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경우에는 일종의 금욕주의가 있어, 음식이라는 것은 몸을 지탱하는 ‘약’에 불과 하여, 음식이 맛있다고 하여 그 맛에 빠져들어서는 더욱 숭고한 것을 찾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또한 불교의 윤회사상에서도 동물은 인간이 다시 태어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살생하여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채식주의가 생긴 것이다.
불교는 채식에 종교적 신성을 부여해 주었고, 동시에 소의 도살도 자연 금지되었다. 이외에도 불결한(또는 불순한) 음식의 개념들이 강화되었다. 불결한 음식에는 칼로 자른 고기 • 개고기 • 인간의 고기 • 육식동물의 고기 • 메뚜기 • 낙타 및 털이 없거나 지나치게 많은 동물의 고기가 포함된다.
또한, 밤새 방치해 둔 쉰 밥, 시장에서 만들어진 기성음식, 곤충이나 쥐 • 개 - 고양이 • 인간 등에 의해 더럽혀진 음식물은 식용으로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불교의 사상은 동아시아 삼국의 식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원래 유목민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육식이 발달했다. 수렵한 야생동물을 먹기 시작하다가 후에는 가축으로 길러 도살하여 식용했다. 개, 돼지, 소, 말, 닭, 양 등의 목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육류의 조리방법이 발달하여 일반화 되었다.
우리나라 육류요리는 소, 돼지, 닭이 주류를 이루며 조리법은 구이 • 찜 • 고음 • 편육 • 포 등 다양하다. 구이법은 그 중 가장 중심적인 요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되어 법흥왕 16년(529년)에 살생 금지령이 내려졌고 육식 금지의 계율이 강요되어 상류층 귀족들로부터 채식 위주의 식생활로 점차 변화되어 갔다.
그러나 가난한 서민들은 불교의 교리 자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핍했기 때문에 우선 연명하기 위하여 본능에 따라 육식을 했고, 닥치는 대로 도살하거나 강에서 고기를 잡아서 양질의 단백질을 보충하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번성으로 종교적 차원에서도 백성에게 살생 금지의 계율을 강요했으나, 몽고 침입 후 다시 전국적으로 육식 문화가 성행 했는데, 서민층뿐만 아니라 상류층에서도 일반적으로 육식이 성행하여 고기를 불에 직접 굽거나(直火食), 삶아서(熟食) 조리해 먹거나 또는 생식하였다.
이를 제한하기 위하여 문종 20년(1066년)에는 3년간 도살을 금지하고, 예종 2년에는 아예 일체의 상생 금지령을 선포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육류로는 양, 돼지, 개, 닭, 꿩, 토끼 등의 고기를 즐겨 먹었으며, 농우로 이용한 쇠고기는 피했다고 한다.
몽고 침입 이전에는 윤회설 내지는 불계를 받드는 의미에서, 몽고 침입 후 약 1세기 동안은 농우의 보호 차원에서 금지했으나 일부 귀족층들은 여전히 소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몽고의 침입으로 북방 유목민인 몽고인들의 육식 문화의 영향이 고려인들의 육식 문화로의 전환을 진척시킨 것이다.
조선 시대에 이르게 되면 세종 2년(1420)에 우마 도살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다만 소가 너무 쇠잔하여 우경을 할 수 없을 때 관의 허가를 받은 후에 잡을 수 있었다.
말은 고려 말부터 역마와 군마로 이용하기 위하여 일체 식용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러한 식풍속은 거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쇠고기의 소비는 계속되어, 너무나 귀한 동물이기 때문에 소의 내장, 꼬리, 뼈 등을 고루 조리하여 먹게 되었다.
쇠고기를 맹물에 오래도록 삶다가 감을 쳐 먹는 ‘탕’이 있는데, 흔히 곰탕, 설렁탕, 설농탕으로 불렀다.
‘설렁탕’은 국이 끓는 상태가 설렁설렁하다는 데서 음운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되며, 설농탕은 ‘선농단(先農壇)’에서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머리, 꼬리, 뼈, 내장, 도가니 등을 모아 끓여 먹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횐눈처럼 짙은 우윳빛이 난다는 데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렇게 국물이 주종이 되는 곰탕, 설렁탕은 시장 매식의 대표적인 '탕밥’이 되었다. 한편 소의 도살 금지가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커서 조선 시대 사람들은 소 이외에 다른 식용 동물을 개발해야만 했다.
