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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프랑스 음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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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최고급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인들은 옷에, 독일인들은 집에, 프랑스인들은 음식에 평생을 바친다”18)는 말에서처럼 프랑스 사람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식사다. 프랑스 문화부는 “프랑스 문화의 3대 상징으로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요리와 함께 비스트로를 포함”시켰다.19)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로 분류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3대 상징의 2가지가 식문화와 관련이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요리가 예술이라는 사실도 명확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미식가들로 알려진 프랑스인들”20)의 요리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부터 “프랑스는 음식의 질과 미각에 대한 교육에 각별한 노력”21)을 기울인다. 사실 “요리란 만드는 사람의 재능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먹는 이의 미각 훈련에 좌우된다”22)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공급자만 키우는 것은 어딘지 허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요리의 질과 요리하는 과정의 기발함에 있어서 프랑스는 특출한 재능이” 있다.23) 미국에서도 ‘프렌치 바닐라’라는 명칭은 계란 노른자의 비율을 제대로 사용한 크림을 사용한 경우에만 붙일 수 있으며, 그 의미는 최고급 바닐라라는 뜻이다.24)

뉴욕 타임스의 식도락 부장 브라이언 밀러는 맨해튼의 수천 개 레스토랑에 그 등급을 매겼다. 최고의 음식점을 나타내는 별 네 개짜리는 다섯 개인데 모두 프랑스 식당이며, 별 세 개짜리 16개 중에 12 곳이 프랑스 음식점이 고 나머지 4곳이 이탈리아 음식점이다.25)

이런 이미지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 간다. 사람들은 이시기에 요리에서 “프랑스식à la français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의미는 “높은 정도의 세련됨”을 의미했다.26) 최고급 서양요리란 프랑스 요리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럽에서 “중세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식문화의 주도권을 이탈리아가 잡았”27)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음식이라 하면 조용하고 격식 있는 레스토랑과 정장을 한 사람들, 그리고 품위 있게 그들의 식사를 보조해 주는 웨이터, 복잡한 식사예절, 다양한 음식이 하나씩 순서를 지켜서 나오는 모습을 연상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요즘 양식집에서 보는 “메뉴의 유행은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변경으로, 그리고 전세계로 퍼져나간”28) 것이 사실이지만, 이른바 코스요리라 여겨지는 서양요리의 대명사 프랑스 요리의 서비스 방식이 19세기 중반 경에 와서야 러시아식 서비스의 영향을 받아 일반화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29)

일반적으로 프랑스 음식은 ‘맛있는 요리와 포도주를 곁들인 성찬’이라는 표현으로 일축하지만 프랑스 원주민인 켈트계의 갈리 아인은 원래 “북유럽의 이교도들”과 같은 “맥주문화”30)였다.

결국 포도주의 보급은 로마의 침입 이후이며 16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프랑스 음식은 ‘야채스프 pot au feu’와 같은 소박함의 극치였다고 한다.

1533년 메디치가의 카타리나 공주가 미래의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당시에 가장 세련되고 화려했던 피렌체의 문화, “피렌체의 우아한 식사예절과 이탈리아의 훌륭한 요리사들”31)이 프랑스의 궁정에 영향을 끼치면서 요리에 혁신을 가져오고 그것이 프랑스의 음식전통이 되는 것이다.

사실은 1750년까지는 프랑스의 일반 사람들은 중세 요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찾기도 어려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헤이그에서 밀라노, 마드리드에서 런던에 이르기까지 거의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 고급요리의 탄생을 18세기 중반”이라고 보고 있으며32), 프랑스가 요리에서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세기 초기라는 것이 정설이다.33)

우선 프랑스 요리의 우수성은 그 다양성에서 기인한다. 음식의 다양성은 식 재료와 요리를 만드는 사람들의 다양함에서 온다.

지리적으로 다양한 토양과 기후는 프랑스가 “유럽 땅 전체에서 산출되는 음식재료들이 거의 산출되는 유일한 나라”34)가 되도록 만들었으며, 프랑스에는 인종에 있어서도 전통적으로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프랑스 국민 중 약 4분의 1은 적어도 부모 혹은 조부모 중의 한 명이 외국인이라는 통계”35)가 있으며, “프랑스는 유럽의 지적, 상업적 중심지로서 유럽 각국에서 모여든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끊임없이 어우러지던 공간이었다.”36) 이런 ‘퓨전의 문화’가 프랑스 음식의 특징을 잘 말 해주는 것이다.37)

식문화에 있어 유럽 전체의 전통을 이었다는 것, 즉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적 퓨전에 성공했다는 것도 프랑스가 서양요리의 종주국이 되는 데 일조한다. 프랑스는 고대 로마의 요리에 덧붙여 중세 시대 동양으로부터 수입한 양념에 대한 집착으로 발달한다.

