주의, 지역화가 이루어 졌다”고 하지만78), 거꾸로 지방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닌 특색 있는 음식이 중앙에 영향을 주면서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한 것이 분명하다.

파리는 14세기 중반부터 이미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도시”79)가 된다. 그만큼 유럽 전역에 끼치는 영향력도 배가되는 도시였다. 현재 “파리에만도 1만 개의 외국 레스토랑이 있으며 프랑스 전역에는 4만여 개나 된다”80)는 것인데 프랑스의 요리를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다.

프랑스에는 국내에 “오트 퀴진과 퀴진 레지오날” 이 존재한다.81) 이는 귀족의 요리와 지방의 독특한 요리가 공존한다는 말일 것 인데, 프랑스의 요리는 귀족의 요리가 대중화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반대로 대중의 소박한 요리가 귀족의 요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었다는데 그 장점이 있는 것이다.

특히 대혁명은 프랑스 음식을 레스토랑 위주로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82) 대혁명으로 신분제 타파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서로 살을 맞대고 같이 겪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레스토랑이라는 말은 1786년 6월 8일 법령에 따라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배달요리집 및 ‘레스토랑 경영자’가 실내에 손님을 받아들이고, 음식물을 제공할 수 있는 허가가 주어졌다”83). 레스토랑이란 카페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의미한다.

그 핵심은 둘 다 신분제를 타파하는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에서 음식의 제한이 종교보다는 신분에 더 깊게 관계되어 있었다. “음식은 항상 사회적 상승이나 사회적 차별성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다.”84) 사실 “혁명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요리가 국제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85)는 의견도 있다.

프랑스의 음식은 혁명 이후 사회의 변화를 잘 이용한 레스토랑 요리사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브리야 사바랭의 활동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식법의 모든 발전을 지켜보았으며 그 모든 것을 종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활동은 아마츄어 요리와 전문 요리, 전통요리와 새로운 요리, 향토요리와 실험요리, 시골요리와 도시요리, 지방요리와 국제요리가 하나로 통합된 시기와 그대로 일치한다.86) 레스토랑이 프랑스 요리의 발전의 중심이었다는 것은 그 숫자의 증가에서도 알 수 있다.

“1789년 파리에는 100개의 레스토랑이 있었으며 제정시대에는 그 수가 무려 5 배나 증가했다고 한다”87) 이제 귀족의 독점물이었던 야생고기가 서민의 식탁에 오르고,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 말 한 것과 같이 “인권선언은 유리잔과 병 앞에서도 시민의 평등을 선언했다”는 것이다.88)

요리에도 신분의 폐쇄성보다는 개방성이 승리의 열쇠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계층의 결합은 서양 식문화의 발달에 결정적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18세기 중반부터 프랑스 요리에 헌정된 ‘최고급, 서양요리의 중심’이라는 명성은 앞으로도 가능할 것인 지 궁금하다.

이른바 프렌치 패러독스라는 것은 1989년 세계보건기구의 심장질환에 관한 연구에서 “프랑스인들의 포화지방 섭취량이나 혈청 내 콜레스테롤 농도가 영국인이나 미국인과 비슷함에도 심장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낮은 것”89)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7세기 유럽의 고급 요리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은 버터 중심의 기름진 소스”90)의 프랑스 요리는 요즘의 기준으로는 바람직한 식단은 아니었다.

“식도락가와 스트레스 받은gastromes et stressés”의 복합어로 “gastrolastress”라는 신조어가91) 말해주듯이 요즘은 음식을 탐하면 곧 살이 찌고 비만은 곧 질병과 닿아있는 것 같아 미식가들의 의욕을 위협한다.

그러나 식탁예술이 발달하는 데는 “탐식을 악덕으로 여기던 교회의 규율이 완화된 것도 한몫했다”92)라는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인들의 “폭음․폭식”, 그 들의 “인종적인 천성”93)이 한 몫을 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19 세기 말까지 ‘프랑스식 상차림service à la française’이라는 표현은 “요리 가지 수가 엄청나게 많은 식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94)

1960년대까지도 프랑스와 유럽 전체의 요리는 에스코피에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그의 음식의 특징은 식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너무 풍성하고, 무거우며, 소화시키기 어려울 정도의 음식”이었다.95) 그러나 프랑스 요리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실제로 고급 레스토랑이 파리에서 1년에 100개정도가 문을 닫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에스코피에의 영향으로 시각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 너무 복잡하고, 소비자가 찬탄할 만큼의 많은 양을 자랑했으며, 기름지고, 무겁기 때문에 소화시키기도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96)

실제로 프랑스에서 18세기 중반보다 당분을 25배 이상 섭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아이 음식을 만들면서 자신의 입맛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아이에게 해로운 당분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 아이러니도 관찰되고 있다.97)

그러나 음식물, 영양분을 과도하게 섭취하면 병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프랑스 음식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된다.98) 1960년대부터는 사람들의 생활패턴에 변화가 인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 하려는 사람들이 담백한 맛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시대상황과 맞물려서 폴 보 뀌즈Paul Bocuse, 레 트루아그로Les Troigros, 미셸 게라르Michel Guérard 등의 젊은 요리사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에서도 누벨퀴진이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 특징은 자연의 맛으로의 회귀이며, 가벼운 식사를 지향하는 것이다.

즉 질 좋고 신선한 재료의 선택, 육류의 기름을 빼는 방식의 조리법, 가벼운 소스로 재료의 천연의 맛을 구가하는 것이다.99) 결국 프랑스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유럽의 남쪽 요리전통과 결합하게 된다.

“남유럽 사람들은 절제하고 검소 하며 식물성 음식을 선호하”100)지 않는가? 드디어 유럽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프랑스가 식문화에서도 이루는 것이다. 이는 건축의 경우와 흡사하다.

1140년 일 드 프랑스에 위치한 생드니 수도원을 재건할 당시 고딕이라는 새로운 형태 의 건축양식이 태어난다.101) 여기서 우리는 이 양식에 고딕이라는 말이 쓰이기 전에 ‘오프스 프란시게눔’이라 불렸는데 그 용어는 “프랑스 작품”이란 의미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102)

이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북부 유럽의 건축 양식으로 보완하여 발전시킨 것이었다. 프랑스는 유럽의 북쪽과 남쪽의 특징을 모두 수용한 요리로 프랑스 문화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미래에도 서양 요리의 종주국 자리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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