소를 대체한 육식용 동물로는 닭, 돼지, 개, 꿩, 노루, 사슴, 멧돼지, 양, 염소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돼지는 일찍부터 가축화가 이루어져, 조선 초기부터 우육 대신 식용되는 육류의 주종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임원16지’, ‘규합총서’를 비롯한 의학서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으면 중풍을 일으킨다는 설이 조장 되었으며, 이 때문에 돼지고기 요리가 상류층에서 기피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요리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현저하게 기피하는 식품이 된 이유가 되었다. 이렇게 상류층 양반가에서는 돼지고기를 기피했으나 서민과 하층민들은 이를 즐겨 먹었다.
주로 삶아서 씰어 먹거나 구워 먹었고, 돼지의 내장에 갖은 야채를 곡분 양념과 혼합하여 채워 먹는 순대는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돼지고기는 제례 음식으로 우선하여 손꼽을 수 있는 데, 특히 통째로 삶은 돼지머리는 무속 신앙과 가신 숭배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식품으로 꼽힌다. 한국의 무속 중에 금기나 또는 귀한 음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동물은 돼지 • 개 . 거북 . 잉어 . 뱀 등과 기타 파충류이다.
돼지가 자주 굿이나 제사에 쓰이고 있는 이유는 전해 내려오는 신화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옥황상제 밑에 ‘업’장군과 ‘복’장군이 있었는데, 항상 그들은 서로 시기하여 싸움을 하였기에, 옥황상제가 두 사람 중 탑을 먼저 쌓는 사람을 가까이 하겠다고 말하자 ‘업’장군이 잔꾀를 부려 이겨 옥황상제가 ‘업’장군을 가까이 하였다.
그 후 그것이 탄로나 옥황상제가 ‘복’장군을 돼지로 환생하게 하여 네 발 달린 짐승이나 백성(사람)들이 상제께 소원을 빌 때 중개역할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한 무인(武人)들은 단군을 시조로 섬기고 있는데, 돼지도 역시 인간이 되려다가 실패한 동물이기 때문에 돼지는 자주 소원의 사자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소와는 달리 비교적 서민들도 구할 수 있는 짐승이기 때문이다.
닭고기는 돼지고기 다음으로 애용된 식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집집마다 닭을 길렀음에도 한방 의학에서 돼지고기와 함께 닭고기도 중풍을 일으키는 식품으로 꼽았기 때문에 즐겨 먹지는 않았다.
그러나 귀한 손님이 왔을 때나 경사 때 쓰이는 식품으로 주목을 받아 손님 중에서도 제일 귀한 사위, 즉 백년손님에게 씨암탉을 잡아주는 것을 최상의 대접으로 쳤다.
돼지고기나 닭고기가 중풍과 관련되어 제한(상극) 식품으로 다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개고기는 보양에 적절한 식품으로 권장되었다. 특히 여름 한철 농번기에 적절한 양질의 단백질 보충을 위해 농촌에서는 개를 잡아먹는 습관이 일반화되었으나, 일부 층에서는 금기식으로 여겨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개고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불교의 영향 속에서 동물 중 가장 영물이고 사람과 가장 가까웠던 개를 얼마나 식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몽고인의 영향을 받아 식용했음은 틀림없다.
개고기는 돼지고기와는 달리 지역에 따라 쓰임세가 다르다. 즉, 북한지역에서는 굿을 할 때 개고기가 귀한 고기로 쓰이는 데 대하여, 중부지역(천안 이북)에서는 개고기가 허드레음식(잡신굿에서 잡신용)으로 쓰이고, 천안 이남에서는 거의 쓰이지(경천굿, 전혀 안 씀) 않고 있다.
또한, 한 고장에 있어서도 산의 모양 과 굿하는 위치에 따라 육류나 생선류의 쓰임세가 다른 경우도 있다.
♣ 중국
중국은 한족을 포함하는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각 민족마다 서로 다른 음식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중국의 모든 음식문화를 중국의 음식문화라는 한 가지 틀 속에 상세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 대부분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장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한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은 진령(秦領)산맥과 그 동쪽 연장선상에 회하(推河)를 잇는 선(진령 • 회하선)이 지리학적으로 화북 (華北)과 화중(華中)의 경계선이다.