그리고 유럽 고급요리의 기원이 된 “근대요리의 최초의 형태”38)인 이탈리아의 세련된 식문화가 그 근본이 된다. 심지어 현재 식문화에서는 무시당하고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영향으로 18세기부터는 고기의 질에 집착하여 비프스테이크와 럼스테이크의 맛에 매료되고, 20세기 초기 부터 대중화에 성공하는 것이다.39)

그리고 시간의 퓨전에서 미래가 남아있는데 1960년대부터 시작된 건강과 관련 있는 음식문화패턴에 적응하여 ‘누벨 퀴진 Nouvelle Cuisine’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요리법으로 미래까지 아우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가 1957에 발표한 「신화론Mythologie」에서 보듯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은 비프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이다.

그가 말하는 “국가적인 상징”, “프랑스 문화․프랑스어권 고유의 특성francité”40)인 감자튀김의 재료인 감자는 원래 잉카에만 있다가 16세기 초에 유럽에 들어와 프랑스에서 식용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대표음식의 재료가 겨우 200년 남짓 되었다니 문화권마다 서로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특히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의 교류가 프랑스 요리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1758년 파리에서 출생한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Grimod de La Reynière는 스위스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혁명 후에 파리에 머물며 음식품평회 등의 행사를 관장하면서 프랑스 요리의 전통을 지켜나간 경우이고, “현대 프랑스 요리의 시조”41)라 불리는 마리 앙토냉 카렘Marie Antonin Carême은 “유럽 왕실에서 요리를 담당했다.”42)

그는 대혁명이 일어난 1879년에 태어나 1815년 러시아 알렉 산더 차르의 주방장을 지냈으며 유럽의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마지막으로 로칠드 가의 주방장으로 약력을 마친다.

그는 서양의 기초 소스인 스페인 소스, 크림소스, 독일 소스 그리고 베샤멜 소스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다양한 소스를 개발한다. 그의 요리는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특징을 지닌다.43)

“현대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 “요리의 제왕”44)이라 불리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August Escoffier도 마찬가지로 몬테카를로, 런던의 사보이 호텔, 로마의 그랜드 호텔, 다시 런던의 칼튼 호텔 등의 최고급 호텔의 레스토랑 주방장으로 일 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킨다.45)

여기에서 강조해야할 사항은 프랑스 요리사들이 유럽의 다른 나라 음식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프랑스 음식에 적용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종합한 요리의 용어 정리 등을 포함한 이론화에 힘을 쏟았고, 요리의 체계화에 성공하여 프랑스가 명실상부한 서양요리의 종주국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래서 서양요리의 이론으로 들어가면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 기본 개념의 용어가 프랑스어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설형문자로 표시된 요리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17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46) “수사본으로 된 최초의 요리책”47)은 1497년에 출판된 창의력이 뛰어난 타이유방Taillevent의 「르 비앙디에Le Viandier」다.

프랑스의 요리사들은 실제로 요리를 만드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일찍이 그것을 기록하고 체계화하는 데 공을 들인다. “프랑스 요리의 위대함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대 원칙들을 정립 했다는”48) 평가를 받고 있는 피에르-프랑수아 라 바레느Pierre-François La Varenne가 1651년에 출간한 「프랑스 요리사」는 서양요리의 전범이 된다.

결국 프랑스는 요리분야에서도 시대와 장르를 초월하고 타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프랑스 문화화”49) 하면서 발전을 도모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유럽에서 가장 빨리 중앙집권을 이룬 프랑스는 음식의 단일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한 적이 있다.

특히 혁명 이후 당국은 하나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 지방색을 없애려는 노력을 했으며 나름대로 성공도 했다.50) 그리고 1871년 파리 코뮌은 도시 안에서는 오직 한 종류의 빵, 평등의 빵만을 생산하도록 하는 법령을 발포하는 데 이르렀고51), 1940년대에도 빵의 표준화에 노력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도 프랑스에는 81개의 다양한 종류의 빵이 존재한다. 이는 빵 속에 호두나 건포도 등을 넣는 것으로 변화를 주는 종류를 헤아리지 않은 것이다.52) 특히 “프랑스 사람들은 전체 국토에 걸쳐 분산 분포되어 있는 35000개의 수공 업적 빵집을 우선적으로 신뢰한다”53)는 사실에 주목하자.

즉 맛의 표준화는 태생적으로 프랑스 사람들에게 알맞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다양한 식재료와 다양한 인종에도 불구하고 표준화와 중앙집권이 가능했던 미국의 식문화와 대조되는 프랑스 사람들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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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중앙대학교 대학원 •홍익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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