이 선의 북쪽은 밀농사, 남쪽은 쌀농사 지역이다. 즉, 화북지역에서는 밀가루 음식을 먹고, 화중지역에서는 쌀을 먹고 있다. 중국인의 음식 구조는 대체적으로 곡식과 채식을 위주로 하고 육식을 보식(補食)으로 하는 식생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중국 내에서도 몽골이나 신강 지방의 유목 민족들은 육식을 위주로 하기도 하지만, 중국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민족의 경우는 대부분 곡식을 위주로 하는 식생활을 기본 구조로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요리는 남자의 일이었다.
옛날 자료들은 궁이나 권력가에 관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가 요리의 주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궁의 조리사가 의사보다 지위가 위였다.
또한 중국에서는 음식이 약이라는 ‘의식동원(醫食同源)’ 사상이 강하여, '본초(本草)’라는 책에는 대개가 약에 대해서 쓰여 있는데, 이들이 거의 대부분 먹을 수 있는 식품이었다.
특별한 약을 먹지 않아도 여러 가지 다양한 음식을 함께 먹고 있으면, 또한 병들었을 때에는 이 음식을 먹으면 병이 낫고 맛있게 먹으면 그것이 자양이 되어 약이 된다고 하는 사상이 상당히 강하다. 이것은 역으로 음식에 대한 일종의 향락주의를 정당화하는 형태로 발전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인의 다양한 요리는 이러한 ‘의식동원’의 관념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개나 뱀을 비롯한 곰발 바닥(能掌), 바다제비집(燕萬), 원숭이 골 요리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조리시 풍부한 음식재료를 사용하는 것과 음식에 대한 보신 관념을 갖고 있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음식의 균형적 섭취를 통하여 건강을 극대화 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식보(食補)를 위하여 중국인들은 가정에서의 식생활이나 외식을 막론하고 영양과 맛의 균형을 강조하며, 이것은 식단의 균형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육류와 채소류, 어류와 탕을 언제나 함께 식단에 올림으로써 영양과 미각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조리과정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음식은 재료의 특유한 맛과 향을 내기 위하여 한 가지 재료만을 가지고 조리하는 경우도 있으나 육류와 채소, 해산물과 채소 등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함께 섞어 조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조리법은 음식물을 고루 섭취함으로써 균형 있는 신체 건강을 유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중국인의 먹는 방식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숙식(熟食)’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부(禮部) • 왕제(또制)’의 기록을 보면 중국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익혀 먹는 숙식과 날로 먹는 생식을 기준으로 중국민족과 주변 민족들을 구별하였으며, 이러한 습관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육회를 먹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육류를 날로 먹는 문화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육류발효식품인 화퇴(火腿)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돼지고기를 양조발효(酸造酸酷)시킨 것이다.
표면색이 투명한 황갈색이 나며, 절강산(所江産)의 금화화퇴(金華火腿)인 남퇴(南腿), 강소산(江蘇産)의 북퇴(北腿), 그리고 운남산(雲南産)의 운퇴(雲腿)의 3종류가 유명하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 67년부터인데, 인과응보와 생사윤회를 강조하고 살생을 죄악 시하는 불교는 승려뿐만 아니라 일반 불교도들이 그들의 식생활 문화에서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을 위주로 하는 음식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소식(素食)을 위주로 하는 이러한 음식문화는 17세기 청나라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여 일반 궁중 요리사 외에 소식을 만드는 요리사도 따로 두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육식을 금하는 대신 채소 음식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식용 가능한 채소를 발굴해 내고 이를 조리하는 방법을 많이 개발함으로써 중국의 음식문화를 더욱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중국에서 이슬람교도들의 식생활 습관은 독특한 음식문화로 평가 받는다.
한족들이 주로 돼지고기로 요리를 하는 반면,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남방에서는 쇠고기를, 북방에서는 양고기를 주로 상용한다. 중국인들이 쇠고기와 양고기를 먹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거의가 이슬람교의 공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경을 비롯한 북방의 주요 도시에서 먹을 수 있는 ‘취엔양씨(全羊席)’, ‘쑤안양로우(涮羊肉)’, ‘양로우추안(羊肉串)’ 등은 이슬람 음식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본
일본인의 전통적인 식사 패턴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공통적인 것이었다. 즉, 쌀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잡곡, 고구마가 대용식으로 있으며, 이들을 주식으로 하여 부식으로 반찬이라고 하는 두개의 카테고리로 식탁을 구성하는 식품을 분류할 수 있다.
반찬은 주로 생선과 채소였으며, 육류는 고대 불교에 기원 하는 금기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거의 먹지 않는 식사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식문화가 한국과 중국의 식문화와 뚜렷하게 다른 점은 일본에서는 쇠고기 • 돼지고기 • 닭고기 등의 조리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에서 이들 육식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데에는 사람이 먹기에 부족한 곡물을 동물에 먹일 수 없었기 때문에 가축수가 아주 적었다는 이유 이외에도 종교적 •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도 옛날에는 수렵을 통해 육식을 한 것으로 드러났으나, 불교를 열심히 믿었던 덴무천황(天武天皇) 이 육식을 금하는 칙령을 내린 후로는 육식에 대한 문화가 쇠퇴하였다.
그 후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는 닭이나 꿩과 작은 새들은 열외 취급을 하여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1549년 많은 외국의 선교사가 기독교와 함께 육식 문화를 전하여 일본 사람들이 육식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1639년에 쇄국의 단행으로 기독교가 금지되고 다시 생선과 야채에 의지하는 식생활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쇠고기 판매가 최초로 시작된 것은 1862년의 일이며, 메이지(明治) 5년에 처음으로 일본왕이 궁중에서 쇠고기를 시식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까지도 수육류는 먹지 않았으나, 메이지 유신 때부터 문명개화가 되어 육류를 먹기 시작하였으며, 그 양은 많이 늘어났으나 아직도 여전히 서양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양이다. 쇠고기를 먹어도 괜찮아 지자 많은 사람들이 쇠고기를 먹었으나 이것도 처음에는 회로 먹었다고 한다.
즉, 일본인은 고기를 생선처럼 생각하여 먹었으며, 역시 목축민들의 먹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일본인이 1세기 정도 전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쇠고기 전골을 먹지 않으면 개화가 덜된 사람’ 취급 당했듯이, 육식을 하는 것이 서양문물을 도입하여 문명개화하는 방법의 하나라는 통념이 있었다.
이 때에 해금에서 풀린 쇠고기라고 하는 식품을 ‘비프스테이크’나 ‘비프스튜’가 아니라 일본적인 음식문화인 규나베(牛禍)라는 전골 음식으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가족이 함께 먹게 된 것은 메이지 시대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그 집의 주인이 먹은 다음 남자가 먹고, 마지막에 여자가 먹었다고 한다. 개인상의 형식은 다이쇼(大正)시대의 챠부다이(다리가 낮은 밥 상)의 보급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다이쇼 중반에는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을 앞지르는 산업구조의 변화가 일어나고 도시의 봉급생활자(셀러리맨) 등의 중산계급의 증가를 재촉한 것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일터에서 거의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는 아버지와 함께 가족 모두가 같은 식탁(챠부다이)에 둘러앉는다고 하는 식탁의 새로운 형식과 먹는 스타일의 변화가 생겼다.
이 때에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서 쇠고기로 만든 냄비요리를 가끔 먹는 것이 온 가족이 기대하는 식사였다고 한다.
이전 까지는 규유나베(牛鎬)라고 불리던 것이 다이쇼(大正)시대 때부터 ‘스키야키’라고 불리면서 쇠고기 음식에 대한 기호가 높아졌으며, 이에 대한 기호는 문화의 산물이라 하겠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서양문화가 보급되어 야채를 먹는 방식도 샐러드로 생야채를 먹는 경우가 많아 졌다.
제일 많이 변화한 것은 육류를 재료로 하여 유지류를 사용한 요리가 보급되어, 새로운 요리법이 많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의 식사는 서양화되었다 또는 중국요리풍의 음식까지도 도입한 국적이 없는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본 • 서양 • 중국의 3가지 요리를 한다는 일본인의 식사도 어떻게 보면 육류음식을 중심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근래에 한국의 불고기 문화가 도입되어 일본 각지에 ‘야키니쿠 레스토랑’이 번성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